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2016.03.31. 오후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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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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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라진 수문 중 하나인 중심거가 발굴된 김제 벽골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수리시설로 16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농민에게 소중한 물을 대주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때로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등 질곡의 세월을 견뎌냈다.

김제 벽골제는 푸른 ‘벽’(碧)에 뼈 ‘골’(骨)자를 쓰는데 제방을 만들 당시 연달아 아홉 번 무너지자 푸른 뼈를 묻으라는 백발노인의 계시를 따른 후 아무 탈 없이 제방을 쌓았다는 설화가 전해질만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한반도에서 처음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부터인데 수리시설에 관한 문헌상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다.

농사를 정치의 근본으로 여긴 신라 제7대 일성왕은 144년 2월 제방을 수리하고 밭과 들을 넓히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수리시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벽골제는 그로부터 186년 후인 신라 제16대 흘해왕 21년인 330년에 만들어졌는데,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보였다”라고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이 지역이 엄연히 백제의 땅이었음으로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백골제에 관한 기록이 백제본기가 아니라 신라본기에 나타난 것은 그만큼 벽골제 축조가 대단한 치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처음 제방의 규모는 1,800보(步)였다가 460년이 흐른 통일신라 원성왕 6년 790년에 증축되었는데, 실제 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규모로 확장됐음에는 분명하다.

왕조의 대단한 치적으로 여겨지며 국가의 주요 시설물로 관리되던 벽골제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벽골제는 축조 이래 제방이 자주 무너져 내렸는데 고려 말 이후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급기야 고려 인종 24년에는 왕이 병이 났는데 그 원인이 벽골제란 무당의 말에 따라 3년 전 새로 쌓은 벽골제 제방을 아예 헐어버리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자 민심 수습을 위해 방치되었던 저수지들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벽골제가 그 시발이었다.

수리와 권농책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태종은 왜군의 침략을 대비해 세 군데의 성을 수축할 계획을 미뤄두고 벽골제부터 먼저 보수하라고 명할 정도였다.

이때 동원된 인원만 해도 장정 총 만 여명과 감독 관리가 삼백여명이었다고 한다.

2개월여에 걸친 대규모 보수공사로 비로소 벽골제는 옛 모습을 서서히 되찾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수비를 세웠다.

비문은 오랜 세월 마모되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에 대해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문헌에 따르면 벽골제의 5개의 수문과 연결된 5개의 도랑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만경현, 고부군, 부녕현, 인의현 등 인근 지역 논에 물을 대는데, 이 다섯 도랑이 물을 대는 땅은 모두가 비옥하여 백성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고 전한다.

대규모 보수공사로 7천 여척(尺)이었던 제방 길이가 6만 여척(尺)으로 8.5배가 늘어났고, 수문도 4개에서 5개로 1개가 더 늘어나 관개면적이 상당히 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벽골제는 수축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큰 시련을 맞게 된다.

바로 며칠 밤낮으로 내린 굵은 빗줄기가 큰 홍수로 이어져 급기야 벽골제를 비롯한 인근 저수지들의 제방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전라도 관찰사가 올린 상소에 따르면 벽골제의 유실로 전답 2천 여결(結)이 훼손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 농민들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답 2천 여결(結)을 벽골제가 물을 대던 논의 5분의 1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너진 벽골제 제방을 보수하는데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는 것이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제방이 무너진 다음날, 전라도 관찰사가 벽골제를 보수하기를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지금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 풍년이 들어 민심이 안정되면 그 때 보수하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장 보수되지 못한 저수지들은 더 큰 폐단을 가져오고 만다.

저수지 바닥에는 상류에서 흘러들어온 토사가 오랫동안 퇴적되어 그 땅은 유기물이 풍부해 토질이 상당히 비옥한 편이다.

민심 수습 차원에서 조정은 이곳을 농민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경작을 허가해 주는 ‘허민경식(許民耕食)’이란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오히려 부패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하룻밤 새에 멀쩡했던 저수지의 둑이 무너져 있는가 하면 세도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세워 그 땅을 빼앗고 세금까지 부과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조선 초기 만들어졌던 저수지 관리감독 기관인 ‘제언사(堤堰司)’는 유명무실해졌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이에 1662년 현종 3년에 다시 제언사를 부활하고 이런 폐단이 저수지가 제 기능을 못하고 경작지로 바뀐 데에 따른 것으로 보고 대대적인 저수지 보수에 나서게 된다.

벽골제가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미 저수지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던 농민들을 갑자기 몰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흉흉해진 민심에 벽골제 보수를 위해 파견된 제언사와 전라감사의 장계를 빌미로 비변사는 현종에게 상소를 올려 공사를 정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벽골제 보수는 물 건너가게 되었고, 게다가 농토를 늘리기 위한 화전이 성행했는데 이로 인해 갈수록 물은 부족하게 되었다.

논은 늘어만 가는데 정작 그곳에 물을 댈 저수지는 줄어들게 되어 악순환만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100여년이 지난 정조에 이르러서야 ‘저수지 관리 특별법’이라 할 수 있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을 공포하여 금지된 땅에 농사를 짓는 모경(冒耕)을 엄격히 금지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잇따른 가뭄과 홍수에 저수지의 중요성은 다시 부각되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이를 두고 정조는 “근래에 재황(災荒)이 잇달은 것은 대체로 수리를 강구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호남의 벽골제는 만일 더 깊게 파내기만하면 이같은 한재(旱災)는 염려할 것이 못되는데, 그곳이 지금은 다 막혀서 예전의 언저리를 거의 다시 알 수 없게 되었다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다.

화전은 늘었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세도가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이에 농민들은 새로운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 저수지 둑을 허무는 일이 빈번해졌고 이로 인해 물 없는 저수지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김제 벽골제, 1600여년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저수지의 역사를 말하다

벽골제도 마찬가지로 경작지로 바뀐 채 방치되다 1925년 동진 농지개량조합에 의해 제방이 절단되어 지금의 수로로 바뀌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이처럼 벽골제는 오랜 세월 동안 농민들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었지만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다시 쌓아지는 등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제공=대한민국 NO.1 낚시채널 FTV(김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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