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수학의 정석'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수학의 정석'이 있었다?

2017.02.05. 오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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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사이언스] 조선시대에도 '수학의 정석'이 있었다?

■ 안나미 /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

[앵커]
우리나라는 매년 세계 유소년 수학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학 강국의 면모가 실은 조선 시대 때부터 이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판 '수학의 정석' 문제풀이 집도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시간 속으로>에서는 조선의 수학에 대해서 안나미 교수님 모시고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 시대의 학문 하면 철학,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하는데요.

조선 시대에도 수학이 발달하고, 수학자도 있었다고요.

[인터뷰]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조선이라고 하면 인문 중심의 사회라고 생각하는데, 인문 중심의 사회였었지만 인문학자들도 당시에 수학이나 이런 것들을 많이 익히고 있었습니다.

특히, 수학에 가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왕이라고 하면 세종대왕을 꼽을 수 있는데요.

세종대왕의 업적이야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그중에서 세종이 특히 수학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아주 육성 장려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수학이라는 것이 국가의 재건에 꼭 필요한 학문이기도 하지만, 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갖추는 데에도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해서 스스로 '산학계몽'이라고 하는 조금 어려운 수학책, 10차 방정식까지 나오는 어려운 책인데, 이런 책을 가지고 세종 스스로 정인지라는 학자에게 공부했을 정도로 (열심히)했었습니다.

대부분 수학 같은 경우는 중인 계층이 가문으로 쭉 이어오고 있는 전문 수학자 집단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나라 사대부들도 수학에 많이 관심을 가졌어요.

'조선의 명산가'라고 해서 조선의 유명한 수학자라고 하면 몇 명을 꼽는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 같은 사람들의 이름도 올라와 있고요.

그다음에 대표적인 실학자 홍대용 같은 경우도 그의 문집 '담헌서'라는 것 안에 '주해수룡'이라고 하는 아주 전문적인, 기하학이나 서양 수학, 실학이 들어왔을 때이니까 이미 16세기 말, 17세기 때 이미 서양의 선교사들이 북경에 와서 서양 수학이 전파되고 있었거든요.

그것을 다 조선식으로 다 정리했던 것들도 있고, 그 외에도 최석정이라든가 남병철, 남병길 형제 같은 사대부 문인들도 전문적인 수학책을 펴낼 정도로 수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앵커]
정말 많군요, 수학자들이.

수학자 집안까지 있었다고 하니까, 조선 시대에 대입 수능시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왜 수학이 필요했을까요?

[인터뷰]
일단 우리가 생각해보면 수학이라는 건 인류가 문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연히 필요한 학문이에요.

조선이라는 왕조가 새로 건국되었을 때 특히 세종 같은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들을 좀 더 이전의 왕조보다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당시가 농업 사회였잖아요.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달력이 필요했었고, 달력을 예전에 중국에서 받아 쓰던 것을 조선식으로 달력 계측을 하기 위해서 그런 식의 수학도 발달 됐고, 농사를 위해서 그런 것이 발달 됐고, 그 외에도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할 때, 인부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할 수 있는 것, 정확한 토지를 측정해서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것), 불리하거나 억울하게 세금을 내는 일이 없도록 그런 차원으로 수학을 장려했던 것 같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이 시대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수학에 관심을 가졌고, 수학 담당 관리도 있었다고 처음 들어보는 말씀 해주셨는데요.

[인터뷰]
수학 같은 경우는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라는 곳에서 산학자들이라고 얘기하거든요.

산학 교수, 산학 훈도라고 해서 수학자들을 양성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고, 계사, 산사라고 해서 전문적인 회계사처럼 계산하는 전문가 집단이 호조 아래 9명 정도 있다가 그 이후에는 애초부터 중국에서 쭉 이어왔었지만, 조선은 중국의 수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조선식으로 재정립했는데 조선 수학의 큰 특징이라고 하면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게 산가지로 계산하는 법이에요.

산가지라고 하면 뭔지 잘 모르시는데, '산대'라고도 하고, '산목'이라고도 하는데, 나뭇가지로 계산하는 거예요.

나뭇가지를 하나씩 세우면 1의 단위 숫자가 되고, 나뭇가지를 옆으로 눕히면 10의 단위로 되고, 예를 들어 음수나 소수점을 표현할 때는 사선으로 맨 끝자리를 치면 그것이 마이너스, 음수가 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표현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계산기로 보시면 될 거예요.

이런 산가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나뭇가지로 얼마나 계산을 잘했겠어' 싶지만, 10차 방정식까지도 다 계산이 가능했었던, 그래서 중국 사신도 깜짝 놀랐었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앵커]
마치 로마자 같기도 하고요.

굉장히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봤는데, 지금 우리나가 학생들이 세계 수학대회에 나가면 꼭 상위권에 위치하지 않습니까?

조선 시대 때부터 쭉 이어온 것 같더라고요.

[인터뷰]
조선 시대 때도 보면 전문 수학자 집단들이 있었고, 전문 수학 서적들이 있었어요.

아까 수학의 정석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공부할 때 기본으로 삼는 수학의 정석 책도 있고, 또한 입시를 위해서 보는 책도 따로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 호조 밑에 있었던 산학 전문 중인의 산학가 같은 경우는 시험을 치기 위해서 봤던 책들은 또 따로 있었어요.

그리고 그 중 산학가 집안 중에 가장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인 '홍정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구일집'이라는 책에서 보면 당시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하국주라는 사람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어요.

이 사람 입장에서 '아, 중국에서 이렇게 유명한 수학자가 왔으니 꼭 만나보고 싶고,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그래, 우리 한 번 겨뤄보자.'해서 문제를 냈는데, 중국 사신의 문제는 사실 굉장히 쉬웠어요.

얼마짜리 정사각형이 있는데, 거기의 한 변의 길이가 이렇다면, 나머지 변의 길이가 얼마이겠는가-이런 식의 문제를 냈더니 홍정하는 '제가 문제를 내도 되겠습니까'라면서 문제를 낸 것이 '공 모양의 구 안에 정육면체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정육면체의 부피가 얼마인지 알려주고 그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는 얼마인가.'라는 문제를 냈더니 굉장히 복잡하고 (우리도) 머리가 벌써 아프잖아요.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구의 지름을 구하고 구의 부피를 구하는 공식에 대입해야 하거든요.

골치가 좀 아프시죠?

그런데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는 공식을 딱 대입해서 하는 데 중국의 수학자는 그것을 풀지 못했어요.

'아, 이건 복잡한 문제이니 내일 답해주겠다.'라고 했는데 사신으로 지내는 기간 동안 답을 안 주고 가면서 '그런데 이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하니까, 홍정하가 산가지로 문제를 척척 풀어 주니 '아니, 이렇게 신기한 도구가 있을 수가.'라면서 이것을 얻어 가겠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산가지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있었던 건데요.

그런데 중국은 명나라 때부터 상업이 굉장히 발달하면서 산가지 대신에 주판을 주로 사용하면서 산가지가 쇠퇴하게 되었고, 조선은 상업을 천시하는 그런 풍습이었기 때문에 전문 수학자들에 의해서 산가지로 사용하는 계산법이 훨씬 더 발달하니까 역으로 산가지 계산법을 중국에 역수출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죠.

[앵커]
조선시대판 ‘수학의 정석’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건가요?

[인터뷰]
원래는 여러 가지 수학책들을 만드는 데 기본이 되었던 수학책 같은 경우에는 원래 중국 책이 있었어요.

아까 얘기했던 세종대왕이 공부했다는 '산학계몽'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조선판 수학의 정석이었고, 산학자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를 때도 이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문제를 풀었죠.

아주 고차원적인 수학책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앵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는데, 한 가지를 볼까요?

바로 <구장산술>이라고 하는 책 중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뽑아 오셨어요.

닭과 토끼가 모두 100마리 있는데 다리의 합은 272이다.

그렇다면 토끼와 닭은 각각 몇 마리일까?

음, 일단 토끼 다리가 4개이고, 닭이 2개죠.

방정식 같긴 한데(어떤 건가요?)

[인터뷰]
네, 방정식이에요.

여러분들도 이미 다 대학을 졸업하셔서 아주 높은 수준의 수학을 풀었지만, 이것을 실생활에 갑자기 적용하려니 적용이 잘 안 되죠.

일단 말했듯이 토끼의 다리는 4개고, 닭의 다리는 2개이고, 그런데 여기서 답은 토끼는 36마리이고, 닭은 64마리에요.

이것을 어떻게 풀었나 하면 토끼 다리 4개를 가지고 전체 100을 곱하면 400이 나오잖아요.

그럼 그 400에서 닭의 다리 곱하기 나머지를 뺀 수를 하면 그 숫자가 나와요.

그 숫자를 가지고 전체 총수에서 나머지 숫자를 빼게 되면 토끼 다리와 닭의 다리가 나오는, 그래서 실제로는 방정식만 대입하면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젠데, 그냥 막상 저런 문제를 들이대면 '아,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하는 고민이 생길 수도 있죠.

[앵커]
이게 X+Y= 100이고, 4X+2Y= 272, 이렇게 하면 쉬운데, 말로 풀어서 하려니 헷갈리네요.

[인터뷰]
그런데 이것을 당시 조선은 조선식으로 이 문제를 보면 문제가 나오고 답이 딱 나오고 그 밑에 풀잇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풀잇법으로 공부하는 법들을 익혔었던 거죠.

[앵커]
하나 더 있는데, 살펴볼까요?

시집간 큰딸은 7일에 한 번 오고 둘째 딸은 5일에 한 번 오고 막내딸은 3일에 한 번 온다면, 세 딸은 며칠 만에 만날 수 있을까?

이건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인터뷰]
이건 어떻게 풀까요. 이건 갑자기 풀려고 하니까 갑자기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지고 뭔가 표를 늘어놓고 3일 단위, 5일 단위, 7일 단위로 한참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것은 뭐냐면 최소 공배수를 구하는 문제인 거예요.

이건 7x5x3을 하면, 딱 답이 나오는, 이것도 사실 초등학교 문제 정도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상당히 쉬운 문제였었고, 그 외에 수학책들을 보고 있으면 토목 공사라든지 입체, 부피를 구하는 문제들도 많이 나왔었어요.

[앵커]
자, 이렇게 재밌는 문제를 풀어봤는데, 이게 조선 시대 때 나온 문제라고 하니까 참 흥미롭고요.

특히 우리가 조선 시대 수학에 대해 탐구하고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뭐라고 꼽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우선 사실 지금 현대에도 수학을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쓸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어떤 드라마를 봤는데, 현대의 고3 여학생이 타임슬립을 해서 세종대왕을 만나서 구구단을 알려주고 원주율 구하는 법을 알려줘서 세종이 이렇게 과학을 일으켰다는 내용을 보고서 상당히 깜짝 놀랐어요.

구구단 같은 경우는 이미 조선에도 있었고, 그전 중국 한나라 때에도 있었던 기록이 있고, 우리는 구구단을 외우고 있지만, 조선에는 구구단 외에도 구기법 또는 구귀구결이라고 하는 나눗셈하는 것을 외워서 수학 공식으로 다 이용했었거든요.

그래서 구구구결 또는 구귀구결이라고 해서 노래처럼 외워서 하는 것들이 당연히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그럼 인문 중심의 사회였었고, 이런 자연과학들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고, 이런 수학은 현대, 서양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수학을 너무 모른 체 폄하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수학적인 노력, 이런 것들을 현대에도 잘 알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앵커]
네, 알겠습니다. 조선의 수학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 성균관대학교 안나미 교수와 함께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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