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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 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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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017-09-13 16:36
■ 김승필 / '택시운전사' 실존 인물 故 김사복 씨 장남

앵커

1980년 5월 18일 당시 외부에 알려졌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세상에 알리는 데 일조한 외지인이 있었습니다. 독일 기자 힌츠페터 씨와 함께 또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입니다. 가슴에 묻었던 그날의 기억,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사연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존 인물이죠, 고 김사복 씨의 첫째아들입니다. 김승필 씨를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상암동까지 멀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출연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반갑습니다.

앵커

요즘 이 영화가 관객수가 1200만 명이 넘어가면서 관심이 계속 수그러들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사복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으신가요?

[인터뷰]
달라진 거 없습니다.

앵커

주변에서 많이 알아보시고 얘기를 듣고 싶어하고 그럴 것 같은데요.

[인터뷰]
주변에서 제가 방송 출연하니까 그 부분은 매우 흥미로워하시고요. 조금 달라졌다고 하는 부분은 광주에 계시는 분들이 저의 아버님이 광주항쟁에서 그런 일을 경험하고 오셨으니까 저는 이런이런 일들이 있었다, 이러고 저한테 많은 얘기를 하십니다, 요즘.

앵커

최근에는 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전 총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인터뷰]
그분이 영화를 제 바로 옆에서 같이 봤었는데요. 영화 내내 제 손을 잡아주시고 자주 우셨어요. 별다른 얘기는 없었고요. 저희 가족이 총리님하고 사진 찍은 거 기다리고 있으니까 같이 찍어줄 수 있냐고 그러니까 흔쾌히 승낙하시고 찍어서 가족한테 보냈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앵커

직접 영화를 보시면서는 가장 감정 이입이 됐던 장면이 특별히 있었을까요?

[인터뷰]
일단 제가 여섯 번을 봤습니다, 영화를. 첫 장면에서는 저희 광주항쟁 시에 저희 민족이 총에 맞고 죽는 장면. 거기서 눈물을 많이 흘렸죠. 두 번째 봤을 때는 아버님이 그런 식으로 해서 저희 가족을 챙기셨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참 많이 울었고요. 그렇습니다.

앵커

지금 영화 내용을 간략하게 말씀은 해 주셨습니다마는 실제로 영화를 보면 아버지 김사복 씨가 힌츠페터 기자와 함께 광주에 어렵게 들어가고 또 나오는 과정이 묘사가 돼 있습니다. 화면 중에 저는 좀 기억에 남는 게 김사복 씨가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요. 온갖 어려움을 겪는 그런 장면이 참 인상에 남았는데 실제로 아버지께서 그런 일을 겪으셨는지 얘기를 좀 들은 게 있으십니까?

[인터뷰]
그런 얘기는 들은 바 없고요. 아버님이 무사할 수 있었던 그 원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힌츠페터 씨하고 음향 담당 기자인 루머 씨하고 두 분이 들어가셨는데요. 원래는 그분의 상사 크레입스라고 하는 기자분이 계셨었어요. 그 기자분이 우리 쪽 그 당시 군부 정부에 많이 노출돼 계신 분이어서 그분이 들어오지 못하시는 경우가 되었고요. 그래서 두 분이 들어오시면서 신분을 숨기고 들어오신 거죠. 그러면서 저희 아버님도 어떻게 보면 신분이 노출이 되지 않은 그런 경우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사실 군부로부터는 많은 어떤 피해는 없었던 걸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님께서 광주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셨나요?

[인터뷰]
그럼요. 광주 다녀오시고 나서는 첫날 저희 어머니하고 동생하고 저하고 앞에 같은 민족을 이렇게 죽일 수 있나라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얘기를 시작하시게 된 거고요. 다음 날부터는 장남인 저한테 자세한 얘기들을 많이 해 주셨죠.

앵커

그 당시에 대학생이셨던 거죠?

[인터뷰]
네, 대학생이었습니다.

앵커

그러면 기억을 더듬어보면요.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힌츠페터 씨를 아버지와 같이 만난 적이 있으셨던가요?

[인터뷰]
이후는 뵙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광주항쟁 이후에 4년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간암으로. 그 안에 힌츠페터 씨가 한 번 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는 서로 스케줄이 안 맞았는지 뵙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광주에서 촬영해 온 영상을 아버지와 함께 보신 적은 있으시죠?

[인터뷰]
있죠. 그러니까 아까 말씀을 잇자면 이후부터는 장남인 저한테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시고 그리고는 그 2, 3일 후인가 저를 광화문 근처에 있는 외신센터로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힌츠페터 씨가 찍은 VTR을 그때 당시에 독일 기자분들하고 NHK 기자분들, 아버님, 저하고 그렇게 같이 봤었죠.

앵커

독일 기자분이라든가 다른 외신 기자분들과의 만남, 교류가 사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뭔가 쉽지는 않은 일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분위기가 어땠나요?

[인터뷰]
저희 아버님은 그 전부터 외신 기자분들하고의 거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을 알고 계셨고요. 저는 그 시절부터 그야말로 보도되지 않은 그런 내용들을 제가 많이 알고 지냈었죠. 그러면서 저도 외신기자분들을 많이 알고 지냈고요.

앵커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사진 공개하신 것도 그렇고요. 그 이전부터 5.18 민주화운동 이전부터 다 알고 지냈던 그런 사이였던 거죠?

[인터뷰]
그렇죠. 다 알고 지냈던 사이죠.

앵커

어떻게 하다가 힌츠페터 씨와 연락이 끊기게 됐나요?

[인터뷰]
그거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버님이 광주항쟁 이후에 불과 4년 만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힌츠페터 씨가 오셔서 한번 제가 듣기로는 광화문에서 어떤 데모가 있었는데 그때 촬영을 나가셨다가 경찰들한테 곤봉으로 맞고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리고는 그 이후의 소식은 없는 것으로 봐서는 그때 이후에 아마 안 들어오셨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후에 들어오셔서 찾은 걸로 아는데 그 당시는 또 불행히도 저희가 집을 옮기면서 전화번호가 바뀌었어요. 그래서 아마 찾지 못하셨지 않았나 이렇게 인식이 됩니다.

앵커

다시 만나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물론 직접 아버지와 힌츠페터 씨가 대면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요. 그러면 힌츠페터 씨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함께 경험하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이전에 함석헌 선생과 아버님이 찍은 그 사진이 공개가 되기도 했고요. 이것도 힌츠페터 씨와 인터뷰를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알려졌더라고요. 그런 활동 이력을 보면 아버지께서 그 당시에도 민주주의의 중요성이라든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인지를 하고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셨나요?

[인터뷰]
저희 아버님은 인권주의자였어요. 저희를 교육도 그런 식으로 하셨고요. 그래서 상대를 배려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섬세하게 교육을 하셨고요. 그리고 그런 종류의 책도 아버님이 많이 보셨고 이번에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내용이 하나가 있는데요. 아버님이 읽으셨던 책 책갈피 안에 그때 당시에 신문에 나온 스크랩을 하나 해 놓으신 게 있더라고요. 그 내용이 인권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아버님의 철학들이 이번에 광주에 가서 소신으로 보여지지 않았느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교육 철학이 남달랐던 것 같은데 우등생이셨던 아버님의 장남으로서 학창시절에 어느 정도 부담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많았죠. 저희 아버님이 고모님 슬하에서 자라나셨는데 늘 고모님 자랑은 아버님께서 전교에서 2등을 안 해 보셨다. 매번 1등만 하셨다고 하셨어요. 저희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많이 부담스러웠죠.

앵커

그런 아버님한테 여러 가지 인권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 한편으로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제서야 나타났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을 하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
그거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가사가 많이 기울었었어요. 그리고 저는 장남으로 가정을 이끌고 열심히 살았던 거죠. 그간에 그런 사실에 대한 부분을 잊고 살았고요.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정말 그간의 부끄러운 침묵이 깨진 거죠. 이제는 아버님이 어떠한 소신으로 어떤 일을 하셨구나, 그간의 아버님이 존경스럽고 정말 선하신 분 이런 대체적인 좋아하는 아버님으로만 생각했던 아버님을 이제는 그 당시에 어떠한 마음으로 지내셨구나 이렇게 좀더 섬세하게 아버님을 생각하는 그런 어떤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를 보고 난 후에요.

앵커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기회가 됐다,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걸로 이해가 되는데요. 앞으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역할을 했던 분들의 얘기를 드러내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벌써 동참하겠다는 분들이 계시다고요?

[인터뷰]
네, 제가 아버님 소신을 이어서 아들 된 도리를 하자는 것이 그야말로 제2의 김사복 씨, 제3의 김사복 씨를 찾아내야 되는 건 아닌가. 그래서 광주항쟁 때 돌아가신 많은 분들,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까 싶습니다.

앵커

앞으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또 널리 알릴 수 있는 그런 역할을 계속 하시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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