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 사이' 마광수 비운의 생 마감

'예술과 외설 사이' 마광수 비운의 생 마감

2017.09.05. 오후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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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민 /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이종훈 / 정치평론가, 하재근 / 문화평론가

[앵커]
소설가 마광수 씨가 서울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즐거운 사라로 외설 논란의 중심에 섰던 마광수 씨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져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세 분을 모셨습니다. 김병민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이종훈 정치평론가 그리고 하재근 문화평론가 모셨습니다. 세 분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하재근 평론가님, 한번쯤 책을 읽어본 분들도 많을 테고 강의를 들은 분들도 많을 테고 어쨌든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충격받은 분들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인터뷰]
그렇죠. 마광수 교수, 마광수라는 이름 자체를 1990년대를 지내온 사람 중에는 안 들어본 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거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에 하나였고 그리고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성담론을 시작한 대표적인 선구자 중의 한 분이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별세 소식이 들려오니까 사람들이 충격도 받고 마지막에 굉장히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후배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앵커]
참 많은 화제와 참 많은 논란을 낳았던 작가였습니다. 마광수 작가의 삶을 두 가지 키워드로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키워드입니다. 즐거운 사라.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이종훈 평론가 나와 계신데요.

예술과 외설 사이, 어떻습니까? 마광수 작가의 작품세계를 표현하는 단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우선 이분 작품이 문학적으로 뛰어나다, 예를 들어 표현 면에서 그랬다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문장 자체도 간결하게 하고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을 쓰시는 그런 편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문학사에 기여를 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가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반면에 굉장히 외설적인 표현을 많이 하기는 했는데 요즘 흔히 하는 말로 고급스럽게 표현했다.

그러한 점이 조금 다른 점. 그래서 상당히 그 당시에 눈길을 많이 끌었던 거고요. 이른바 사실 포르노성 소설이라든가 그런 글들이 요즘에도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또 그런 류의 웹툰도 굉장히 많고 한데 그런 거하고는 확실하게 결이 다른 건 분명하죠.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예술과 외설 사이 어딘가에 중간쯤에서 그렇게 다 기억을 하는 건데요.

[앵커]
과거에 책을 읽어보신 적은 있으시죠? [인터뷰] 네, 저희 때는 당연히 워낙 그 당시에 센세이션한 그런 책들이었기 때문에 다 한번씩 읽어봤죠. 저도 읽어봤고. 그런데 그때는 상당히 사실은 그게 많이 자극적이고 또 논란이 될 만한 표현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인데요.

요즘에 그것보다 더 직설적인 그런 내용들의 소설이랄지 또 그런 것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그런 정도로까지. 그 당시에 왜 그런 논란이 일었을까 할 정도로 내용이 사실은 의외로 평이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마광수 작가를 수식하는 말들이 상당히 많은데요. 수식어들을 저희가 모아봤습니다. 이런 수식어가 있겠죠. 예술과 외설의 경계인, 문학계의 외로운 왕따. 혹은 솔직한 본능을 드러낸 야한 작가 이렇게도 불리고요. 이렇게도 불립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로맨티스트. 김병민 교수님, 어떤 수식어가 가장 와닿으시나요?

[인터뷰]
시대를 너무 앞서간 로맨티스트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야한 작가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실질적인 문학계의 평 중에서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라는 얘기들도 있고 연세대학교에서 작년, 지난해에 정년을 다 채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 때문에 징계를 받아서 결국 연금을 받지 못하고 또 명예교수가 못했던 사건 때문에 나름대로 학교에서도 외로움을 겪었다, 이렇게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리고 정년을 하고 난 뒤에 뭔가에 대한 사회생활들을 본인이 하고 싶었던 모습으로 얘기들이 나오는 건데 거기에 대해서 나를 불러주는 곳이 없다라는 외로움을 계속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992년도로 돌아가서 시계를 돌리면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도중에 사실은 검찰에 긴급체포가 돼서 구속이 되는 사건이 있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마광수 당시 교수는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데 10년만 지나도 이 일은 코미디가 될 것이다라고 얘기를 했던 것처럼 사실상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담론을 어느 정도 수면 위로 끄집어냈던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주목할 만한 그런 인물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앵커]
그러니까 즐거운 사라라는 작품은 마광수 작가가 있게 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마광수 작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작품이기도 한 거잖아요.

[인터뷰]
그러니까 그 작품으로 인해서 마광수 교수가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는 건데 원래 1989년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이걸로 인해서 굉장히 한국사에 성담론을 불러일으키면서 일종의 스타 작가가 됐던 거죠. 그러니까 거기까지는 사람들한테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문화 권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건데 문제는 1992년에 즐거운 사라를 발표하면서 이거는 논란 수준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이거는 법으로 처단을 해야 될 수준이다.

이렇게까지 발전이 되면서 이분이 당시 학생들한테 강의를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구속이 됐었고 구속이 된 이후에 우리 사회의 기존 지성계한테 별로 지지를 못 받은 거죠. 그래서 감옥에서 풀려나온 다음에도 이분이 일종의 지식계 왕따를 당한 것 아니냐. 그분이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한이 맺혔었고.

[앵커]
대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유죄가 나왔었던 거죠?

[인터뷰]
95년에 최종적으로 유죄가 나오면서 지식계 왕따 더하기 단순 왕따가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대학교수직에서 해직도 됐던 거죠. 그러니까 상당한 고난이 있었고 이분이 그래서 내가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에 그렇게 법정 투쟁을 하고 해직되고 이러면서 시간을 다 흘려보냈다.

그래서 평생 그게 한으로 남았고 그때 우울증하고 대인기피증을 얻어서 그 이후에 복직이 됐는데도 다시 치료받느라고 또 휴직하고 또 복직하다가 또 휴직하고 결국 그 후유증이 끝까지 치유가 안 되면서 이번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그런데 사실은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즐거운 사라가 나온 게 91년도인데요. 그때 사실은 군사정권 시대로부터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그 시기예요.

그러면 그때는 문화적으로 굉장히 암흑기였다라고 우리가 봐야 되는 거죠. 문화예술계 전반적으로. 여전히 군사 문화가 유지가 되고 있던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사실은 이분이 너무 파격적인 글을 내놓은 거고요. 요즘에 아마 이런 소설집을 냈다고 그러면 그렇게까지 화제가 안 될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워낙 모든 것이 억눌려 있는 그런 상황에서 이런 과격한, 과감한 표현들이 나오다 보니까 그런 거고 저는 이분을 개인적으로 사랑운동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의 민주화운동 하듯이 사랑지상주의를 퍼뜨리기 위해서 애를 쓰셨던 분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어쨌든 즐거운 사라로 인해서 상당히 우여곡절 많은 인생사가 됐고 그리고 뒤돌아보면 40여 권의 저서를 남기게 됐는데 문학계로 보면 어떨까요? 어떤 의미를 남긴 분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인터뷰]
그러니까 이분이 즐거운 사라 논란 때문에 외설작가 이런 식으로 낙인이 찍힌 게 평생의 한이 된 건데 사실 아까 40여 권 저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야한 책만 쓰신 분이 절대로 아니고 본인의 연구 성과가 있기 때문에.

[앵커]
저희가 좀 모아봤는데 시집에서 수필집, 소설 상당히 많더라고요.

[인터뷰]
굉장히 많은데 이분이 우리나라 윤동주 박사 1호입니다. 윤동주 시인 전문가이고 상당한 수준의 깊이 있는 연구가 있어서 28살에 조교수로 임용이 됐습니다.

28살에 교수가 됐을 정도니까 천재 교수라는 말까지도 들었고 이분이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이 우리나라 평론가도 되고 문학계의 일종의 거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분이 성담론으로 인해서 너무나 고초를 겪은 결과 사람들이 이분을 자꾸 외설작가 쪽으로만 낙인을 찍은 것, 그것도 상당히 고인에 대한 하나의 모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앵커]
저희도 지금까지 마광수 작가 하면 즐거운 사라 이것만 딱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고인도 이 부분을 상당히 억울하게 생각했다 이런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고인의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입니다. 너무 억울하고 한스럽다. 최근 작가의 인터뷰 내용부터 보고 가겠습니다.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와 지난해 10월에 인터뷰를 한 내용 그래픽으로 준비했는데 그래픽부터 준비해 주시죠. 요즘 너무 우울하다, 이런 심정을 토로했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어디서든 강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참 많이 아쉽다, 이런 내용을 얘기했다고 하고요.

그리고 지난해 퇴임 소감에서도 본인의 심정을 절절하게 드러냈습니다.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학교에서 잘리고 겨우 복직했더니 교수들의 따돌림, 있었고. 그리고 우울증을 얻어서 휴직했고 문단에서 나는 왕따고 책도 안 읽어보고 나를 변태로 매도하는 대중들이 있고 그리고 내가 성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따라다니는 간첩 같은 꼬리표다 이렇게 속상한 마음을 표현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책을 통해서는 상당히 과감한 표현을 하는 작가라고 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외롭고 여렸던 그런 분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터뷰]
그럴 수밖에 없는 생각이 들고요. 가족 간의 관계를 보더라도 결혼 초기에 이혼을 일찍 하게 됩니다. 그리고 슬하에 자녀가 없게 되고 지금 유가족이라고는 누나나 조카 정도밖에 없다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내면에 갖고 있는 외로움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고요.

앞서 인터뷰가 2016년도에 나왔던 인터뷰로 볼 수가 있는 건데 이미 연세가 들고 난 다음에 건강 상태가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부 방송에서도 출연하는 모습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건강하게 언어에 대한 의사 전달들이 명확하게 되지 않는 상황으로 보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본인이 내적으로 쌓여져 있는 여러 가지 그런 지식들을 대중들과 교류를 하고 싶어도 강연에 대한 전달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소위 말해서 마광수 교수를 찾는 찾는 그런 부분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고 그런 측면들에서 결국 원인이 무엇인가를 되짚고 돌아가게 됐을 경우에 과거에 썼던 저서로부터 사실 본인이 나름대로 낙인이 찍힌 것에서 원인을 찾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아마 동료 교수 사회에서 왕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걸 가장 뼈아파했던 것 같아요. 말 그대로 문단이라고 하는 곳 그리고 대학의 사회라고 하는 곳에서는 품격을 중시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서 마광수 전 교수가 얘기했던 여러 가지 솔직한 내용들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외면시당했던 부분들이 결국 본인의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앵커]
하재근 평론가님, 시대도 변하고 하면 어떻게 보면 문단에서도 분위기가 바뀔 만도 한데 이렇게 지난해까지도 왕따, 이런 얘기를 할 정도면 상당히 섭섭함을 토로한 것 같은데 왜 이런 분위기가 변하지 않았을까요?

[인터뷰]
왕따라는 것은 아마도 1990년대하고 2000년대 초반이라든가 과거에 아마 이분이 당했던 사회적 냉대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고 최근으로 오면 왕따가 문제가 아니라 주변부로 본인이 점점 밀려나서 잊혀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분이 작년에 학교를 정년퇴임을 하면서 보통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명예교수라든가 이렇게 커리어가 이어지는데 이분 같은 경우에는 과거 옥고를 치르고 해직당하고 이랬던 전력 때문에 명예교수가 못 됐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적인 경력이 뭔가 단절되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때 그 옛날에는 나한테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오더니 청탁도 안 들어오더라, 강연요청도 안 들어오고.

더군다나 이분이 평생 의지했던 홀어머니, 홀어머니가 키우셨는데 홀어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신 거죠. 작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학교에서는 퇴직하고 더 이상 찾는 곳은 없고 이러다 보니까 이분이 상당한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데 이분이 40대, 90년대에 그런 활란을 겪지 않았으면 커리어가 오늘날까지 쭉 이어져서 말년이 그렇게 외롭게 되지 않았을 텐데 결국 90년대의 논란이 아직까지도 이분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그런데 본인의 자기 평가와 달리 저는 개인적으로 일종의 연예인증후군을 앓은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한때 굉장히 유명했단 말이죠. 그리고 모든 논란의 중심에 본인이 서 있었고 그리고 또 논란을 주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었고 그런데 어찌됐건 서서히 잊혀가는 그런 상황이 된 데다가 몸도 불편하고 이렇게 되니까 당연히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한때 굉장히 유명했던 연예인들 중에 계속 연로하신 상태에서까지 연예 활동을 계속하시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덜한데 그렇지 않고 젊었을 때 잠깐 아이돌처럼 굉장히 유명했다가 잊혀진 분들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증후군을 겪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것도 작용을 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삶의 고단함에 대해서 저희 YTN 인터뷰, 저희가 자료를 찾아봤는데 과거 지난 2008년에 YTN 라디오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좀 우울증 비슷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는데요. 들어보시죠.

[마광수 / 소설가 (YTN 라디오 인터뷰 / 지난 2008년) : 제가 우리 과에서 이제 고참(선임)입니다, 고참. 밥그릇 수로 하면 최고 고참이에요. 그런데 저와 가까웠던 후배, 제자들이 이른바 왕따를 시키네요. 그래서 이번에도 학교에서 강제로 만들어준 거죠.(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어디라고 보십니까?) 없어요, 없어.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고 문화비평집을 냈는데 거기서 외설은 없다는 아주 긴 글이 실었습니다. 이게 외설이고 이게 예술이라고 구분할 수가 없어요. 엿장수 마음대로예요. 내가 보면 예술이고 남이 보면 외설이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즐거운 사라'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칭찬을 받았거든요. (윤동주 시인이 지금 살아 있어서 교수님의 시와 소설들을 보게 된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요?) 저는 비슷하다고 늘 얘기하죠. 윤동주 시인을 저항 시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적으로 풀어 놓기도 했어요, 윤동주 연구에서. 그 사람은 아무리 시를 한 줄 한 줄 읽어봐도 저항한 구석이 없어요. 거의 다 내면의 고백입니다, 고백.]

[앵커]
글쎄요, 이 부분은 동의하시는 분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겠지만 윤동주 시인과 나는 솔직한 고백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도 얘기를 했습니다.

[인터뷰]
그러니까 마광수 교수가 윤동주 시를 일종에 성적인 코드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수 있는데 내면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그런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거죠. 물론 내면의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 마광수 교수가 하는 이야기가 그 윤동주 시인의 시대도 그렇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도 그렇고 우리들 내면의 솔직한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마광수 교수 스스로 자신이 시대와 불허하고 뭔가 자신이 점점 외로워지고 그런 것에 대해서 윤동주 시인한테 약간 감정이입을 하면서 스스로 좀 동일시하는 그러한 정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
이분이 생전에 남긴 어록이 상당히 많고 거친 표현도 많은데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런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저항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늘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인터뷰]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거고요. 저항에 대한 얘기 중에는 결국은 이 사회를 향해서 사실상 겉으로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는 성적인 얘기들을 많이 해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 같고 마광수 전 교수 같은 경우가 본인의 인생에서 갑자기 성적 담론을 끄집어냈던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홍익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고 나서 한의학에 심취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성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고 그다음부터 이와 같이 음양사상과 카타르시스 이런 책을 쓰면서 사실상 성적담론들을 끄집어냈다고 하는데 이게 우리 사회에서 그 당시에 90년대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웠던 상황이지만 지금은 또 시대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마광수 교수에 대한 여러 가지 평들이 사실 과거와는 다른 상태로 흘러갈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앵커]
마광수 작가를 추억하는 네티즌들의 글이 상당히 많이 올라왔는데 저희가 몇 개만 추려봤습니다. 함께 보시죠.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다, 이렇게 평가하시는 분들도 꽤 많았습니다.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이었고요. 그리고 윤동주 시인을 거론하는 분이 상당히 많았는데요.

인간 윤동주에 대해 정확한 논문을 써서 대한민국에 윤동주라는 큰 별이 있다는 점을 알려준 교수, 참 아까운 분이 가셨다라는 글도 있었고요. 그리고 오늘 책 다시 펼쳐보는 분들 상당히 많을 것 같은데 책을 또 보면서 고인을 추모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시인 윤동주뿐만 아니라 인간 윤동주에 대해서도 지금의 반열로 올려놓는 데 큰 공을 세운 건 분명한 거죠?

[인터뷰]
이분이 우리나라 윤동주 박사 1호니까 박사 논문을 윤동주 시인으로 쓰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성적으로 해석하고 이렇게 된 건 나중 일이고 젊었을 때는 우리가 흔히 정식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윤동주 시의 연구를 한 것이고 이분이 한 연구의 젊었을 때 했던 바탕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과서의 윤동주 시인의 해석의 바탕이 되고 있다,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니까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를 대중한테 널리 알린 상당히 문학적 공로자다, 이렇게 평가를 할 수도 있는 건데 이런 부분들은 거의 다 잊혀지고 나중에 외설작가 하나로만 딱지가 딱 붙은 게 상당히 이분한테도 유감스럽고 이분을 좋아하는 제자나 후배들한테도 그 부분이 상당히 한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앵커]
평론가님께 끝으로 간략하게 여쭤볼게요. 즐거운 사라 나왔을 당시하고 지금하고도 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고 그리고 또 10년, 20년 지나면 또 다른 평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떤 작가로 기억이 될까요?

[인터뷰]
이분은 작가도 작가지만 우리나라 1980년대 말에 90년대에 나타나는 성담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선각자였다. 전위, 아방가르드였다. 이렇게 아마 생각될 것 같고 요즘에 젊은 사람들이 예전에 난리였단 말이야라고 옛날 책을 찾아보면 에계, 이러면서 이 정도 가지고 우리나라가 발칵 뒤집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문화적인 표현을 가지고 금지해야 된다, 사회가 이러면 큰일난다, 이렇게 논의를 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

불과 몇 년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텐데 지금 금지를 하고 난리를 칠 것인가, 젊은 세대가 그런 생각을 할 것 같고 지금 마광수 교수가 자신의 문학관을 문학은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이다.

창조적 불복종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가 금지된 것에 도전하고 불복종하는 사람을 블랙리스트로 탄압하고 이런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문화적인 표현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마광수 교수의 이번 화제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독자들의 가슴 안에 각자 다른 의미로 마광수 작가가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하재근 평론가님은 여기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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