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거사, 육삼정 의거와 원심창 의사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미완의 거사, 육삼정 의거와 원심창 의사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2020.03.05. 오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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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열도 독립운동가들의 행적 찾기.”
항일 독립 운동은 식민지 조선과 중국을 주요 무대로 이뤄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 일본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들의 행적을 찾아 나섭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열도 독립운동가들의 행적 찾기.
일본과 한국.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족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

■내레이션: 배우 박정민

④ 미완의 거사, 육삼정 의거와 원심창 의사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1933년, 일군의 조선인 청년들이 중국의 상하이에서 일본 공사를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모의합니다.

그러나 작전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외 3대 의거 가운데 하나인 ‘육삼정 의거'입니다.

[PD : 육삼정 의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이봉창 윤봉길 사건에 더불어서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해외 3대 독립 의거입니다.]

[PD : 육삼정 의거 지도를 보여주십시오.]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네. 그래서 이거 보시면 육삼정 의거가 처음에 일어났을 때 보도 기록인데 여기가 육삼정이고요. 이 사람들이 송광춘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만나서 이게 무창로인데요. 이렇게 이동해서 여기에서 대기하다가 붙들려서 세 명이 체포돼서 갑니다. 일본 경찰이 압수했던 당시 무기류입니다. 보시면 이거랑 이게 같은 건데 가운데 이게 도시락 폭탄입니다. 1932년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썼던 도시락 폭탄 그것과 동일한 것인데 제가 들은 기록에 의하면 도시락 폭탄이 두 개가 준비가 됐는데 윤봉길 때 하나 쓰고 남겨둔 도시락입니다. 사실 동일한 거죠.]

당시 작전을 모의했다가 체포된 흑색공포단의 단원들은 모두 일본으로 압송됐는데요.

주동자였던 원심창 의사는 재판을 받은 뒤 나가사키 형무소의 독방에 갇혔습니다.

지금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자 폭탄이 투하된 장소라는 걸 기리는 평화 공원으로 조성돼 관광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수많은 조선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형무소였다는 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까요?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여기가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형무지소 자리입니다. 여기가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육삼정 의거를 하였던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이 세 분이 압송되었던 자리입니다. (원폭 투하) 당시 원심창 의사가 독방에 있다가 다른 데로 이감이 되면서 목숨을 구명할 수 있었고요. 원심창의 경우에는 가고시마 형무소에서 1945년 10월 10일에 출옥하여서 자유의 몸이 됩니다. 만약에 여기 계셨으면 당연히 돌아가셨을 테고 원자 폭탄 떨어졌을 때 여기 형무소에 조선인들이 있었다. 조선인 최소한 13명인데 13명이라는 게 정말 제일 작은 숫자 확인된 게 13명이고 그 이상이라는 거죠. 폭탄이 떨어졌을 때 형태가 없을 정도의 폭격을 맞은 거잖아요. 독립운동하셨던 분들 그리고 민족 지사들이 여기에 수감되어 있던 것도 독립운동의 하나의 흔적인데 상하이에도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있다고 하고 여순감옥 하와이까지도 이렇게 가는데 왜 일제의 본산이었던 일본 땅에서의 독립운동 민족 지사들이 이렇게 조명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이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들어와서 이 장소가 한국의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이 갇혀 있다가 죽었다, 이런 것에 대한 조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 놀라웠고 정말 애석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 한국 정부 그리고 본국에 계신 분들이 각성을 하여서 나가사키에 오실 때는 반드시 여기에서 그 선열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찾아보고 공부하고 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원폭에서 간신히 목숨을 거진 원심창 의사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박열과 함께 민단을 설립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 운동에 이어 통일 운동에 앞장 섰던 원심창 의사는 재일동포을 위한 신문, 통일일보를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강창만 / 통일일보 사장 : 통일일보 창간호입니다 1959년 1월 1일 자로 조국에 평화통일의 완수를 위하여 민족의 총력을 기울이자 하는 결집하자 해서 우리 재일동포에게 고한다. 창간에 지금 하여. 이런 제목으로 제1호가 나옵니다. 원심창 선생님이 아주 특이한 건 독립운동하셨다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리가 독립을 한다는 것은 통일이 완수돼야 통일이 된다, 이런 취지에서 이 통일 운동에 같이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1959년 1월 1일에 창간하게 되면서 그전에 일본으로 오신 이영근 선생님과 합류해서 이 신문을 만들게 됐습니다. 조국이 평화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민족의 총력을 기울이자. 결집하자.]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바로 여기가 의사 원심창 지묘입니다. 그분이 한국 전쟁 때 11대 12대 민단 중앙 단장을 하셨고 그 파병을 할 때 사람들 청년 학생들을 모으는 데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12대 단장을 하실 때는 전쟁의 피해자들을 돕는 조직체를 만들어요. 민단 안에. 그런 운동을 하셨는데 어찌 됐건 본인 때문에 선량한 청년들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돌아가실 때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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