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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야당의 대표선거 대결 구도가 확정됐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 의원 그리고 참여정부, 노무현 정부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의원, 두 사람의 양강구도로 확정된 겁니다.
두 사람이 공통점이 많습니다.
먼저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초 처음 임기 시작할 때 그때 청와대 공보수석, 그리고 임기 마칠 때는 대통령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문재인 의원,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 청와대 민정수석, 그리고 역시 임기 마칠 때는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엇갈리기 시작합니다.
박지원 의원은 참여정부 출범한 직후에 대북 송금특검이 실시되면서 구속되고 복역을 했습니다.
그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바로 문재인 의원이었습니다.
민정수석은 검찰과 연계되어 있는 검찰과 업무소통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북 소통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이 계속해서 참여정부 때는 엇갈립니다.
열린우리당이 창당을 하면서 문재인 의원은 그 당시에 당을 창당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쨌건 문재인 의원, 열린우리당 창당은 참여정부의 과오다라고 호남에서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2년 때선 때 호남에서 사과를 한 겁니다.
박지원 의원은 열린우리당에 입당조차 하지를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무소속으로 일단 총선에서 복귀를 했고, 그다음에는 민주당에 입당을 해서 민주당 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2월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한 번 엇갈립니다.
이때가 바로 민주당의 대표로 박지원 의원이 유력했을 때입니다.
손학규 대선주자 그리고 본인은 당권 이렇게 역할분담이 돼서 2012년 대선을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손학규 대표가 친노세력과의 통합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때 문재인 의원은 친노대표 세력 중의 한 사람으로 화려하게 민주통합당을 창당을 하면서 복귀를 합니다.
박지원 대표는 당시 대표가 유력했습니다마는 4위로 턱걸이하면서 최고위원에 가까스로 최고위원이 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직후 2012년 4월에 친노 독식으로 간다면 나도 대권 출마를 고려하겠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게 저희가 방송에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 쓰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이보다 좀더 격한 언사를 쓰면서 친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이박 연대, 이해찬, 박지원 원내대표, 이렇게 역할분담을 하면서 일종의 타협을 선택합니다.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 원내대표 자리에 오르고 그다음에는 문재인 후보의 대선을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 두 사람, 이제 마지막으로 2015년 1월, 다음 달에 2016년 총선 공천권을 쥔 당대표를 놓고 최후의 일전을 이제 벌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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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대표선거 대결 구도가 확정됐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 의원 그리고 참여정부, 노무현 정부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의원, 두 사람의 양강구도로 확정된 겁니다.
두 사람이 공통점이 많습니다.
먼저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초 처음 임기 시작할 때 그때 청와대 공보수석, 그리고 임기 마칠 때는 대통령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문재인 의원,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 청와대 민정수석, 그리고 역시 임기 마칠 때는 청와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엇갈리기 시작합니다.
박지원 의원은 참여정부 출범한 직후에 대북 송금특검이 실시되면서 구속되고 복역을 했습니다.
그때 청와대 민정수석이 바로 문재인 의원이었습니다.
민정수석은 검찰과 연계되어 있는 검찰과 업무소통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북 소통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이 계속해서 참여정부 때는 엇갈립니다.
열린우리당이 창당을 하면서 문재인 의원은 그 당시에 당을 창당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어쨌건 문재인 의원, 열린우리당 창당은 참여정부의 과오다라고 호남에서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2년 때선 때 호남에서 사과를 한 겁니다.
박지원 의원은 열린우리당에 입당조차 하지를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무소속으로 일단 총선에서 복귀를 했고, 그다음에는 민주당에 입당을 해서 민주당 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2월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한 번 엇갈립니다.
이때가 바로 민주당의 대표로 박지원 의원이 유력했을 때입니다.
손학규 대선주자 그리고 본인은 당권 이렇게 역할분담이 돼서 2012년 대선을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손학규 대표가 친노세력과의 통합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때 문재인 의원은 친노대표 세력 중의 한 사람으로 화려하게 민주통합당을 창당을 하면서 복귀를 합니다.
박지원 대표는 당시 대표가 유력했습니다마는 4위로 턱걸이하면서 최고위원에 가까스로 최고위원이 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직후 2012년 4월에 친노 독식으로 간다면 나도 대권 출마를 고려하겠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게 저희가 방송에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 쓰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이보다 좀더 격한 언사를 쓰면서 친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이박 연대, 이해찬, 박지원 원내대표, 이렇게 역할분담을 하면서 일종의 타협을 선택합니다.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 원내대표 자리에 오르고 그다음에는 문재인 후보의 대선을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 두 사람, 이제 마지막으로 2015년 1월, 다음 달에 2016년 총선 공천권을 쥔 당대표를 놓고 최후의 일전을 이제 벌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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