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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걸작선 '바보선언'
Posted : 2018-09-1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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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에 의한 검열이 일상적인 시대, 많은 영화 감독들이 깊은 좌절에 빠져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 정신을 잃지 않은 감독들은 다른 방식으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었는데요.

풍자가 그 무기로 활용되기도 했죠.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은 대단히 실험적이고도 전위적인 방식으로 전두환 정권의 독재정치를 비판했습니다.

지금, 만나 보시죠.

영화 <바보 선언>은 영화 감독이 건물 옥상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연출자 이장호 감독이 직접 연기했는데요.

-감독: 레디 고!

감독은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당시 막 출범한 프로야구의 효과음이 나온 뒤 의미심장한 대사가 흐릅니다.

-활동사진 멸종위기

이 도입부는 이장호 감독이 시도했던 리얼리즘 영화들이 전두환 정권의 검열에 가로막힌 데 대한 좌절감을 선언적으로 드러냅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흐릅니다.

-어느 날 동칠이는 옥상에서 뛰어내린 영화감독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영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두 스포츠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역시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3S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죠.

영화 감독으로부터 시계와 돈을 탈취한 주인공 바보 동철은 길거리의 여성들의 치맛속을 몰래 구경하다가 엄청난 미인 혜영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동칠은 여자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결국 자동차 정비공 육덕과 공모해 혜영을 납치하기로 결심하죠.

하지만 혜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바보 동칠이와 육덕이는 납치된 혜영에게 그만 흠씬 두들겨 맞고 맙니다.

여기까지 보시면서 눈치 채셨겠지만, 이 영화의 초반부에는 인물들의 대사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장호 감독은 마치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같은 느낌으로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화면을 연출하는데요.

앞서 ‘활동사진 멸종위기’라고 선언한 것처럼, 영화이지만 영화이기를 자포자기한 듯한 치기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미리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 연출을 했습니다.

어쨌든 첫 번째 대사는 영화가 시작되고 35분이 지나고서야 처음 등장합니다.

여대생인 줄로만 알았던 혜영이 실은 매춘부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난 뒤.

-육덕: 그럼 가짜 대학생이라는 말이에요?
-혜영: 대학생이든 가짜든 너희들이 왜 신경 써? 너희들은 신경 쓸 거 없어
-동칠: 그런 줄도 모르고 꼭 부잣집 딸인 줄만 알았지

혜영이 덕에 배고픔을 모면한 동칠과 육덕은 그녀의 주선으로 집창촌에서 일하게 됩니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
미풍은 속삭인다. 불타는 눈동자

이 장면 역시 무성영화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거리에서 삶을 일구는 밑바닥 인생의 단면을 한 장의 풍속도처럼 포착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칠과 육덕은 시골에서 상경해 이곳에 속아서 들어오게 된 젊은 여성을 탈출시켰다가 곤혹을 치르게 됩니다.

-혜영: 비켜, 비켜, 비켜! 이리 나와. 나와, 나와!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해변을 찾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소박하나마 자유롭고도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곧 돈이 떨어지고, 혜영은 별 수 없이 또 다시 매춘의 길로 접어들죠.

-혜영: 돈도 다 떨어지고 장사 다시 시작해야겠다. 배운 게 그것 뿐인데 별 수 없이 또 손님 상대해야지

이걸 계기로 세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되죠.

영화 <바보선언>은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 실험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시대의 창작자로서 대담하게도 영화의 종말을 선언한 이장호 감독은 오히려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빼어난 수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좌절의 힘을 동원해 억압적인 정치 현실을 꼬집은 영화, <바보선언>이었습니다.

글/구성/출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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