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띄우는 편지] 독일 김영상 씨

[고국에 띄우는 편지] 독일 김영상 씨

2018.09.15. 오후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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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영덕에게

6.25 동란으로 세상이 혼란할 때 개성 집을 떠나 지금까지 나 혼자 살아온 지 68년이나 됐구나!

전쟁 때 우리 집 살림은 너무 궁핍해서 우리는 거의 굶다시피 했어.

어머니께서는 다섯 식구를 먹이기 위해 무엇이든 쓸만한 물건이면 시골로 가지고 나가셔서 먹을 것과 바꿔오셨단다. 비참한 생활이었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북진 명령이 떨어져 나도 어쩔 수 없이 미군을 따라 이동했는데 부대 안에 설치된 'UN 피난민 구제사업팀' 도우미로 일했지.

평안도 북쪽 개천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했는데 이때 내가 있던 부대원의 2/3 이상이 전사했어. 당시 내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어.

대학을 고학으로 졸업한 후 군 복무를 했지. 그리고는 바로 독일로 유학을 갔단다.

독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화학 회사에 취직해 근무하다 지난 1995년에 은퇴했다. 1968년에 독일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들 둘을 뒀다.

나는 그동안 북한에 모두 세 번 다녀왔다.

나에게 특별한 방문은 두 번째였다.

2003년 10월이었어. 당시 내 심정은 그리운 내 동생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단다.

이 방문을 위해 무려 2년 동안이나 각방으로 알아보고 성사시키려고 애를 썼어.

너희를 만날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는데 안내원이 알려준 소식은 청천벽력같았다.

바로 밑에 아우 영덕이는 사망했고 막내 동생 영길이만 나온다는 것이었어.

영길이는 제수와 딸 그리고 손녀를 데리고 나왔더라. 우리는 처음에 서로 알아보지 못했지.

부모님에 대한 옛 기억과 고향 이야기를 하자 그제야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어. 서로 껴안고 한참을 울었단다.

마음 아픈 것은 부모님 성묘 못 한 것이었는데 산소가 없다고 해. 부모님을 화장한 유골만 영길이가 집에 모시고 있다고 하더라.

영길이네 집엘 가지 못하게 하더구나.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이 저절로 나온다.

종이가 없어 급한 나머지 식탁에 있는 냅킨에다 몇 줄 쓰고 독일 주소를 써넣었는데 혹시 그 편지를 받았는지 모르겠구나.

다시 15년이 흘렀다. 여전히 네 소식을 모른 채.

이제 남북한 사이에 얼음이 풀리듯 다시금 관계가 회복되는 거 같아 나는 또, 다시 희망을 품게 되는구나.

영덕아. 내가 죽기 전에 너를 꼭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혹시라도 이 편지를 보게 된다면 꼭 소식을 보내다오. 너를 보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독일에서 큰형 영상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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