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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구섭, 남북이산가족협회 대표
[앵커]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는 이산가족 상봉, 단체상봉이 이제 잠시 뒤면 시작됩니다.
저희가 오늘 이산가족 가운데 한 분을 초대했습니다. 북에 두고 온 동생을 반세기 만에 만났고 또 두고 온 어머님은 끝내 만나지를 못한 심구섭 남북이산가족협회장 저희가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저희가 오늘 심 회장님의 사연, 이야기는 심 회장님의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 한장에서부터 시작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모습인 것 같은데요. 제가 아까 사진을 봤습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1942년에 찍으신 거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누구누구신지 소개를 해 주십시오.
[인터뷰]
가운데에 앉은 분이 할머니고 뒤 두루마리 입으신 분이 아버지고 보면 저게 어머니고 나이 좀 더 위가 저입니다. 그 옆이 남동생입니다.
[앵커]
동생분 성함이?
[인터뷰]
심학섭.
[앵커]
몇 살 차이 동생입니까?
[인터뷰]
3살 차이입니다.
[앵커]
3살 차이이면 아주 친하게 뛰노신 사이겠군요.
[인터뷰]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그때는 아마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같습니다.
[앵커]
여동생하고는 몇 살 차이입니까?
[인터뷰]
10살 차이입니다.
[앵커]
그러니까 저게 1942년 사진이고요. 그 다음 사진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사진이 6년 뒤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아버님은 왜 안 계시나요?
[인터뷰]
저때는 저희 아버님이 해방된 다음에 38선 넘어서 저희 아버님이 먼저 남쪽에 넘어오시고. 저게 여동생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까 사진에 없었는데 제 여동생입니다.
왼쪽에 있는 게 저이고 가운데 앉은 게 제 남동생 그리고 저분이 어머니입니다.
[앵커]
3살 아래 남동생 심학섭 선생님이시군요. 선생님께서 지금 81살, 연세가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34년생입니다.
[앵커]
동생 학섭 선생님께서는?
[인터뷰]
3살 차이니까 37년생.
[앵커]
78세가 되셨겠군요. 저때 아버님이 안 계셨던 것은... 사진 다시 보여주시고요. 아버님이 조선일보 기자셨고 그래서 북쪽에서 반동분자로 찍혔었다면서요?
[인터뷰]
해방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는데 옛날 인텔리, 지주 이런 사람들은 탄압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프롤레탈리아 정권이 섰는데 전부 탄압이 심하고 또 몰수당하고 그래서 저희 부친이 해방된 다음에 먼저 나오셨습니다, 남쪽으로. 그리고 1년 후에 나오신 다음에 편지가 왔어요.
아마 어머니한테 저를 남쪽으로 보내라, 이런 편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해에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할머니 묘소에 갔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렸으니까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때 어머니가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에 엎드려 울면서 이 강토에 언제 이런 비극이 없겠습니까, 그러셨는데. 그런데 그때는 강토라는 얘기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
그런데 생생하게 그때 저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까 저희 어머니가 상당히 인텔리예요.
그래서 아마 저를 남쪽에 보내면서 마지막에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한테 데리고 간 묘소참배 같습니다.
[앵커]
조금 전 저희가 속보를 자막으로 전해졌는데 지금까지 전해진 소식은 그게 다입니다. 조희팔의 사촌동생으로 추정되는 40대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만 일부 들어와 있고요.
사촌동생인지 조카인지는 확인 중이라고 하고요. 40대고요.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어디서 발견됐는지 정확한 경위는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해지면 바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래서 아버님께서 먼저 월남을 하셨고 그리고 48년도에 저 사진 찍은 직후에 어머님하고 여동생하고 같이 월남을 하셨다가 그래서 어머님하고 여동생은 같이 남쪽에 모이셨는데 그러다가 어쩌다 또다시 헤어지게 되셨습니까?
[인터뷰]
그때 제가 어려서 잘 몰랐는데 어머니는 저를 아버님한테 맡겨놓고 제가 와서 3일 만에 중학교 모자를 썼어요. 그때 저희 아버님이 지방 신문사 편집국장하셨고 또 고등학교 교사직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3일 만에 제가 교복을 입고 모자 쓰고 가방 들고 문 앞에 나서는데 그때 어머니와 여동생이 멀리서 보더라고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왜 여동생하고 들어갔냐 하면 북한에 남동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때는 38선이 언제고 없어지고 남북한이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고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3년 뒤에 전쟁이 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영 이별한 것이죠.
[앵커]
그러니까 어머님과 이별한 뒤 3년 뒤에 전쟁이 난 거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하고 4년 되겠네요. 중학교 입학할 때가 1학년이고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전쟁이 났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곧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를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군요.
[인터뷰]
그때는 남북간에 편지왕래가 있었어요. 그때는 지금 판문점이 아니고 개성에서 미 군정과 소련 군정이 들어설 때, 우리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편지 왕래하고 했는데 그다음에 남북한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도 편지 왕래는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졸업한 해가 전쟁나던 해인데 그때 5월 16일에, 제가 잊지도 않습니다, 졸업할 때 제가 공부를 좀 잘했어요. 상 받은 것을 북한에 보냈더니 6월 25일. 한 달 후에 전쟁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에 동생을 만나봤더니 어머니가 그 사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러니까 전쟁난다는 것은 생각을 못했죠.
[앵커]
그래서 헤어지신 어머님을 평생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 심정이 잘 상상이 되지 않거든요.
[인터뷰]
그것은 저뿐만 아니고 모든 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오늘도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이 있지만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 90세 넘은 분들은 북한에 처자식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북한의 가족 소식도 모르고 아버지가 아들 소식도 모르고 어머니가 딸 소식도 모르고 이런 세월이 한 해, 두 해가 아니고 7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게 우리 민족의 비극인데요. 이 비극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앵커]
어떨 때 제일 어머님이 그리우셨습니까, 살아오시면서요?
[인터뷰]
제일 그리울 때가 명절 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추석 때 고향에 가지 않습니까. 또 설 때는 고속도로 미어지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사람들은 TV 화면에 고속도로 장면 나오는 것을 보면 화면 돌립니다.
남들은 다 고향가는데 저희 이산가족들은 갈 데가 없고 먼 북녘 하늘만 바라보고 눈물 흘리지 않습니까? 그게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이산가족들이 다 갖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앵커]
그 위에 어머님의 영상이 오버랩이 되시는군요.
[인터뷰]
그렇죠. 결혼할 때, 제가 결혼식 마칠 때 많이 울었습니다. 결혼식 할 때, 그때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니까 식장에 나오면서 신랑이라는 사람이 눈물범벅이 되니까 제 친구들은 다 이해해요.
그런데 아버지나, 여기에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갈등이 가정적으로 많이 생겼죠.
[앵커]
결국 어머님은 못 만나신 것이죠, 그 이후로?
[인터뷰]
그렇습니다. 전쟁난 이후에 제가 학생 때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지 않습니까? 그때 학도병 모집이 있었어요. 대구에서도 그렇고 부산에서 그렇고. 그때 어린 나이에 학도병에 지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 국군에 참전해서 전쟁에 나가서 이 나라를 지킨다는 그런 마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고향에 가서, 그건 낙동강전투 말고 국군이 우리가 북진한 다음에 제가 피란 갔다가 제가 강릉에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많이 전사했더라고요, 학도병으로. 그래서 나도 전쟁 나가야겠다, 그래서 학도병에 들어갔는데 그때의 마음은 나라 위하는 마음도 있고 또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만나야 되겠다, 동생들을 만나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아마 반반됐을 겁니다.
[앵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학도병에 지원을 하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러다가 1990년에 북에 어릴 때 같이 뛰어놀던 동생분한테 편지를 받게 되셨는데.
[인터뷰]
그게 참 우연한 기회인데 제 선배 분이 미국 시민권 가지고 계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북한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한국에 왔더라고요. 그런데 그 편지에 예전 조선일보 기자였던 누구누구 아들을 찾는다, 딱 두 줄이에요.
처음에는 사기꾼이 아닌가 했는데 봉투를 보니까 북한 우표가 맞아요. 그래서 이분이 편지를 하나 써라, 가족사진과. 그래서 전 전쟁 때는 동생이 죽고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한 3개월 후에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생이 살아서 편지가 왔더라고요.
[앵커]
그 편지 좀 보여주시죠.
[인터뷰]
저게 북한에서 처음 받은 편지입니다. 지금 잘 안 보입니다마는 저 편지에 보시면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3일 만에 다시 정신 차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구섭이가 보고 싶구나하면서 더 쓴 게 있어요.
[앵커]
1967년 6월 21일날 뇌출혈로 지금의 집에서 별세하셨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의식을 회복하고 구섭이가 보고 싶구나, 이 한마디 말씀을 남기시고 더 이상 말씀을 남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군요.
[인터뷰]
저 편지 보면 눈물 자국이 있습니다. 얼룩이 졌어요.
아마 제 동생이 저걸 쓰면서 아마 눈물을 흘린 것 같아요. 제가 저 편지를 받고 몇날몇일을 울었습니다. 참 그것은 아마 오늘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 나이 많으신 분들이 가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아마 이런 비극이 그 현장에서 많이 벌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1세들이 못 나오고 2세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니 돌아가신 얘기, 또 아버지 돌아가신 얘기. 아마 그래서 현장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이 그것 때문에 눈물바다가 되는 겁니다.
[앵커]
그리고서 몇 해가 지나고서 동생, 어릴적 뛰놀던 동생을 직접 만나셨다면서요?
[인터뷰]
모든 이산가족이 다 마찬가지죠. 12만 9000명 중에 6만 5000명 살아계시는데 90세 이상된 분도 많고. 지금 제 동생 만난 사진 나오는데. 제가 그때 동생을 꼭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중국하고 우리나라가 국교가 트기 전에 중국의 교수를 알게 됐어요. 이분을 통해서 내 동생을 한번 초청해 달라고 했더니 1년 반만에 중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어떻게 전화 왔는데 중국의 교수의 한마디가 지금 동생분이 나와 있습니다. 뭐요, 했더니 전화바꾸겠습니다 해서 바꿨더니 제가 누구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물어봤어요. 그 다음에 더 이상 얘기를 못했습니다. 숨이 확 막혀요.
[앵커]
동생분하고 처음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인터뷰]
너 누구냐, 누구냐 하다가 저 누구입니다, 형님 누구 아닙니까? 그 순간에 전화를 그냥 놨어요. 그냥 놓고 그때 사무실에 있는 여직원이 수건을 갖다 주더라고요, 눈물 닦으라고. 아마 한 5분, 10분 전화 끊고 그다음에 다시 전화했습니다.
내가 간다, 너 만나러 간다. 그때는 중국에 우리가 마음대로 못 다니기 때문에 비자가 한 보름 만에 나왔습니다. 지금은 2시간이면 가지만 베이징에 가서 하루 자고 베이징에서, 옌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그래서 그날 밤에 47년 만에 남동생을 만났습니다.
아까 그 사진이 나오네요. 중국공항에서, 저 사진입니다. 편지왕래했기 때문에. 동생 사진 받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얘구나 했는데 만약에 서로 편지왕래를 안 했으면 길가에서 만나서 주먹 쥐고 싸워도 모를 겁니다. 저기서 가슴이 그냥 터지더라고요. 그게 많은 이산가족들이 다 그런 아픔을 갖고 있을 겁니다.
[앵커]
어릴적 함께 놀던 그 기억이 그래도 그 순간에 다 살아나시던가요?
[인터뷰]
그렇죠. 그때는 아주 어릴 때 동심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제일 보고 싶은 게, 저 동생은 만나서 그렇지만 여동생 참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앵커]
그 여동생은 성함이?
[인터뷰]
심계숙.
[앵커]
지금도 북에 잘 계시답니까?
[인터뷰]
편지 왕래합니다.
[앵커]
편지로 왕래하시는군요.
[인터뷰]
많은 이산가족들, 특히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서 만났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은 편지왕래됩니다.
저희가 우리 협회에서 이산가족들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 편지도 보내주고 또 북한의 가족들에게 물건도 보내주는데 가는 데 한 달 반, 중국 통해서 보내고. 또 북한에서 답장 오는데 한 달 반, 약 3개월 걸리는데 많은 이산가족들이 이걸 모르고 있어요.
저희가 협회에서 5도체육대회할 때 전단지도 뿌립니다마는 저희 협회가 아주 재정이 열악합니다.
그래서 3대 일간지, 이런 데에 광고를 크게 내면 좋은데 그럴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이북5도신문, 이런 데 광고를 내는데 이런 기회에 이번에 갖다온 분들, 이번에 만나고 오신 분들, 97명 아닙니까?
이런 분들이 북한의 주소를 가져와서 저희에게 연락을 하면 저희가 북한의 가족한테 물건도 보내줄 수 있고 또 편지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회장님, 선친께서는 북에 두고 온 부인 그리고 아들딸 다 못보시고 돌아가신 거군요?
[인터뷰]
그렇죠. 제가 제 남동생 만날 때 그때 저희 부친이 건강이 나빴어요.
[앵커]
그때는 생존해 계셨군요?
[인터뷰]
그때는 살아계셨죠. 그래서 저희 부친이 20분짜리 녹음테이프, 북한에 있는 동생, 북한에 작은 아들, 딸.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 가져갔어요. 그래서 호텔에서 동생과 얘기하면서 나중에 그 녹음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를 제 동생은 기억 못하지 않습니까? 모르죠. 그런데 그 사연사연을 쭉 얘기하니까 그냥 엎드려 울더라고요. 저도 같이 울고. 저희 부친이 제 동생한테, 여동생한테 한 얘기입니다.
저희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들이다. 북한과 남한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까? 너는 너희 나라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이런 얘기를 남겼어요.
그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그래서 제 동생은 훈장도 받고. 그런데 저희 부친이 한 말씀은 그 체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또 너희 나라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나름대로 살 수 있지 않느냐, 그런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앵커]
얼마나 그 아버님께서도 평생 그 아들딸 또 부인이 그리우셨을 것이며 그 동생들은 또 아버지가 얼마나 평생 그리웠을까.
[인터뷰]
이산가족들, 저뿐만 아니고 많은 이산가족들이 지금 90세 이상 된 분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이제 눈물이 말랐습니다. 눈물샘이 마르고 피눈물샘도 지금 다 말랐어요.
이제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것을 우리 정부가 지금 100명씩 만난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고 20년 전에 100명씩 만나는 이런 방법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세월이 10년이 지났는데. 다른 걸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100명씩, 이번에 90명 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지 말고 제발. 43시간 동안 회담했다고 하는데 다음 회담 때에는 80시간, 100시간 하더라도 이산가족들 서로 생사확인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이런 것을 제도화해달라는 얘기입니다. 100명씩, 이게 무슨 소용... 이산가족들 두 번 울리는 겁니다.
[앵커]
우리쪽에서는 대규모로 하고 싶어 하지만 북쪽에서 응하지 않으니까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죠.
[인터뷰]
아니죠. 우리 역대 정권 집권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은 잘 아시는데 지금 100명씩 만나는 것. 저희가 그쪽 실정 압니다. 저희가 북쪽 실정에 대해서 연락을 하고 있거든요.
이번에 100명씩 만나는 것도 아주 거기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이산가족들은 생사확인하는 데 우리가 민간단체에서 통일부한테 200만원씩 지원해 줍니다. 그리고 만날 때에는 상봉지원금으로 500만원을 줍니다.
그러면 100명씩 10명이면 2000만원. 100명이면 얼마입니까. 이것을 이산가족 찾는 데 어떤 전략적인 문제, 그런 데 쓰는 게 아니고 그런 데에 해서 지금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 얘기 못합니다마는 다른 방법으로 해서 이산가족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한을 풀어달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앵커]
조금 전 현장에서 속보가 전해졌습니다.
금강산에서 남북이산가족들 단체상봉이 예정대로 오후 3시, 평양시각으로. 평양시각이라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후 3시고요.
우리한테는 오후 3시 30분. 예정돼 있던 대로 조금 전에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우선 김세호 기자를 연결해서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김세호 기자!
단체상봉이 시작됐다고요?
[기자]
조금 전 예정대로 금강산에서는 남북 이산가족이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단체상봉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체 상봉은 2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60여 년 만에 처음 만난 남북 이산 가족들은 진한 혈육의 정과 함께 그동안 못 다한 얘기 꽃을 피우고 있을 걸로 보입니다.
단체 상봉을 마친 남북 가족들은 저녁 7시 반 우리 측이 주최하는 환영 만찬을 이어갑니다.
2박 3일 동안 남북 이산가족들은 모두 6차례,12시간에 걸쳐 가족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집니다.
앞서 우리 측 이산가족 상봉단은 오전 9시 반쯤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버스 33대에 나눠 타고 북으로 출발했습니다.
남측 가족들 가운데 2명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현재 77살 김순탁 할머니와 83살 염진례 할머니가 천식과 디스크 증세로 구급차를 타고 따로 CIQ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상봉에는 고령자가 많은 점을 고려해의료진 20명과 구급차 5대가 동행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내일은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단체상봉 행사가 진행됩니다.
지금까지 정치부에서 YTN 김세호입니다.
[앵커]
그러면 이번에는 2차 상봉단에 포함되어 있는 박복남 씨를 저희가 전화로 연결하겠습니다.
이분은 5살 때 부모, 형제와 다 헤어졌고 그리고 그동안 생사를 몰랐고 이번에 생사를 확인한 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전화연결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는 선생님 사연을 듣고 나서 5살 때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다 헤어지고 그동안 참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어떤 심정이셨을까가 제일 먼저 궁금하더라고요.
[인터뷰]
제가 5, 6살 때 아버지랑 엄마랑 오빠 둘하고 남동생 하나와 북으로 살러 갔어요, 원산이라는 데를. 살러 갔는데 우리는 가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어갈 때 먼저 가라 그래서 먼저 들어갔죠,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들 데리고. 들어가고 나니까 6.25가 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도 못하고 저하고 고모 한 분하고 네 사람이 남쪽에서 살게 됐어요, 지금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앵커]
그동안은 생사도 확인을 못하셨다면서요. 이번에 아셨다면서요?
[인터뷰]
못했죠. 그래서 왔는데 그렇게 못 보게 됐네요, 오형제는요.
[앵커]
이미 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셨다면서요. 그 소식을 듣고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인터뷰]
생사확인 해서 통보가 왔는데 다 사망했대요.
[앵커]
그 소식을 들으시고 어떤 심정이셨나요, 선생님?
[인터뷰]
너무 너무 슬프고 땅을 치고 울었어요. 그래도 만난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통보가 왔을 때는 너무너무 죽을 지경으로 너무 서러웠습니다.
[앵커]
65년 동안 가족들만 생각하시면서 그래도 그리워하시면서 참고 견디셨을 텐데요.
[인터뷰]
이산가족 신청해 놓고는 안 되니까 이제는 안 되는가 보다, 그저 통일만 빨리 돼라, 돼라 이렇게 기다리고. 그리고 기다려 왔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 서러워요.
[앵커]
이번에는 그러면 선생님, 가서 누구를 만나시는 겁니까, 어떤 가족들을요?
[인터뷰]
아마 생사확인할 때 살아 있는 사람이 박인철이 50살이고요. 박인수가 48세더라고요. 그런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저한테 조카가 될는지, 또 작은아버지의 자식들이라서 삼촌이 될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이로봐서는 저한테 조카뻘되는 것 같은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앵커]
만나시면 제일 먼저 부모님 소식을,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그것부터 물으시겠군요?
[인터뷰]
그렇죠. 만나고 살았느냐고 묻고 싶고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보고 싶고요.
[앵커]
지금 말씀을... 말씀을 잘 못하시는데 그 심정을 우리 국민들 모두, 우리 민족 모두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참 살아서 만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마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셨군요.
[인터뷰]
하게 됐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통보 받고 저는 이렇게 간다는 게 자꾸 눈물만 나와요. 얼른 통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앵커]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형제다라고 말씀하셨던 아까 그 심구섭 회장님의 아버지의 말씀, 이것이 다 우리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말씀들이고 우리 민족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건강하게 그래도 잘 다녀오시고요. 피붙이들이니까 그래도 만나서 반갑게 해후하시고 부모님 소식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늘 이산가족 소식 여기까지 전해 드리겠습니다.
심구섭 회장님, 오늘 나오셔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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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는 이산가족 상봉, 단체상봉이 이제 잠시 뒤면 시작됩니다.
저희가 오늘 이산가족 가운데 한 분을 초대했습니다. 북에 두고 온 동생을 반세기 만에 만났고 또 두고 온 어머님은 끝내 만나지를 못한 심구섭 남북이산가족협회장 저희가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저희가 오늘 심 회장님의 사연, 이야기는 심 회장님의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 한장에서부터 시작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모습인 것 같은데요. 제가 아까 사진을 봤습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1942년에 찍으신 거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누구누구신지 소개를 해 주십시오.
[인터뷰]
가운데에 앉은 분이 할머니고 뒤 두루마리 입으신 분이 아버지고 보면 저게 어머니고 나이 좀 더 위가 저입니다. 그 옆이 남동생입니다.
[앵커]
동생분 성함이?
[인터뷰]
심학섭.
[앵커]
몇 살 차이 동생입니까?
[인터뷰]
3살 차이입니다.
[앵커]
3살 차이이면 아주 친하게 뛰노신 사이겠군요.
[인터뷰]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그때는 아마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같습니다.
[앵커]
여동생하고는 몇 살 차이입니까?
[인터뷰]
10살 차이입니다.
[앵커]
그러니까 저게 1942년 사진이고요. 그 다음 사진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사진이 6년 뒤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아버님은 왜 안 계시나요?
[인터뷰]
저때는 저희 아버님이 해방된 다음에 38선 넘어서 저희 아버님이 먼저 남쪽에 넘어오시고. 저게 여동생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까 사진에 없었는데 제 여동생입니다.
왼쪽에 있는 게 저이고 가운데 앉은 게 제 남동생 그리고 저분이 어머니입니다.
[앵커]
3살 아래 남동생 심학섭 선생님이시군요. 선생님께서 지금 81살, 연세가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34년생입니다.
[앵커]
동생 학섭 선생님께서는?
[인터뷰]
3살 차이니까 37년생.
[앵커]
78세가 되셨겠군요. 저때 아버님이 안 계셨던 것은... 사진 다시 보여주시고요. 아버님이 조선일보 기자셨고 그래서 북쪽에서 반동분자로 찍혔었다면서요?
[인터뷰]
해방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는데 옛날 인텔리, 지주 이런 사람들은 탄압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프롤레탈리아 정권이 섰는데 전부 탄압이 심하고 또 몰수당하고 그래서 저희 부친이 해방된 다음에 먼저 나오셨습니다, 남쪽으로. 그리고 1년 후에 나오신 다음에 편지가 왔어요.
아마 어머니한테 저를 남쪽으로 보내라, 이런 편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해에 제가 어머니와 동생들과 같이 할머니 묘소에 갔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렸으니까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때 어머니가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에 엎드려 울면서 이 강토에 언제 이런 비극이 없겠습니까, 그러셨는데. 그런데 그때는 강토라는 얘기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
그런데 생생하게 그때 저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까 저희 어머니가 상당히 인텔리예요.
그래서 아마 저를 남쪽에 보내면서 마지막에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한테 데리고 간 묘소참배 같습니다.
[앵커]
조금 전 저희가 속보를 자막으로 전해졌는데 지금까지 전해진 소식은 그게 다입니다. 조희팔의 사촌동생으로 추정되는 40대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만 일부 들어와 있고요.
사촌동생인지 조카인지는 확인 중이라고 하고요. 40대고요.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어디서 발견됐는지 정확한 경위는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해지면 바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래서 아버님께서 먼저 월남을 하셨고 그리고 48년도에 저 사진 찍은 직후에 어머님하고 여동생하고 같이 월남을 하셨다가 그래서 어머님하고 여동생은 같이 남쪽에 모이셨는데 그러다가 어쩌다 또다시 헤어지게 되셨습니까?
[인터뷰]
그때 제가 어려서 잘 몰랐는데 어머니는 저를 아버님한테 맡겨놓고 제가 와서 3일 만에 중학교 모자를 썼어요. 그때 저희 아버님이 지방 신문사 편집국장하셨고 또 고등학교 교사직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3일 만에 제가 교복을 입고 모자 쓰고 가방 들고 문 앞에 나서는데 그때 어머니와 여동생이 멀리서 보더라고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왜 여동생하고 들어갔냐 하면 북한에 남동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때는 38선이 언제고 없어지고 남북한이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고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3년 뒤에 전쟁이 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영 이별한 것이죠.
[앵커]
그러니까 어머님과 이별한 뒤 3년 뒤에 전쟁이 난 거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하고 4년 되겠네요. 중학교 입학할 때가 1학년이고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전쟁이 났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곧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를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군요.
[인터뷰]
그때는 남북간에 편지왕래가 있었어요. 그때는 지금 판문점이 아니고 개성에서 미 군정과 소련 군정이 들어설 때, 우리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편지 왕래하고 했는데 그다음에 남북한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도 편지 왕래는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졸업한 해가 전쟁나던 해인데 그때 5월 16일에, 제가 잊지도 않습니다, 졸업할 때 제가 공부를 좀 잘했어요. 상 받은 것을 북한에 보냈더니 6월 25일. 한 달 후에 전쟁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에 동생을 만나봤더니 어머니가 그 사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그러니까 전쟁난다는 것은 생각을 못했죠.
[앵커]
그래서 헤어지신 어머님을 평생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 심정이 잘 상상이 되지 않거든요.
[인터뷰]
그것은 저뿐만 아니고 모든 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오늘도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이 있지만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 90세 넘은 분들은 북한에 처자식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북한의 가족 소식도 모르고 아버지가 아들 소식도 모르고 어머니가 딸 소식도 모르고 이런 세월이 한 해, 두 해가 아니고 7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게 우리 민족의 비극인데요. 이 비극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앵커]
어떨 때 제일 어머님이 그리우셨습니까, 살아오시면서요?
[인터뷰]
제일 그리울 때가 명절 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추석 때 고향에 가지 않습니까. 또 설 때는 고속도로 미어지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사람들은 TV 화면에 고속도로 장면 나오는 것을 보면 화면 돌립니다.
남들은 다 고향가는데 저희 이산가족들은 갈 데가 없고 먼 북녘 하늘만 바라보고 눈물 흘리지 않습니까? 그게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이산가족들이 다 갖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앵커]
그 위에 어머님의 영상이 오버랩이 되시는군요.
[인터뷰]
그렇죠. 결혼할 때, 제가 결혼식 마칠 때 많이 울었습니다. 결혼식 할 때, 그때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니까 식장에 나오면서 신랑이라는 사람이 눈물범벅이 되니까 제 친구들은 다 이해해요.
그런데 아버지나, 여기에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갈등이 가정적으로 많이 생겼죠.
[앵커]
결국 어머님은 못 만나신 것이죠, 그 이후로?
[인터뷰]
그렇습니다. 전쟁난 이후에 제가 학생 때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지 않습니까? 그때 학도병 모집이 있었어요. 대구에서도 그렇고 부산에서 그렇고. 그때 어린 나이에 학도병에 지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 국군에 참전해서 전쟁에 나가서 이 나라를 지킨다는 그런 마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고향에 가서, 그건 낙동강전투 말고 국군이 우리가 북진한 다음에 제가 피란 갔다가 제가 강릉에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많이 전사했더라고요, 학도병으로. 그래서 나도 전쟁 나가야겠다, 그래서 학도병에 들어갔는데 그때의 마음은 나라 위하는 마음도 있고 또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싶은, 만나야 되겠다, 동생들을 만나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아마 반반됐을 겁니다.
[앵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학도병에 지원을 하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러다가 1990년에 북에 어릴 때 같이 뛰어놀던 동생분한테 편지를 받게 되셨는데.
[인터뷰]
그게 참 우연한 기회인데 제 선배 분이 미국 시민권 가지고 계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북한에서 온 편지를 가지고 한국에 왔더라고요. 그런데 그 편지에 예전 조선일보 기자였던 누구누구 아들을 찾는다, 딱 두 줄이에요.
처음에는 사기꾼이 아닌가 했는데 봉투를 보니까 북한 우표가 맞아요. 그래서 이분이 편지를 하나 써라, 가족사진과. 그래서 전 전쟁 때는 동생이 죽고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한 3개월 후에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생이 살아서 편지가 왔더라고요.
[앵커]
그 편지 좀 보여주시죠.
[인터뷰]
저게 북한에서 처음 받은 편지입니다. 지금 잘 안 보입니다마는 저 편지에 보시면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3일 만에 다시 정신 차린 다음에 마지막으로 구섭이가 보고 싶구나하면서 더 쓴 게 있어요.
[앵커]
1967년 6월 21일날 뇌출혈로 지금의 집에서 별세하셨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의식을 회복하고 구섭이가 보고 싶구나, 이 한마디 말씀을 남기시고 더 이상 말씀을 남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군요.
[인터뷰]
저 편지 보면 눈물 자국이 있습니다. 얼룩이 졌어요.
아마 제 동생이 저걸 쓰면서 아마 눈물을 흘린 것 같아요. 제가 저 편지를 받고 몇날몇일을 울었습니다. 참 그것은 아마 오늘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 나이 많으신 분들이 가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아마 이런 비극이 그 현장에서 많이 벌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1세들이 못 나오고 2세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머니 돌아가신 얘기, 또 아버지 돌아가신 얘기. 아마 그래서 현장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이 그것 때문에 눈물바다가 되는 겁니다.
[앵커]
그리고서 몇 해가 지나고서 동생, 어릴적 뛰놀던 동생을 직접 만나셨다면서요?
[인터뷰]
모든 이산가족이 다 마찬가지죠. 12만 9000명 중에 6만 5000명 살아계시는데 90세 이상된 분도 많고. 지금 제 동생 만난 사진 나오는데. 제가 그때 동생을 꼭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중국하고 우리나라가 국교가 트기 전에 중국의 교수를 알게 됐어요. 이분을 통해서 내 동생을 한번 초청해 달라고 했더니 1년 반만에 중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어떻게 전화 왔는데 중국의 교수의 한마디가 지금 동생분이 나와 있습니다. 뭐요, 했더니 전화바꾸겠습니다 해서 바꿨더니 제가 누구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물어봤어요. 그 다음에 더 이상 얘기를 못했습니다. 숨이 확 막혀요.
[앵커]
동생분하고 처음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인터뷰]
너 누구냐, 누구냐 하다가 저 누구입니다, 형님 누구 아닙니까? 그 순간에 전화를 그냥 놨어요. 그냥 놓고 그때 사무실에 있는 여직원이 수건을 갖다 주더라고요, 눈물 닦으라고. 아마 한 5분, 10분 전화 끊고 그다음에 다시 전화했습니다.
내가 간다, 너 만나러 간다. 그때는 중국에 우리가 마음대로 못 다니기 때문에 비자가 한 보름 만에 나왔습니다. 지금은 2시간이면 가지만 베이징에 가서 하루 자고 베이징에서, 옌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그래서 그날 밤에 47년 만에 남동생을 만났습니다.
아까 그 사진이 나오네요. 중국공항에서, 저 사진입니다. 편지왕래했기 때문에. 동생 사진 받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얘구나 했는데 만약에 서로 편지왕래를 안 했으면 길가에서 만나서 주먹 쥐고 싸워도 모를 겁니다. 저기서 가슴이 그냥 터지더라고요. 그게 많은 이산가족들이 다 그런 아픔을 갖고 있을 겁니다.
[앵커]
어릴적 함께 놀던 그 기억이 그래도 그 순간에 다 살아나시던가요?
[인터뷰]
그렇죠. 그때는 아주 어릴 때 동심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제일 보고 싶은 게, 저 동생은 만나서 그렇지만 여동생 참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앵커]
그 여동생은 성함이?
[인터뷰]
심계숙.
[앵커]
지금도 북에 잘 계시답니까?
[인터뷰]
편지 왕래합니다.
[앵커]
편지로 왕래하시는군요.
[인터뷰]
많은 이산가족들, 특히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서 만났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은 편지왕래됩니다.
저희가 우리 협회에서 이산가족들 금강산에서 만난 분들, 편지도 보내주고 또 북한의 가족들에게 물건도 보내주는데 가는 데 한 달 반, 중국 통해서 보내고. 또 북한에서 답장 오는데 한 달 반, 약 3개월 걸리는데 많은 이산가족들이 이걸 모르고 있어요.
저희가 협회에서 5도체육대회할 때 전단지도 뿌립니다마는 저희 협회가 아주 재정이 열악합니다.
그래서 3대 일간지, 이런 데에 광고를 크게 내면 좋은데 그럴 형편이 안 되기 때문에 이북5도신문, 이런 데 광고를 내는데 이런 기회에 이번에 갖다온 분들, 이번에 만나고 오신 분들, 97명 아닙니까?
이런 분들이 북한의 주소를 가져와서 저희에게 연락을 하면 저희가 북한의 가족한테 물건도 보내줄 수 있고 또 편지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회장님, 선친께서는 북에 두고 온 부인 그리고 아들딸 다 못보시고 돌아가신 거군요?
[인터뷰]
그렇죠. 제가 제 남동생 만날 때 그때 저희 부친이 건강이 나빴어요.
[앵커]
그때는 생존해 계셨군요?
[인터뷰]
그때는 살아계셨죠. 그래서 저희 부친이 20분짜리 녹음테이프, 북한에 있는 동생, 북한에 작은 아들, 딸.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 가져갔어요. 그래서 호텔에서 동생과 얘기하면서 나중에 그 녹음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를 제 동생은 기억 못하지 않습니까? 모르죠. 그런데 그 사연사연을 쭉 얘기하니까 그냥 엎드려 울더라고요. 저도 같이 울고. 저희 부친이 제 동생한테, 여동생한테 한 얘기입니다.
저희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들이다. 북한과 남한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까? 너는 너희 나라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이런 얘기를 남겼어요.
그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그래서 제 동생은 훈장도 받고. 그런데 저희 부친이 한 말씀은 그 체제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또 너희 나라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나름대로 살 수 있지 않느냐, 그런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앵커]
얼마나 그 아버님께서도 평생 그 아들딸 또 부인이 그리우셨을 것이며 그 동생들은 또 아버지가 얼마나 평생 그리웠을까.
[인터뷰]
이산가족들, 저뿐만 아니고 많은 이산가족들이 지금 90세 이상 된 분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이분들이 이제 눈물이 말랐습니다. 눈물샘이 마르고 피눈물샘도 지금 다 말랐어요.
이제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것을 우리 정부가 지금 100명씩 만난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고 20년 전에 100명씩 만나는 이런 방법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세월이 10년이 지났는데. 다른 걸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100명씩, 이번에 90명 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지 말고 제발. 43시간 동안 회담했다고 하는데 다음 회담 때에는 80시간, 100시간 하더라도 이산가족들 서로 생사확인하고 편지를 주고받고 이런 것을 제도화해달라는 얘기입니다. 100명씩, 이게 무슨 소용... 이산가족들 두 번 울리는 겁니다.
[앵커]
우리쪽에서는 대규모로 하고 싶어 하지만 북쪽에서 응하지 않으니까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죠.
[인터뷰]
아니죠. 우리 역대 정권 집권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은 잘 아시는데 지금 100명씩 만나는 것. 저희가 그쪽 실정 압니다. 저희가 북쪽 실정에 대해서 연락을 하고 있거든요.
이번에 100명씩 만나는 것도 아주 거기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바라는 것은 이산가족들은 생사확인하는 데 우리가 민간단체에서 통일부한테 200만원씩 지원해 줍니다. 그리고 만날 때에는 상봉지원금으로 500만원을 줍니다.
그러면 100명씩 10명이면 2000만원. 100명이면 얼마입니까. 이것을 이산가족 찾는 데 어떤 전략적인 문제, 그런 데 쓰는 게 아니고 그런 데에 해서 지금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 얘기 못합니다마는 다른 방법으로 해서 이산가족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한을 풀어달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앵커]
조금 전 현장에서 속보가 전해졌습니다.
금강산에서 남북이산가족들 단체상봉이 예정대로 오후 3시, 평양시각으로. 평양시각이라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후 3시고요.
우리한테는 오후 3시 30분. 예정돼 있던 대로 조금 전에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우선 김세호 기자를 연결해서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김세호 기자!
단체상봉이 시작됐다고요?
[기자]
조금 전 예정대로 금강산에서는 남북 이산가족이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단체상봉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체 상봉은 2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60여 년 만에 처음 만난 남북 이산 가족들은 진한 혈육의 정과 함께 그동안 못 다한 얘기 꽃을 피우고 있을 걸로 보입니다.
단체 상봉을 마친 남북 가족들은 저녁 7시 반 우리 측이 주최하는 환영 만찬을 이어갑니다.
2박 3일 동안 남북 이산가족들은 모두 6차례,12시간에 걸쳐 가족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집니다.
앞서 우리 측 이산가족 상봉단은 오전 9시 반쯤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버스 33대에 나눠 타고 북으로 출발했습니다.
남측 가족들 가운데 2명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현재 77살 김순탁 할머니와 83살 염진례 할머니가 천식과 디스크 증세로 구급차를 타고 따로 CIQ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상봉에는 고령자가 많은 점을 고려해의료진 20명과 구급차 5대가 동행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내일은 개별상봉과 공동중식, 단체상봉 행사가 진행됩니다.
지금까지 정치부에서 YTN 김세호입니다.
[앵커]
그러면 이번에는 2차 상봉단에 포함되어 있는 박복남 씨를 저희가 전화로 연결하겠습니다.
이분은 5살 때 부모, 형제와 다 헤어졌고 그리고 그동안 생사를 몰랐고 이번에 생사를 확인한 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전화연결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는 선생님 사연을 듣고 나서 5살 때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다 헤어지고 그동안 참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어떤 심정이셨을까가 제일 먼저 궁금하더라고요.
[인터뷰]
제가 5, 6살 때 아버지랑 엄마랑 오빠 둘하고 남동생 하나와 북으로 살러 갔어요, 원산이라는 데를. 살러 갔는데 우리는 가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어갈 때 먼저 가라 그래서 먼저 들어갔죠,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들 데리고. 들어가고 나니까 6.25가 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지도 못하고 저하고 고모 한 분하고 네 사람이 남쪽에서 살게 됐어요, 지금까지.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앵커]
그동안은 생사도 확인을 못하셨다면서요. 이번에 아셨다면서요?
[인터뷰]
못했죠. 그래서 왔는데 그렇게 못 보게 됐네요, 오형제는요.
[앵커]
이미 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셨다면서요. 그 소식을 듣고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인터뷰]
생사확인 해서 통보가 왔는데 다 사망했대요.
[앵커]
그 소식을 들으시고 어떤 심정이셨나요, 선생님?
[인터뷰]
너무 너무 슬프고 땅을 치고 울었어요. 그래도 만난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통보가 왔을 때는 너무너무 죽을 지경으로 너무 서러웠습니다.
[앵커]
65년 동안 가족들만 생각하시면서 그래도 그리워하시면서 참고 견디셨을 텐데요.
[인터뷰]
이산가족 신청해 놓고는 안 되니까 이제는 안 되는가 보다, 그저 통일만 빨리 돼라, 돼라 이렇게 기다리고. 그리고 기다려 왔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 서러워요.
[앵커]
이번에는 그러면 선생님, 가서 누구를 만나시는 겁니까, 어떤 가족들을요?
[인터뷰]
아마 생사확인할 때 살아 있는 사람이 박인철이 50살이고요. 박인수가 48세더라고요. 그런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저한테 조카가 될는지, 또 작은아버지의 자식들이라서 삼촌이 될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이로봐서는 저한테 조카뻘되는 것 같은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앵커]
만나시면 제일 먼저 부모님 소식을,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그것부터 물으시겠군요?
[인터뷰]
그렇죠. 만나고 살았느냐고 묻고 싶고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보고 싶고요.
[앵커]
지금 말씀을... 말씀을 잘 못하시는데 그 심정을 우리 국민들 모두, 우리 민족 모두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참 살아서 만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마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셨군요.
[인터뷰]
하게 됐을 때는 너무 좋았는데 통보 받고 저는 이렇게 간다는 게 자꾸 눈물만 나와요. 얼른 통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앵커]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형제다라고 말씀하셨던 아까 그 심구섭 회장님의 아버지의 말씀, 이것이 다 우리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말씀들이고 우리 민족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건강하게 그래도 잘 다녀오시고요. 피붙이들이니까 그래도 만나서 반갑게 해후하시고 부모님 소식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늘 이산가족 소식 여기까지 전해 드리겠습니다.
심구섭 회장님, 오늘 나오셔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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