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연평해전, 북 사상자 130여 명

제1차 연평해전, 북 사상자 130여 명

2014.11.24. 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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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어제가 연평도 포격도발 4주기 되는 날이었고, 1999년 6월 제1차 연평해전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더군다나 햇볕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있었던 도발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교전이 또 이루어졌었던 것이기 때문에 충격이 컸습니다.

그당시 합참의장이었던 김진호 예비역 대장이 자서전을 냈습니다.

저희가 김진호 전 합참의장을 오늘 초대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죠?

[인터뷰]

건강합니다.

[앵커]

자서전 내셨다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제목이 군인 김진호,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무슨 뜻으로 군인 김진호, 이렇게 하신 건가요?

[인터뷰]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군생활을 통해서 얻은 그러한 경험들이 후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한번 마련해 볼까 하는 그런 생각에서 썼습니다.

[앵커]

대장님께서는 ROTC 출신이시고, 합참의장을 ROTC 출신이 한 것이 처음이었던가요?

[인터뷰]

처음입니다, 아직까지는요.

[앵커]

그때 제1연평해전이 1999년에 일어났을 때 남북이 이렇게 교전을 한 것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 전에는 6.25전쟁 이후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인터뷰]

6. 25 전쟁이 끝나고 휴전 이래에 정규군 간에 전투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비정규전, 쉽게 얘기하면 무장공비가 침투했다거나 또 잠수정이 은밀히 침투하는 것에 대한 대응작전은 했었지만 정규군 간의 전투는 이 전투가 처음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휴전 이후로 치면 46년 만에 이 전투가 벌어진 거 아니겠습니까, 정규군 간에...

그때 처음에 보고 받으셨을 때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그날이 6월 15일 아침에 국방장관 조성태 장관하고 NLL 침투하는 북한 경비정에 대한 대응방안에 대해서 검토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제 해군작전사령관이 전화를 해서 긴급보고 상황으로 교전이 있었던 것을 바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고 받을 때 그 상황이 어떤가 했더니 우리 아군 피해는 없다, 실제 적은 경비정 1척이 침몰되고 또 1척이 반침된 상태에서 퇴각 중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전쟁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큰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조그마한 전쟁이 그런 국지도발이 확전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바로 긴장한 상태에서 우리 한반도의 전시작전권을 통제하고 있는 연합사령관하고 바로 교신을 해서 그 대응책을 논의했었습니다.

[앵커]

그당시에 우리 군이 승전을 했고요, 북한은 20여 명이 전사하고 3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130여 명이, 그러니까 원래 알고 있었던 것보다 2배, 3배 가까이 북한이 더 피해가 많았다라고 자서전에 쓰셨던데요.

이것은 어떤 근거로 하신 겁니까?

[인터뷰]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이제 정확하게 숫자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도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30명에서 CNN 같은 경우에는 사상자가 한 100여 명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도를 했었습니다.

저희가 작전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정보통신을 통해서 파악을 하고 있었고 또 나중에 영상정보를 통해서 북한의 피해 상황을 저희가 종합했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당시에 130여 명이 사상자로 저희가 판단을 했습니다마는 전투가 일어난 이후에 그러한 사상자는 북한의 경우는 북한이 그런 발표를 하지 않는 한 저희가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준칙이기 때문에 저희가 발표를 하지 않아 왔습니다마는 지금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때의 기록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 맞다라고 해서 130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던 그 판단기록을 남겼던 겁니다.

[앵커]

그러니까 그것이 북한의 교신을 듣고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거죠?

[인터뷰]

북한의 교신과 그다음에 피해 입은 함정들에 대한 피해상황 또 나중에 정비고에서 정비하는 그런 여러 가지 영상정보를 종합했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북한이 스스로 피해가 많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은 서해연평해전이 6월 15일 일어난 이후에 7월 4일에서 10일 사이로 기억이 되는데 북경에서 우리나라 통일부 차관하고 북한의 차관이 차관급 회담이 있었습니다.

가서 회담이 결렬돼서 차관이 돌아왔는데 통일부 차관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통화해서 해서 의장님 어떻게 작전을 했기에 북한이 굉장히 격앙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저한테 얘기를 했어요.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회담장에 들어갔을 때 북한의 회담에 참여했던 요원들이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자기네 인민군에게 사상자를 안겨준 그런 폭도들하고 우리가 무슨 회담을 하겠느냐라고 박차고 나갔다는 겁니다.

그때의 북한의 태도로 봐서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그런 수준 이상의 피해가 있었다는 걸 저희가 간접적으로 또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앵커]

그때 통일부 차관이 누구였습니까?

[인터뷰]

양영식인가.

내 기억에는 1년 선배였던 분인데...

[앵커]

고등학교요?

[인터뷰]

아니, 대학교 1년 선배인데 그때 저한테 직접 전화를 했었어요.

[앵커]

그때 통일부 장관은요?

[인터뷰]

장관은 임동원 장관이었습니다.

[앵커]

임동원 장관, 그 당시에 의장님께서 임동원 장관을 만나셨을 때 군이 그렇게밖에 작전을 할 수 없었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말을 했었다라고 말씀을 하셨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인터뷰]

이제 제가 작전에 대한 결과보고를 했는데 그 작전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마 통일부 입장에서는 남북관계의 경색을 염려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군이 그렇게 강력하게 응징하는 그런 작전에 대해서 다소 심한 그런 표현을 했던 것이 그 당시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앵커]

그런 늬앙스를 느끼셨다는 거군요.

[인터뷰]

뉘앙스보다는 표현 자체가 그런 표현을 했었습니다.

[앵커]

1999년에 1차 해전이 있었고 2002년 또 6월에 그때도 2차 연평해전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우리가 피해가 많았었고요.

[인터뷰]

그때는 피해가 많았습니다.

[앵커]

왜 그런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터뷰]

2002년도는 제가 군에서 예편한 이후인데 북한이 그러한 많은 인원이 사상을 입는 참패를 당하고 아마 언젠가는 다시 보복하겠다는 또 6. 15 연평해전 이후에 몇 번 우리에게 보복성의 발언을 했었습니다.

했던 그런 보복성의 발언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예기치 못한 그런 작전을 그들이 감행한 게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우리 군은 잘 대비가 되어 있었습니까?

그당시 2002년에?

[인터뷰]

2002년은 제가 여기에서 그당시 작전 상황에 대해서 직접 지휘를 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군은 2002년이 됐든 그 이전이 됐든 언제든지 항상 북한의 그러한 무모한 도발에 대해서 대비를 해 왔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도 우리 군은 충분히 대비를 해 왔었을 것으로 믿습니다마는 그들의 기습적인 그런 공격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지 않았나, 이렇게 안타까운 생각입니다.

[앵커]

지금 이제는 군 문을 나서서 지금 보실 때 지금도 북한이 계속 도발 위협을 하고 있고, 실제로 도발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군이 거기에 언제든지 잘 대비해서 응전할 수 있는 그런 태세가 잘 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인터뷰]

저는 잘되어 있다고 봅니다.

지금 4년 전에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었는데 그 포격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 군은 교전 규칙에 의한 대응을 해 왔습니다.

거의 같은 수준의 대응을 해 왔는데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에 만약에 북한이 도발을 하면 우리는 자위권 차원에서 공격했던 원점을 타격함은 물론 그 타격을 명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휘부까지 타격하겠다라고 김관진 장관이 국민 앞에 공언을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대응 자세에 대해서 북한은 앞으로 그렇게 함부로 우리한테 도발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러한 우리 군의 대비개념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앵커]

우리가 화학전에 특히 대비를 잘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서요, 의장님?

[인터뷰]

그렇습니다.

북한이 지금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비대칭무기가 이제 핵무기, 장거리 미사일, 화학무기 등인데요.

핵무기라든가 이런 것은 아직 투발수단이라든가 이런 것이 단계까지 안 와 있다라고 본다면 가장 쉽게 우리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화학탄입니다.

화학탄이라는 게 제조가 쉽고, 제조비가 또 저렴하고요.

[앵커]

제조가 많이 되어 있습니까?

[인터뷰]

지금 한 우리가 흔히 판단하기로는 4, 5000톤의...

[앵커]

4, 500톤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화학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요.

우리는 세계화약금지조약에 들어가서 벌써 화학무기를 폐기한 지가 오래 됐는데 북한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앵커]

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떤 피해를 입는 건가요?

그걸 잘 모르거든요, 우리가.

[인터뷰]

우리가 몇 년 전에 일본에 사린가스가 지하철에서 노출됐던 것이 있었고, 아마 2006년도에 종로3가에서도 독가스가 새어나왔던 것이 기억이 될 겁니다.

그렇게 가스는 보이지 않는, 냄새가 나지 않는 그런 파괴력이 있는 무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현 단계에서요.

그들이 현재는 박격포 내지는 재래식 포에도 화학탄을 쏠 수 있는 그런 탄두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저희가 염려해야 할 화학물 중에 하나입니다.

[앵커]

의장님 퇴임하신 다음에 2001년부터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하셨죠.

그때 개성공단이 막 개발되고 할 때였는데 북한이 처음에 우리 합의했었던 토지개발비를 갑자기 몇 배를 달라고 했다는 게 이번에 자서전에 쓰신 내용이거든요.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인터뷰]

2003년 4월 말에 착공을 했습니다.

착공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다음에 최초로 땅값은 100만 평의 땅값은 1미터 평방씩 1불씩 주기로 했는데 그래서 100만평일 경우에 한 80억 됐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느 시점에 가서 저희가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땅값을 1200억을 요구했습니다.

[앵커]

1200억을요?

[인터뷰]

15배입니다.

[앵커]

원래 80억에 하기로 했었는데...

[인터뷰]

그래서 이제 어떤 특별한 근거가 없는데 저희가 추측하기에는 그 당시에 우리 국내에서는 개성공단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언론이라든가 정치권이라든가, 이런 데서 굉장히 사업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이 되다 보니까 북한에서는 이거 원래는 땅값을 주지 않는 걸로 했다가 이제 기본적으로 그래도 형식을 갖춰야 된다라고 해서 했던 건데 그거는 그냥 너무...

[앵커]

아까웠군요, 생각해 보니까...

[인터뷰]

싸게 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던지 느닷없이 요구를 해서 한 6개월 동안 이 사업이 한발도 진전하지 못하고 또 정부는 정부대로 빨리 추진을 해야 되는데 토지공사에서 이 땅값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업이 추진 안 된다라는 것 때문에 굉장히 저희가 힘들게 이 사업이 추진됐던 적이 있습니다.

[앵커]

군 출신 사장을 보냈더니 빡빡하게 해서 사업이 안 된다, 그런 얘기 많이 들으셨겠는데요, 그때.

[인터뷰]

그때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국가정보기관의 한쪽에서는 토지공사 입장에서 1200억이 많은 거냐.

여태까지 이 사업이 추진됐는데 지금 와서 더 이상 진행이 안 되면 이것이 어떤 남북간에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강한 요구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러나 마지막에 하여간 청와대에서 대책회의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에 대통령께서...

[앵커]

노무현 대통령이죠.

[인터뷰]

토지공사의 논리가 맞다.

이거는 경제적인 논리로 가야지 이게 정책이나 정치적인 논리로 이 사업을 가다보면 앞으로 2단계, 3단계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에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맞다라고 그렇게 정부에서도 판단을 했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그때 경제논리로 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셨고 대통령이 그걸 최종적으로 손을 들어줬군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1200억 주고 빨리 하는 게 좋다는 입장이었고요.

[인터뷰]

하자고 그때 그렇게 요구를 했었습니다.

[앵커]

어떻게 됐습니까, 최종적으로?

[인터뷰]

최종적으로 저희가 1600만불, 160억에 합의를 하고요.

그중에 120억은 현찰로 주고 40억은 거기에 건물을 지어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됐었습니다.

[앵커]

160억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인데 1200억 줄 뻔했군요, 자칫하면....

[인터뷰]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작년도에 개성공단의 폐쇄 문제가 작년에 남북 간에 핫이슈가 됐었는데 우리 정부가 대응할 때 그러한 원칙을 가지고 끝까지 작년에 대응을 했습니다.

따라서 북한하고의 어떤 협상이라는 것은 기본원칙을 준수해 가면서 정책이 추진이 돼야지 일정기간 서로 하다가, 예를 들어서 5. 24조치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제가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5. 24 대북 제재 조치를 일부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에서 풀어야 된다라는 그런 논리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도 국가기관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정책적인 여러 가지 대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는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는 쪽에서 한다고 보면 아무리 그렇게 일방적으로 떼를 쓰는 북한도 아마 저희가 원하는 그런 방향으로 정책 유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1999년 제1연평해전 당시의 합참의장 김진호 전 합참의장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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