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가요 지킴이 [이준희, 교수·대중음악평론가]

옛 가요 지킴이 [이준희, 교수·대중음악평론가]

2013.08.22. 오후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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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어떤 곡인지 아시겠습니까?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씨와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장세정 씨가 함께 부른 '목화를 따며'라는 곡인데요.

가요의 황금시대라고 불렸던 1930년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유명했던 당대 최고의 가수들의 음반이 거의 신품 상태로 일본 고베에서 발굴돼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이 음반들 공개하겠습니다.

해설해 줄 대중음악평론가 이준희 성공회대 외래교수 모시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노래가 참 정겹습니다.

지금 이 턴테이블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는 거죠, 음반으로 바로.

이 음반들인데 한번 보여주시죠.

[인터뷰]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초까지 발매가 됐던 주로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됐던 금반들입니다.

[앵커]

지금 보니까 오케라고 써있거든요.

오케레코드라고 써 있고 이게 1930년대 40년대 발매가 됐던 음반들인데 깜짝 놀랄 정도로 상태가 좋고 소리도 진짜 나오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게 음반 재킷인가요?

[인터뷰]

SP레코드는 LP와 달리 재킷에 제목이 써 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홍보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가수들 얼굴을 대신 여기에다가 사진을 넣는 것이죠.

이 당시 오케레코드 전속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가수 여러분들의 또는 인기 작곡가들의 사진을 실어놨습니다.

[앵커]

오케레코드 가요라고 써 있고요.

그다음에 가수분들이 8명의...

[인터뷰]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남인수, 이난영, 장세정, 김정구, 백년설 이런 분들의 사진이 실려있죠.

[앵커]

이건 뭡니까, 옆에 있는.

[인터뷰]

이게 음반과 같이 나왔던 가사지입니다.

지금 보시는 면이 바로 목화를 따며 아까 소개해 주신 그 노래의 가사입니다.

[앵커]

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 가사군요.

[인터뷰]

원래 음반은 가사지가 있어야만 가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종이 재킷과 음반 그리고 가사지 세 가지가 함께 세트로 판매가 됐던 겁니다.

그다음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종이류들이 특히 소실되기가 쉽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 가사지를 오히려 음반보다 더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어려움이 있었죠.

[앵커]

우선 궁금한 것은 70년, 80년이 지나서 어디서 이 음반들이 발굴이 돼서 어떻게 우리한테까지 오게 됐을까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인터뷰]

바로 얼마 전인데 8월 초에 일본 고베를 다녀왔고 일본 고베에 계시는 일본인께서 이 음반을 한국음반들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건너가는 것이 맞다, 아버지의 유품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저희가 인수를 하게 된 거죠.

[앵커]

그분들은 어떤 분들인데요?

[인터뷰]

고베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클래식음악 담당으로 계셨던 후지타 미쓰히코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1901년 나신 분인데요.

이분이 원래 다양한 음악을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하다 보니까 관심을 가지고 듣게 됐고 그때 당시에는 조선이었죠, 우리나라의 레코드 음악을 유행가를 이런 것도 있구나 관심을 가지고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마는 음반 50여 장을 직접 수집을 해서 한번 연구를 해 보자 이런 차원으로 모아두셨던 건데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아드님께서 이 음반을, 아버지의 유품을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을 하고 계시다가 그게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거죠.

[앵커]

그 아드님이 이걸 한국에 돌려줘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신 모양이죠?

[인터뷰]

그것도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 나고야에 계시는 재일교포 또 대중음악 연구로 오랫동안 헌신해 오신 박찬호 선생이라고 있는데요.

지난 2009년도에 한국가요사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어느 분입니다.

이 박찬호 선생께서 일본 각지에서 재일교포 또는 한국대중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들 대상으로 강연을 종종하시는데 하필 7월달에 고베에서 강연을 하게 되셨고 거기에 후지타 선생의 아드님께서 후지타 아키히코 씨가 참석을 하게 됐고 강연을 듣고 나서 일종의 감동을 받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강연 끝난 뒤에 박찬호 선생께 자문을 구한 거죠.

아버지의 유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인수를 하셔도 좋겠고 이렇게 말씀을 했던 건데 박찬호 선생께서는 어차피 이것이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면 재일교포인 나보다는 한국에 있는 연구자 애호가들한테 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을 하셨고 그래서 저한테 연락을 주신 겁니다.

[앵커]

그래서 그 음반 55점이 현해탄을 건너서 마침내 70~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우리가 지금 듣게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하나씩 노래를 들어볼 건데요.

우선 저희가 성함은 들었습니다마는 이난영 선생님, 김정구 선생님은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생존하셨고 남인수 선생님, 이런 분들도 성함은 들었지만 저도 사실은 이분들 노래 직접하시는 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어떤 분들인지 한 분씩 영상으로 잠깐 보여드리고 그리고 이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난영 선생님 영상 한번 보겠습니다.

이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고 또 목포는 항구다도 이난영 선생님이 부르셨고. 목포분이더라고요, 보니까.

[인터뷰]

고향인 목포인 가수가 목포 노래를 부르면서 시너지 효과랄까요, 좀더 대중들에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앵커]

이분의 이 음반들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지만 일본의 고베에서 발견된 이 음반들은 우리나라에는 왜 보전이 안 돼 있었던 건가요?

[인터뷰]

1945년 이전에 음반회사, 음반산업의 상황부터 좀 간단하게 말씀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

그당시 음반회사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 음반회사였습니다.

일본 도쿄나 오사카 같은 도시에 본사가 있고 그 음반회사들이 서울 당시 이름은 경성이죠.

경성에 지점을 설치해서 지점에서 한국어 컨텐츠의 음반들을 만들어냈던 겁니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내용들이라고 하더라도 음반이 제품으로서 완성되는 공장시설은 모두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찍어서 그것을 배편으로 경성으로 보내서 전국으로 판매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수많은 음반들이 유통이 되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가 끝난 직후에 6.25전쟁이 발발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를 거치면서 그리고 또 이른바 산업화 시기라는 사회가 좀 급변하는 그런 시기를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음반들이 온전하게 보존되기가 힘든 상황이었던 거고요.

반면에 일본 같은 경우는 본사가 있는 공장에서 어차피 일본에서 음반들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국어음반들이 일본에서도 동시에 유통이 되고 있었습니다.

[앵커]

보존 여건이 좋았던 거군요.

그러면 이난영 선생님의 노래,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 노래 어떤 것 좀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차이나등불이라고 중국풍의 멜로디를 사용한 노래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한번 들어보시죠.

[앵커]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턴테이블도 요즘에 참 보기 힘든 물건인데 여기에 1930년대 음반이 올려지고 있습니다.

차이나등불.

아주 많이 히트했었던 노래입니까, 그당시?

[인터뷰]

목포의 눈물이나 목포는 항구다 같은 노래들에 비해서는 크게 히트한 곡은 아니고요.

그렇기는 하지만 이 가수가 다양한 분위기와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소화했던 그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고요.

또 차이나등불이 수록되어 있는 뒷면에 같은 음반에 수록되어있는 곡이 그 유명한 꿈꾸는 백마강 곡이기도 합니다.

이 음반도 노래는 이미 꿈꾸는 백마강 같은 경우 알려져 있었지만 이런 깨끗한 상태로 보존된 음반이 그동안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어서 많이 안타까움을 사고 있었는데 이번에 좋은 자료가 나온 거죠.

[앵커]

여기 보니까 광복 이전에 12명 가수, 명가수 12명을 선정을 하셨던데 여기에 보니까 지금 노래하신 이난영 선생님도 있고요.

우리가 들어볼 남인수 선생님도 있고 김정구 선생님도 있고 조금 전에 저희가 처음 들었고 장세정 선생님도 여기에 있고요.

장세정 선생님은 얼굴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제가 한번 달력인데요, 사진 한번 얼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분이 처음에 아까 이난영 선생님하고 같이.

[인터뷰]

목화를 따며를 듀엣으로 하셨던...

[앵커]

장세정 선생님이고, 이난영 선생님은?

[인터뷰]

나그네설움, 번지없는주막 같은 노래를 부른백년설 선생님의 사진입니다.

바로 이분이 이난영 선생님 사진이고요.

[앵커]

지금 노래 들었던 이난영 선생님.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를 부르셨던 이난영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또 우리가 아주 친숙한 이름 중 하나가 남인수 선생님이거든요.

남인수 선생님도 저희가 영상으로 잠깐 소개해 드리고 노래 음반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보시죠.

남인수 선생님도 노래가 보니까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저처럼 아주 후대사람들도 잘 아는 노래들이 지금 들은 황성옛터 이런 아주 공전의 히트곡이 많군요.

남인수 선생님의 우리가 못 들었었던 노래는 이 음반에서 어떤 노래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남인수 선생님은 워낙 지금까지도 팬이 많은 가수이기 때문에작년에 타계 50주년을 맞아서 남인수 전집이라는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시점에서 모든 남인수 선생의 노래를 다 모아서 전집을 냈는데 그 전집에 조차도 실리지 않았던 곡이 이번에 고베에서 나온 음반이 세 곡이 추가로 발견이 됐습니다.

굉장히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자료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래서 오늘은 그중에 하나 융수건길손이라는 노래를 들고 왔습니다.

[앵커]

융수건길손이 무슨 뜻인가요?

[인터뷰]

수건인데 융이 있다는 거죠.

그 수건을 목에 두르고 일을 하는 그런 정황들을 묘사한 노래입니다.

[앵커]

기대됩니다.

융수건길손.

처음 들어보는 그 당시의... 1930년대 노래인가요?

[인터뷰]

41년.

[앵커]

그 당시 맞춤법으로 도끼라고 가사집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거죠.

[인터뷰]

이런 가사지가 발굴이 됐다는 게 또 의미가 있는 건데요.

그당시 표기법을 알 수 있다는 소소한 것도 알 수 있지만보통 음반들이 국내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의 음반들은 이런 자켓이나 가사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종이류들이 특히 또 소실되기가 쉽기 때문에. 그래서 노래를 들어도 음질이 안 좋은 경우에는 도대체 이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를 알기가 굉장히 힘든 경우가 많죠.

그래서 남인수 전집 같은 CD를 낼 때에도 가사가 아주 들리지 않는 경우에는 결국에는 공란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그런 어려움이 있는데 이번 자료들 가사지가 대거또 발굴이 되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죠.

[앵커]

다시 한 번 보여주시죠, 가사지.

어떻게 이렇게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요.

70~80년이 흘렀는데 어떻게 이렇게 종이상태가 좋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이게 융수건길손 그 가사지거든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냥 두시고요.

조금 전에 들었던 1절인데.

도끼에 청춘이 온다 이런 얘기가 있고 2절은 곡절로 얽어매진 좁은 가슴을 종달세 육북들에 풀어놓았다.

그때 그대로 맞춤법대로 써 있고 푸념도 추억도 모르고 사는 움직이는 기중기에 행복이 온다.

참, 그분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수집하신 분들.

[인터뷰]

지금까지 이렇게 정말 양호한 상태로 음반도 거의 미사용에 가까울 정도로 보존해 주신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이 자료를 별다른 조건도 없이 기꺼이 한국으로 넘겨주신 것, 정말로 이런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일본에 확인은 안 되고 있지만 이런 우리 옛가요자료들이 굉장히 많이 산재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지금 하고 있거든요.

[앵커]

그러면 마지막으로 김정구 선생님, 김정구 선생님은 비교적 더 많은 사람들이 최근까지 생존하셨기 때문에 김정구 선생님 우선 영상 잠깐 보고 미공개 곡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죠.

저희들의 기억속에는 지금 저 정도 연세 때, 제 기억 속에는 모습만 남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젊었을 때 김정구 선생님의 사진이 되겠습니다.

1998년에 작고하셨습니다.

[인터뷰]

미국에서 돌아가셨죠.

[앵커]

김정구 선생님의 못 들었던 노래는 어떤 걸 저희가 오늘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아까 서두에 잠깐 보여드렸는데요.

유쾌한 봄소식, 지금 철은 봄이 아닙니다마는 유쾌한 봄소식입니다.

굉장히 경쾌하고 일제강점기가 보통 암울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그당시 대중가요가 슬픈 노래가 많다는 그런 선입견들이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그 당시에도 이런 밝은 느낌의 노래들이 얼마든지 있었다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죠.

[앵커]

들려주시죠.

김정구 선생님의 유쾌한 봄소식입니다.

진짜 봄이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거든요.

그때 식민지 백성들의 애환을 달래줬었던 노래들 아닙니까?

[인터뷰]

특히 유쾌한 봄소식 같은 노래는 서울시내의 지명도를 가사 중에서 여러 군데 거론하면서 노래가 진행됩니다.

[앵커]

한번 들어볼까요, 가사를 그러면?

경복궁 나왔고요.

종로통 남대문통 다 나왔네요.

저희 회사가남대문통이거든요.

[인터뷰]

그리고 그 당시 본정이라고 불렸던 명동, 본정통이라는 명동도 나왔죠.

[앵커]

마치 세월을 거슬러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고요.

그때 우리 선조들, 우리 조상들이 어떤 생각 어떤 마음들이셨을까라는 게 조금 생생하게 가까이 느껴지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저희가 시간이 좀더 있으면 더 들었으면 좋겠는데 오늘 시간이 다돼서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귀한 자료들 찾아주시고 잘 보존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하시는 데더 헌신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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