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의출발새아침] "친서의 역사, 격동의 한반도와 정상외교"

[김호성의출발새아침] "친서의 역사, 격동의 한반도와 정상외교"

2018.06.07. 오후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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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의출발새아침] "친서의 역사, 격동의 한반도와 정상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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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역사와 뉴스가 만났을 때’

□ 방송일시 : 2018년 6월 7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북미정상회담까지 이제 남은 시간이 닷샙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요. 종전선언까지 거론되는 등 여러 가지 평화 분위기가 물씬 풍겨지고 있죠. 이런 가운데 최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가 많은 주목을 받았어요. 그래서 오늘은 <역사와 뉴스가 만났을 때>에 아주 굉장히 적절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은데요. ‘친서 외교’ 이게 과거에도 보면 친서를 통한 외교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으시지 않겠어요. 출발 새아침의 역사 선생님이죠.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모시고 이 이야기 한 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김영철 부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한테 친서를 전하는데 아주 큰 봉투,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이었어요. 미국 언론들은 이것을 ‘Giant letter’, 이렇게까지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요. 예전에도 이런 친서가 있었겠죠?

◆ 전우용: 친서라고 부르진 않았죠. 격식을 많이 따지던 조선시대 같은 경우 보내는 편지의 이름들이 다 달랐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보내는 문서, 친서는 ‘칙서’라고 했고요. 우리가 중국에 보내는 친서는 ‘국서’라고 했습니다. 또 중국에서 대마도주를 대행시켜서 우리나라에 보내는 문서, 또 그 답서는 ‘서계’라고 불렀고요. 직접 쇼군에게 보내는 문서가 있을 경우에는 또 ‘국서’라고 불렀고, 용어가 다 달랐죠.

◇ 김호성: 그런데 이게 과거에도 이렇게 큰 봉투에 담아서 보냈을까요?

◆ 전우용: 그러진 않았죠. 일단 국서나 칙서 같은 경우에는 일단 크죠. 종이가 크고 글씨도 크고. 종이 크기도 정해져 있고요. 정해진 크기에 글씨를 한 행에 몇 자를 써야 하는 지까지도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 봉투보다는 훨씬 컸는데, 지금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보낸 친서 같은 그런 봉투에 담지는 않았죠.

◇ 김호성: 과거에는 친서, 국서 이런 것들을 누가 들고 갔습니까?

◆ 전우용: 그걸 담당하는 사람들이 사신이죠.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칙사고요. 우리도 여기서 국서를 봉정해가는 사람들이 사신이라고 해서 정사, 부사, 서장관 이렇게 이름들을 다 붙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에 가는 사신은 통신사고,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천추사·성절사·동지사 여러 가지 이름을 붙입니다만, 대표 사신이 가지고 가는 건데요. 사신이 왕래하던 시절의 사신이 상주하는 시절로 바뀌면서 이름이 바뀌었던 거죠. 그러니까 국서를 봉정해가는 사신이 왔다갔다하는데, 상주 사신이 되면 그 이름을 처음에는 공사라고 불렀고요. 그게 지금의 대사로 바뀐 거고요.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 김호성: 친서하고 하면 친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뭔가 서명이 있어야 하잖아요. 도장이 찍혀 있다든가, 그런 것들은 어떤 식으로?

◆ 전우용: 도장이죠. 도장인데 도장도 역시 등급에 따라 달랐어요. 황제의 도장은 ‘새’, 왕의 도장은 ‘보’, 제호의 도장은 ‘장’, 그 밖의 도장은 ‘인’ 지금 우리가 인장 그러잖아요. 이건 일반 관원과 제호의 도장을 합쳐서 ‘인장’이라고 하고요. 그 위에 황제의 도장, 옥새라고 부르는 것은 황제의 도장에만 붙이는 이름이에요. 우리나라에는 198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 옥새가 없었고 조선국왕지보라고 하는 보를 찍었죠.

◇ 김호성: 그러면 옥새로 명명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자면 고종황제 이렇게 될 때인가요?

◆ 전우용: 그렇죠. 그때 처음으로 우리가 대한국새, 황제어새라고 하는 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옥새라고 하는 것도요. 그냥 아무 도장이나 옥새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만드는 재질이 정해져 있어요. 이건 굉장히 중국에서도 재밌는 사실이에요. 진시황이 화씨벽이라는 아주 희귀한 옥을 얻었답니다. 거기다가 자기 황제의 도장을 새겼던 것이죠. 그래서 그걸 옥새라고 불렀고 전국옥새라고 해서 황제가 바뀌어도 계속 그 옥새를 썼어요. 언제까지 썼느냐면 진시황이 기원전 200 몇 십 년 정도, BC 3세기에 황제가 된 사람인데 기원 후 10세기까지 1300년간 중국에서 이걸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써왔어요. 그러니까 이게 한나라로 넘어갔다가 삼국지에서 유명한 원술, 조조 이런 사람들에게 넘어갔다가 10세기에 오대 십국 시대 그때 분실됐다고 해요. 만약 지금 그 물건이 골동품 시장에 나온다면 아마 역사상 최고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호성: 그렇군요. 연장선상에서 궁금한 질문 몇 개 드릴게요. 2009년이었나요. 그때 정조가 당시 정적이었던 심환지와 나눈 비밀 편지가 공개됐잖아요. 이게 왕이 보낸 편지이지 않겠어요. 이런 이야기, 내용에 어떤 것이 담겨 있었을까, 저는 그게 참 궁금하더라고요.

◆ 전우용: 그런데 이건 사실 국서랑은 전혀 관계가 없죠. 국서가 아니라 왕과, 겉으로 보기에는 정조와 가장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론 벽파의 영수 사이의 비밀 편지가 300통 가까이 오갔다는 이야기로, 밝혀진 지 얼마 안 된 이야기죠. 그동안에는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많이 돌고 있었는데 이 편지가 공개됨으로써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죠. 그런데 편지 내용은 쉽게 말하면 조정에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있는데, 공식적으로 사람들 보는 데서 했던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본마음은 그게 아니었다는 둥. 아니면 정말 친구처럼, 그것도 막말하는 친구처럼 썼던 내용들이 밝혀져서 정치라는 것이 표면과 이면이 다르다.

◇ 김호성: 왕의 굉장히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나 있겠어요.

◆ 전우용: 그걸 인간적인 면모라고 봐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그 편지가 만약 당대에 공개됐다면 왕이 체모를 잃어도 너무 잃었다, 이런 비난을 받았겠죠. 욕설도 섞고 그런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국사가 아니고 그야말로 정치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신, 왕도 사신을 썼다는 증거가 될 것 같고요. 국서 사건으로서 굉장히 중요했던 사건들은 따로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왕조가 건립된 다음에 태종 때 중국 주원장 일대기, 주원장 시절 정치사를 정리했던 중국 세조실록, 우리나라 세조실록이 아니고, 그 세조실록과 중국의 법률인 대명회전이라고 하는 책이 수입됐는데 거기에 조선왕조의 태조인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돼 있는 거예요. 조선 정부에서는 이걸 놔둘 수 없죠. 자기 왕조의 조상이 바뀌었으니까 이걸 바로잡기 위한 일종의 시도를 종계변무라고 했어요. 이걸 얼마나, 국서를 200년간 보냈어요. 바꿔 달라. 조선에서 계속 중국에 보내는 국서는 대개 그거였어요. 200년 동안 우리 조상이 잘못 기록돼 있다, 바꿔 달라. 그런데 알면서도 안 바꿔줬어요. 이걸 선조 때 가서 바꿔주는 바람에, 200년이나 지나서 바꿔주는 바람에, 임진왜란 직전에. 이걸 바뀌었다는 걸 자축하는 의미에서 선조가 대사령을 내리고 종묘에 고하고 잔치를 베풀고, 또 이걸 바꾼 책을 새로 교정본을 가지고 칙사가 왔을 때는 직접 영은문까지 나가서 맞아들이고, 이런 큰 사건이 있었고요. 그다음에 강화도조약 체결할 무렵에는 일본에서 국서가 왔는데 일본의 국서가 그전에 대마도 도주를 통해서 보내왔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 도장도 주고 서식도 정해줬어요. 그런데 일본이 그동안 막부 체제를 청산하고 대정봉환이라고 해서 소위 일본의 천황 정권을 천황이 잡았다, 메이지 유신을 시행했다는 걸 알리는 편지가 왔는데 그동안 조선 정부하고 익숙했던 편지의 양식하고는 전혀 달랐던 거죠. 게다가 자기들이 우리는 천황이고 너희는 왕이다, 라는 식으로 등급도 낮춰버려서 이때 대원군이 이걸 접수를 거부합니다. 이건 받을 수 없다, 도로 가져가라. 이게 강화도조약,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죠.

◇ 김호성: 친서, 국서를 통한 정치 외교적인 과거의 상황도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박사님, 오늘 말씀 고맙고요. 오늘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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