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명콤비' 60년 인연 각별

'정치권 명콤비' 60년 인연 각별

2015.08.05. 오후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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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렬, 용인대 교수 /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앵커]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의 별세 소식, 어제 전해드렸는데요. 박상천 대표의 영원한 맞수로 불렸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우리는 맞수가 아니라 내가 그분의 하수였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정치권 라이벌을 넘어 명콤비로 불렸던 두 분의 이야기, 지금부터 최창렬 용인대 교수, 김주환 YTN 정치안보전문기자와 함께 짚어 봅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두 분 영원한 맞수였다며 정치권에서 불렸었는데 박희태 전 의장이 매우 슬퍼하셨다면서요?

[기자]
어제 TV로 보니까 정치인 생활을 정확히 두 분이 55년을 같이 했어요. 그러니까 학창 시절까지 하면 60여 년 이상, 20대 때부터. 두 분이 어느 정도냐하면 원내총무 시절에 제가 현장에서 두 분을 수년 간 취재를 했었는데 그때 두 분이 어느 정도냐하면 이름과 사진만 바꿔놓고 이력서만 바꿔치기 해도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살아온 궤적이 똑같은 분이십니다. 정계 은퇴도 같은 날 같은 시기에 했죠.

[앵커]
그러니까 원내총무라고 하시는데 과거에는 원내총무라고 불렸는데 부인을 빼놓고는 다 같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두 분이 정말 닮았습니다. 지금 동갑내기시고요. 1938년생이셨고. 서울대 법대도 동기이고. 고등고시도 같은 해에 합격을 했습니다. 또 정치입문도 같이 하셨고 불출마 선언을 했을 때도 같은 날 하신거죠?

[인터뷰]
2012년도에 정계 은퇴 선언을 했거든요. 그래서 부인만 제외하고 다 같다라고 말을 했는데 몸무게도 같다라는 말이 있어요. 두 분이 화면에 나왔다시피 생년도 똑같고. 단지 결정적으로 다른 게 13대 때 입문을 했습니다. 정치권에요. 그때 초선 의원으로 입문한 거죠. 두 분 다 검사 출신이고. 그런데 박상천 전 대표는 평민당으로 입당을 해서 정치에 입문한 것이고 박희태 전 대표는 민주정의당이니까 정치적 지향이나 이념은 전혀 다른 거죠.

우리가 박희태, 박상천 두 분을 비교할 때 같은 게 워낙 많았고. 또 원내대표 그 당시 원내총무라고 그랬어요. 그때 대표가 지명하는 자리였으니까.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같이 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 촌철살인의 명대변인의 명언이 있었고. 최근에 우리 정치가 막말 파동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후배 정치인들이 많이 배워야 할 분들인데 아무튼 민정당과 평민당으로 입당해서 정치에 입문했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점이었다, 13대 총선이고 그때 입문했던 그런 분들입니다.

[기자]
지금 최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걸 첨언을 하자면 두 분이 논평 중에 우리가 흔히들 쓰는 정치 9단이라는 말은 당시 박희태 대변인이 만들어낸 정치9단.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가 남이 하면 불륜이냐라는 말도 당시 박희태 대변인이 만들어낸 표현이고요. 그래서 두 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것은 영원한 맞수라고 하는데 이 맞수에 대해서 박상천 대변인이 박희태 당시 친구이자 상대당의 정치인인데 평가를 이렇게 했어요. 우리는 경쟁적 맞수가 아니다. 보완적 맞수다라고 하면서 박상천 의원의 경우에는 박희태 대변인은 말이 어눌하지만 굉장히 대중을 파고드는 굉장히 진솔한 감이 있다...

그리고 고인이 된 박상천 전 의원은 굉장히 속사포에요. 굉장히 빠르고 또 제가 출입기자 시절 때 그때 방송에서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별명을 핏대라고 그랬습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불렀어요. 왜냐하면 기자들이 질문을 잘못해도 그 자리에서 논리적으로 지적을 하고 이런 분이셨거든요. 그랬는데 박희태 대변인이 박상천의 평가는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논평 싸움에서 졌지만 상대 친구인 박상천이 빛나서 더 기쁘다. 이래서 평생 굉장히 실제 국회 현장에서 어떤 정치적 지향점은 말씀하신 대로 다르지만 굉장히 평생 같이 가는 친구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앵커]
말에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품격이 느껴지고요. 그다음에 정곡을 찌르고요. 뭔가 겉으로는 싸우는 것 같지만 뒤로는 정이 통하는 그런 정치권의 분위기가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인터뷰]
그러니까 흔히 하는 얘기가 JP, 김종필 전 총재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JP를 마지막 남은 낭만의 정치인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지금 하는 말씀들이 그 맥락인 것 같아요. 지금 말이 굉장히 거칠고 이것은 단지 직설적인 거랑은 다른 거거든요. 상대방의 폐부를 찌르는 거랑 상대방을 매도하는 비난하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는 겁니다. 박상천과 박희태 두 분을 자꾸 떠올리는 이유가 민정당과 그 당시 평민당은 그 이후에 신한국당, 민주당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상당히 극단적인 대립이었거든요.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당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변인이 상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촌철살인을 동원했던 게 박희태 대변인이고 박상천 대변인은 조금 겨룬다는. 촌철살인은 아니지만 뭔가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이런 것들이 어쨌든 품격이 있었다라는 거죠. 품격을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앵커]
당시 97년에 두 분이 지금 스타일은 달랐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 자료들이 있는데 저희들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앵커]
내용보다는 말하는 스타일을 보려고 본 건데요. 박희태 전 의장의 경우에는 약간 느리고 어눌한 느낌을 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고. 속사포 말씀을 하셨는데 박상천 전 대표 같은 경우에는 직설적이군요, 굉장히.

[기자]
답문이었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법안을 할 때 논문을 쓴다라고까지 현장에서 표현을 했어요. 지금 말씀하시는 저 워딩 그 자체를 글자를 활자화 해도 어법이 하나도 안 틀릴 정도로 굉장히 정확한 표현을 많이 했거든요. 이분이 또 나중에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실제 국회의원관에 가면 법안 수백 개를 아주 도서관처럼 정리를 해 놓은 게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앵커]
오늘 굉장히 논란이 됐던 권역별 비례대표 제도를 박상천 전 대표가 생각해 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정도 법안에 대해서는 정통했다고 볼 수 있네요.

[인터뷰]
박상천 전 대표의 화법에 대해서는 논리적이고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나열하는 그런 화법을 구사를 했거든요. 제 생각은 이러이러합니다해서. 그래서 DJ 앞에서도 할말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에 유일하게 담배를 폈던 정치인이다.

[앵커]
같이 맞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거죠? 첫째, 둘째, 셋째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화법이지 않았습니까? 거의 비슷한데. 말도 빠르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DJ도 그런 점을 인정했다. 이렇게 정치권에서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2007년도인가 그때 박상천 대표가. 그때 2007년도에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지 않습니까? 그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을 해서 DJ와 박상천 대표가 논쟁하는 것도 나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만큼 할 말은 했던 정치인이다. 자기의 주군인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서도.

[앵커]
정치입문 과정을 돌이켜 보면 88년에 정치에 입문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6공화국 시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에 야당을 택한다는 자체가 엄혹한 시기었는데 참 쉽지 않은 결정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어땠나요?

[기자]
그때 아마 서경원 전 의원 방북 사건 때 변호인을 했었죠.

[인터뷰]
1988년도는 일단 13대 총선 때니까 1987년도 12월에 13대 대선이었어요. 민주화되고 난 뒤에 첫 대선이죠. 87년도에 헌법 상 민주화가 이뤄져서 그때 군사권위주의정권은 아니죠. 민주화되고 난 뒤기는 한데. 아무튼 평민당으로 첫 국회의원을 한다라는 게 화려하게 검사생활을 하던 분이기 때문에 사실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지역적으로 그 당시 정권이 영남정권이니까 호남검사가 인사에서 상당한 애로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점들에 있어서 상당히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지금 박상천 전 대표, 박희태 전 의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두 분이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야로 나눠서 다른 정치 진영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런데 두 분 사이에 서로 친하니까 학교 다닐 때부터 알던 친구이니까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나는 이것을 선택하겠다할 때 서로 사전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
과거에 했었다라고 합니다. 본인이 왜냐하면, 두 분이 검사 시절을 했는데 한 분은 검사장을 했고. 그 당시 고인이 된 박상천 전 대표는 검사장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같은 검찰 건물 내에서 박희태 전 의장이 검사장을 할 때 그 밑의 차장검사로 지낸 적이 있었다라고 제가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본인들이 고민을 해서 정계로 가고 그랬는데 그런 어떤 지역적인 면도 사실은 없지 않아 감안이 됐었죠.

인상깊었던 것은 2001년 11월 17일이더라고요. 제가 63빌딩에서 당시 민주당, 당내 후보경선에 참여선언을 했어요. 후원회가 있었는데 그때 정치 상황이 안 좋아서 여야 그러면 잘 안 가는데 초청하지 않았는데 박희태 전 의장이 찾아왔어요. 와서 굉장히 큰 덕담을 합니다. 내 친구인 박상천 의원은 모든 것을 다 갖췄다. 그런데 하나만 못 갖췄다. 용이 승천하려면 여의주가 필요한데 여의주를 달라. 그래서 그 당시 정치적으로 굉장히 화제가 됐던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정말 친한 친구로서 그런 덕담은 굉장히 서로가 잘했죠.

[앵커]
여러 가지 일화를 말씀을 해 주고 계시는데 대변인 시절에도 그렇고 2000년에도 두 분이 부딪혔던 사례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그래픽으로 준비를 했는데 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국회에 안 들어오면서 왜 장외 투쟁만 하느냐 이런 말을 박상천 대표가 하고. 국회에서 날치기만 하니까 할 게 없다. 이게 박희태 전 의장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진 말인가요?

[기자]
그때 아마 2001년도 저 무렵이 한나라당 장외투쟁하고 그럴 때 저때는 DJP 연합이라고 해서.

[인터뷰]
저때가 김대중 정부 때였죠.

[기자]
그때 어떤 정치적인 상황이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이후에도 저런 사례가 많았습니다.

[앵커]
아무래도 여야 대변인을 했고 원내총무를 하다보면 서로 협상을 하다가도 부딪히는 일도 많고. 그렇지만 뒤로는 친구니까 여러 가지 할말 못 할말 다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는데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회창 후보의 토론회를 극적으로 성사시킨 것도 두 사람의 힘이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 당시에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였는데요. 97년도였죠. 이회창 후보가 상당히 앞서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당으로서는 굳이 TV토론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간 후보가 굳이 원할 일은 없죠. 김대중 후보로서는 어떻게든 이 TV토론을 성사시켰어야 됐는데. 박상천 의원이 박희태 의원을 설득을 해서 원내총무였으니까 어쨌든 TV토론을 성사시켰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기자]
당시 원내총무의 권한이 굉장히 정치가 협상과 어떤 권한을 줘야 되는데 굉장히 권한이 좀 많았습니다. 실제 두 분이, 그러니까 당시 이회창 총재가 신한국당쪽에 있었고 이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쪽에 있었지만 이 두 분이 워낙 논리적이고 당 내 의원들 설득하는 능력이 당시에 굉장히 좋았습니다. 지금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 두 분이 왜 명대변이냐고 그 얘기를 하면 지금 최 교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지만 지금의 논평이 막말로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보면 정치는 말로 하는데 조어능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외람된 말이지만 지금 정치 상황은 언론에 난 것을 다시 회자하는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 저 두 분 때의 시절은 본인들이 조어를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기자들이 도저히 안 쓰면 안 되게끔 하는 그런 논평을 만들어서 지금은 일단 이야기를 하면 컴퓨터로 받아썼지만 그때는 딱 한 장짜리를 정해서 정해서 기자실에 올리고 그런 형태였거든요. 그런 곳에 대한 조어 능력이 두 분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 수준이 높았습니다.

[인터뷰]
어제인가요. 두 분이 영원한 맞수라고 하는데 하수였다, 자신이. 이런 말이 굉장히 품격이 있게 들리잖아요. 자세를 낮추면서 비굴하지 않고. 그래서 이런 것이 일상화돼야 되는데 요즘 정치는 정치현안 가지고 막 들어가니까 그래서 정치에는 어느 정도 여유와 여백이 필요합니다. 박상천 전 대표의 별세를 계기로 해서 우리 정치가 이런 것도 배워야 될 것 같아요. 서로 입장이 다르다하더라도 역지사지하는 그런 모습이라든지. 저는 말에 있어서 품격을 담아서 상대를 비판하더라도 논리적으로 하되 비유적으로 좀 하면서 한 격 높이는, 품격을. 이러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박희태 전 의장이 나는 짝 잃은 거위라는 이런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가족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네요.

[인터뷰]
상대의 존재가 있으면서 자기의 존재가 부각되는 이러한 관계들이었거든요. 아주 유난한 관계였던 것 같아요. 들어왔던 분입니다. 13대 의원들이니까요. 그때 아주 옛날이고, 13대 때 옛날 생각이 나는데 그때는 대변인하기 전이었습니다마는 대변인할 때도 그렇고 원내총무할 때도 그렇고 그때는 꼭 이분들이 아니더라도 품격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다 못 해 서청원 원내총무였는데 15대 때. 그때도 이렇게까지 안 했던 것 같아요. 정치는요.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네요.

[앵커]
마지막으로 말이죠. 왜 이런 낭만이 사라졌는지 요즘에는 오히려 정치권에서 막말을 함으로써 주목을 받으려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여야 정치인들 이 점만큼은 꼭 고쳐야되고 배워야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터뷰]
지금은 노이즈마케팅이라고 해서 인지도가 높아지면 같이 정치적인 주가가 올라가는 이런 프레임이 형성이 돼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부분들을 언론도 그렇고 국민들도 그렇고 심판을 해야 된다. 이 노이즈마케팅을 허용하지 않는. 이런 풍토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 김주환 YTN정치안보전문기자였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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