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바보들의 행진'

[한국영화 걸작선] '바보들의 행진'

2018.07.21. 오후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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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1970년대의 청춘,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생맥주와 청바지, 포크 음악이 떠오르는 분들도 계시겠죠.

한편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통행금지 같은 키워드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영화는 각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참고서가 돼주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영화 걸작선에서 소개해드릴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양면성을 아주 세밀한 터치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초반부.

경찰이 장발을 단속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경찰: 너희들. 어디로 도망가는 거야

미팅 자리에 가려던 철학과 대학생 병태와 영철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데요.

이 대목에서 송창식의 유명한 노래 '왜 불러'가 흘러 나옵니다.

영화의 맥락에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이 노래는 공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맙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미팅 자리에 나선 두 사람.

여자 앞에만 서면 숙맥이 되어 버리는 영철은 여대생 순자가 마음에 들지만 순자는 영철에게 쌀쌀하게 굽니다.

병태는 아예 파트너 여학생이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학생: 댁이 13번이세요? 병태: 네 여학생: 누가 13번 찾는데요

급히 나가보는 병태.

한 어여쁜 여대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자: 댁이 13번이신가요? 병태: 예. 제가 13번입니다 영자: 그래요? 예쁘게 생겼네요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은 두 사람.

내친 김에 바로 전철 데이트로 이어집니다.

게다가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까지 마시게 되죠.

영자: 까뮈의 ‘이방인' 읽어보셨어요? 병태: 읽어봤죠 영자: 어머머. 실력파시네요. 잘됐다. 초면에 부탁 하나 드려도 되죠? 병태: 뭔데요? 영자: 남자가 뭐 그래요? 초면에 숙녀가 부탁하면 우선 응낙부터 하고 보는 거예요 병태: 네. 그러죠 영자: 리포트 좀 써주세요. 그 대신 내가 연극 표 드릴게요

자신의 학교 과제를 처음 만난 미팅 파트너에게 떠넘기는 영자, 여간 당돌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병태는 영자의 매력에 단단히 사로잡힙니다.

병태와 영자, 그리고 영철과 순자는 종종 당대 젊은이들의 아이콘이 된 생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억압을 받으며 무기력감에 휩싸여 있는 영철은 알쏭달쏭한 말을 꺼냅니다.

영철: 동해에는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예쁜 고래 한 마리요. 그걸 잡으러 떠날 거예요.

이 대목에서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은 역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죠.

이 곡 또한 염세주의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화 역시 검열로 인해 여러 군데가 훼손됐는데요.

병태가 수업 중인 강의실 밖으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영철: 병태야. 너 안 나갈래? 병태: 난 남아 있을래 영철: 가자. 인마 병태: 난 남아 있겠다 해도 그래 영철: 좋아, 난 나가겠어.

영화는 이들 학생들이 응원 연습을 하러 나간 것처럼 대학 운동 경기 장면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데요.

그런데 사실 원래 영화에서는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 장면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검열 당국이 시위 장면을 삭제 조치하면서 하길종 감독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증발되고 말았죠.

그래도 검열이 미처 잡아내지 못한 정치 현실에 대한 은근한 비판은 곳곳에 숨어 있는데요.

강의실에 홀로 남은 병태가 칠판을 지우는 장면.

'이상 국가'라는 칠판 위 단어를 묘하게 변형시키면서 당대 국가 권력의 부조리를 슬쩍 비꼬고 있는 것이죠.

영자에게 단단히 사로잡힌 병태는 구애를 이어갑니다.

병태: 영자야. 너 참 예쁘다.

영자: 뭐? 뭐야? 예뻐? 너 참 눈이 삐었구나. 예쁜 애들은 길거리에 세고 셌다고.

병태: 아니야. 너 참 예뻐. 영자야. 뽀뽀 한 번 할까 영자: 어머머. 얘 봐라. 어머. 얘 못하는 소리가 없어

하지만 영자는 병태에게 마음이 있어도 곧 군대에 가야 하는 그를 애인으로 삼을 생각이 없나 봅니다.

어느 날 병태에게 갑작스레 이별 통보를 하고 말죠.

영자: 내 말 들려? 병태: 뭐? 영자: 내 말 들리냐고.

병태: 그래.

영자: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병태: 뭐라고? 영자: 앞으로 만나지 말자고.

병태: 왜? 영자: 그냥. 앞으로 전화 걸지도 말아.

그리고 영자는 병태에게 자신이 곧 결혼할 것이라는 애기를 해주죠.

결국 병태는 군 입대를 선택하게 되고, 영철은 고래를 잡겠다며 무작정 동해로 향합니다.

영철이 잡겠다는 동해의 고래는 억압적 현실에 갇혀 있는 이들이 꾸는 자유의 상징이겠죠.

하길종 감독은 두 사람의 선택을 병치시키면서 청춘의 몰락을 그려냅니다.

사랑도, 미래도 불투명한 답답한 청춘.

병태와 영철은 그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 목적지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입니다.

영자: 병태야. 고개 좀 내밀어 병태: 뭐라고? 영자: 고개 좀 내밀라고

낭만과 억압이 공존했던 시대의 청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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