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 "산후우울증 3년 넘게 겪어…모성애로 상처 치유"[인터뷰]

추상미 감독 "산후우울증 3년 넘게 겪어…모성애로 상처 치유"[인터뷰]

2018.10.21. 오후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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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추상미가 영화 감독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된 후, 그는 더욱 단단해졌다. 엄마라서 아팠고, 엄마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래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라는 따뜻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실화를 접한 추상미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극 영화 '그루터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추상미는 영화에 출연하는 탈북 배우 이송 씨와 함께 폴란드를 찾게 되고, 그 여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그 영화가 바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추상미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 추상미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처'부터 꺼냈다. 산후우울증으로 아이에게 집착했던 그가 북한의 꽃제비 사연을 접하고 눈물을 펑펑 흘린 후, 세상을 향한 관심이 고조된 이야기를 전했다.



"연기는 '시티홀'을 마지막으로 쉬었고요. 회의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무대를 존경해서 연기를 시작했던 것인데, 드라마로 옮겨가면서 많이 다르더라고요. 소모적인 어떤 상품 되어가는구나 생각도 들고, 재미가 없어졌어요. 연출은 오래된, 낡은 꿈이었고요.



그리고 결혼을 했는데, 4년이 됐는데도 아이가 안 생기니깐 몸도 만들고 그러면서 임신을 했는데 유산이 됐어요. 그 충격이 되게 크더라고요. 그때는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단편 2작품을 만들고 덜컥 임신이 됐어요. 그때부터 산후우울증이 시작된 것이었죠. 관리를 잘 해주면 되는데 안 해주니깐 그냥 우울증이 돼서 3~4년 동안이나, 오래 했던 것 같아요. 밖에도 잘 안나고 오래 잠적한 시간이 있었어요.



그래서 장편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준비하려던 차에, KBS스페셜에서 나왔던 꽃제비 이야기를 보게 된 것이죠. 본방이 아닌 재방을 본 것인데, 댓글을 보니깐 그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눈물이 많이 났어요. 저는 산후우울증이 아이가 죽는 악몽 등, 불안증으로 나타났죠. 아이가 슬프게 울면, 내 아이인 것 같고… 그게 하나 좋은 점은 세상을 향해서 시선을 돌릴 때, 다른 아이한테도 내 아이같은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거죠. 꽃제비를 몰랐는데, 이건 분단의 비극이고, 분단이 아니면 겪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꽃제비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던 추상미는 때마침 폴란드로 간 전쟁 고아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욜란타 크리소바타 소설 '천사의날개'의 존재를 알게 된 것. 역사 실화는 추상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렇게 2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폴란드 전 대통령님이 방한을 해서 자기 나라에 이런 소설 나와있는데, 한국에도 출판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해요.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교수님이 번역해보겠다고 해서, 시기상 자료로만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제가 보게 된 거예요. '천사의 날개' 책도 있고, '김귀덕' 다큐도 봤죠 그래서 '그루터기'를 쓰게 됐는데, 조사를 하다가 유제프 원장님이 지병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실화인데 저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돌아가시기 전에 육성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무감이 들더라고요. 운이 좋게도 다 지원을 받아서 급하게 폴란드에 가게 됐죠."




추상미가 가장 궁금해했던 점은 '폴란드 선생님과 북한 아이들 간의 유대 관계'였다. 당시 아이들은 선생님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리고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직까지도 북한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눈물을 흘린다. 추상미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폴란드에서 찾은 해답은 '상처의 연대'였다. 선생님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였던 것.



"선생님들이 자신들도 전쟁의 상처를 겪은 분이라고 한 것을 알게 됐고, 제가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포커싱이 맞춰진 것 같아요. 직접 가보니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선생님들이 어린시절에 겪은 2차 대전의 상처는 정말 심각했어요. 시체더미를 밟고 지나다니고, 누가 죽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죠. 유제프 원장님이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을 보면, 내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한 가장 의미있는 일을 꼽으면 북한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누군가가 선행을 했다면, 내 인생의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통해서 자기의 유년시절을 회복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틀한테 혈육의 정을, 분신처럼 느낀 것이죠. 그래서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그 부분들이 굉장히 의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을 많이 조명하고 싶었어요. 개인의 상처이자 역사의 상처가 다른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선하게 쓰였는데, 우리는 한국전이나 분단의 상처가 어떻게 쓰여졌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상미와 동행한 이송 씨는 탈북 과정에서 겪은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에 닫은 문을 열기 시작했다. 추상미도 폴란드 여정을 통해 치유됐다. 산후우울증을 극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넓어진 것. 추상미는 앞으로도 자신의 강점 '모성애'가 통하는 마음 따뜻한 작품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은 우리 아이한테만 집중했는데, 세상의 아이들, 역사 속의 아이들한테 시선이 향하게 된 것 같아요. 인생의 되게 큰 멘토를 만난 느낌이고, 예술가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모성으로 출발을 했잖아요. 전 늘 상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제가 유년시절 상처가 많았거든요. 감독이 되다보니 개인적인 상처가 사회의 상처로 확장이 되더라고요. 첫번째, 두번째 단편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3번째에서는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모성애의 시선이 밖으로 향했을 때 세상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효정 기자 shj2012@tvreport.co.kr/ 사진=커넥트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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