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에 담긴 정조의 지극한 효심

'융릉'에 담긴 정조의 지극한 효심

2016.02.29. 오전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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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왕으로 추정된 사람의 무덤은 왕릉

임금의 친족으로 왕이 된 사람의 부모 후궁이면서 왕세자의 생모이거나 재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와 빈의 무덤은 원

그 외에 무덤은 죽은 자의 이름과 함께 묘라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 세 가지의 이름을 모두 가졌던 무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영조 재임 38년 신하들의 당파 싸움은 극에 달했고, 마침내 영조는 조정을 안정시 키기 위해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 시킨 후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됩니다.

영조는 아들의 무덤을 수은묘라 하고 양주 배봉산 아래에 급하게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11살에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본 정조는 왕에 즉위하자마자 "나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사도'라는 명칭을 폐하고 아버지를 '장헌'으로 추존한 후 명당을 찾아 아버지의 무덤을 지금의 수원 화성으로 이장한 후 현륭원이라 명했습니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 잔치를 위해 8일간에 걸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간 정조의 행차를 기록한 화성능행도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지극한 효심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후 1899년 고종은 정조의 아버지를 장조 즉 왕으로 추존하였고 그의 무덤은 현륭원에서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고 합니다.

묘, 원, 능 조선시대 무덤의 이름을 모두 가진 사도세자 능 융릉에는 한 나라의 군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비의 넋을 달래는 아들의 지극한 효심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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