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길소뜸'

[한국영화 걸작선] '길소뜸'

2018.10.05. 오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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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남북간 화해 모드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한번 이산가족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 가족 뿐 아니라 대한민국 안에도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이 적지 않았죠.

바로 이런 문제를 한국영화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있는데요.

임권택 감독의 1985년작 '길소뜸'입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1983년 KBS가 대대적인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했죠.

영화 '길소뜸'은 바로 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인 화영 역시 가족들이 모두 잠든 사이 밤늦게까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주시합니다.

화영은 어느새 어린 시절의 상황을 떠올립니다.

간도로 이주했다가 해방 직후 고향인 평안도 길소뜸으로 돌아온 중학생 화영과 가족들.

하지만 귀향의 기쁨도 잠시.

화영: 엄마, 아빠, 어디 가! 죽지 마!

가족들은 전염병으로 모두 목숨을 잃고, 홀로 남은 화영은 아버지의 친구 집에 양녀로 들어갑니다.

동진 부: 이제부터는 우리가 네 아버지고 어머니이며 너희 둘은 오누이 간이다.

하지만 화영은 같은 집 동진과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죠.

동진: 이래선 안 된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화영이 네가 자꾸만 좋아진다.
화영: 나도 그동안 오빠가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

이렇게 선을 넘어 버린 두 사람은 결국 아이를 가지고 마는데요.

동진 부: 임신 3개월이라니! 이런 못된 것들이 있나. 집안 망신도 유분수지, 이런 망측한 일이 어딨냔 말이야.

화영은 아이를 낳기 위해 춘천에 있는 친척 집으로 향하는데요.

그런데 그만, 동진과 화영에게 이건 영영 생이별이 되고 말았죠.

동진은 동진대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고, 화영은 아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반백의 나이가 된 두 사람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한창인 방송국 앞에서 재회합니다.

동진: 살아 있었구려. 이렇게 허망하게 만나는 것을 33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려.

그 사이 각자의 가족을 꾸린 두 사람은 그동안의 굴곡 많았던 삶에 대해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전쟁통에 잃어버린 둘 사이의 아들을 찾으러 나서기로 하죠.

아들로 추정되는 사람이 춘천에 살고 있다는 걸 방송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동진: 내일 춘천에 가시겠소?나도 가보고 싶소만.
화영: 같이 가시죠.

드디어!

동진: 방송을 보고 왔습니다만.
석철: 테레비 보고 왔어요?

첫 만남에 묘한 기운이 흐르는 세 사람.

이 남자는 과연 두 사람의 친자가 맞을까요?

영화 '길소뜸'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개인들에게 남긴 상처, 그 가운데 이산이라는 상처에 주목하고 있는데요.

일제 강점기와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깊은 아픔을 남겼는지, 동진과 화영의 사연을 통해 형상화합니다.

하지만 영화 '길소뜸'은 이산가족이 다시 상봉의 기쁨을 누리는 전형적인 결말로 치닫지 않습니다.

영화 말미 의사로 등장한 최불암의 의미심장한 대사는, 그래서 더 큰 울림과 여운을 남기죠.

의사: 심지어 방송으로 친족임을 확인하고도 서로 찾지 않거나 찾아도 상봉을 피하거나 재회를 하고도 결합을 하지 않는 예를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분단 이후의 장기적인 이질화가 빚어낸 후유증이라고 생각해요.

시대가 빚어낸 한국적 한의 정서를 묵직하게 담아낸 영화, '길소뜸'이었습니다.

글/구성/출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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