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 마의 계단

[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 마의 계단

2018.05.12. 오후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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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꾸준하게 사랑 받는 장르가 바로 스릴러입니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아버지 하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꼽히죠.

그런데 일찍이 "한국의 히치콕"이라고 불린 감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만희 감독입니다.

오늘 한국영화 걸작선에서 소개해드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이 1964년에 연출한 '마의 계단'이라는 작품인데요.

세련된 연출로 긴장과 공포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돋보여 개봉 당시 극찬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영화 '마의 계단'은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선보입니다.

타이틀 자막이 뜨는 가운데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병원 안팎의 여러 공간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뭔가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이 도입부만으로도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한껏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죠.

주인공은 이 병원의 외과 과장인 현광호.

그는 같은 병원의 간호사 진숙과 남몰래 열애 중입니다.

[진숙 :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병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랑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 진숙은 답답하기만 한데요.

[광호 : 관리인을 조심해.]

병원장의 딸 정자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현광호에 대한 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정자 : 치료비 대신 저녁을 내겠어요.]

[광호 : 치료비는 아버님한테 내시죠.]

[정자 : 싫어요. 꼭 선생님한테 내겠어요]

[광호 : 저녁을 먹으면 부정행위인데?]

[정자 : 비밀을 지키겠어요.]

이때 불쑥 들어오는 광호의 숨겨진 연인.

[진숙 : 방금 수술한 환자의 용태가…]

[광호 : 잠깐.]

세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장면이죠.

이런 가운데 광호는 병원장으로부터 아주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됩니다.

[병원장 : 그리고 장차 이 병원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고 말이야.]

병원장의 후계자가 되는 걸 조건으로 그의 사위가 되라는 얘긴데요.

광호는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몰래 사귀어온 진숙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진숙 : 내가 당신의 진심을 대신 말할까요?]

[진숙 : 정자를 사랑하고 있죠? 병원은 신부의 지참금이고. 그게 탐이 나죠?]

진숙의 만류에도 광호는 결국 자신의 야심을 밀어 붙입니다.

비참하게 버려진 진숙.

게다가 그 사이 광호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되는데요.

[진숙 : 한마디만 말해주세요. 진심으로 유산을 원하세요?]

[광호 : 가정을 갖기 전에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감을 느낀 진숙은 이제 점점 독해집니다.

[진숙 : 마비된 당신의 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선 자극이 필요해요. 임신 된 사실을 공개하겠어요.]

진숙과의 관계가 들통 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상황.

광호가 가만 있을 리 없겠죠,

모든 걸 폭로하기 위해 병원장실로 달려가는 진숙을 말리려다 그만 사고가 나고 맙니다.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데다 아이까지 유산하고 만 진숙.

광호는 이 사건 이후로 더 큰 불안감에 휩싸이는데요.

혹시라도 진숙이 둘의 관계를 발설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그래서 결국 진숙을 살해하기로 결심하죠.

모두가 퇴근하고 난 한밤중에 병원에 온 광호는 미리 정신을 잃게 만든 진숙을 병원 뒤편의 물웅덩이에 빠트립니다.

자살로 위장한 비오는 날 밤의 살인!

광호는 그렇게 성공 가도에 놓인 걸림돌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광호 : 이제 진숙의 시체가 떠오르겠지? 곧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며칠이 지나도록 웅덩이에 빠진 진숙의 사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광호는 또 다른 불안감에 빠집니다.

[광호 :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옷자락이 뭣에 걸린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어.]

진숙은 과연 죽은 게 확실한 것일까?

광호의 신경과민과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광호 : 저게 웬 거냐?]

[가정부 : 뭔데요?]

[광호 : 저 목발 말이야.]

진숙이 다리를 다쳤을 때 쓰던 목발이 왜 그의 집에 놓여 있는 걸까요?

치정 드라마의 틀로 달려가던 이야기는 광호의 살인 이후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의 문법에 충실해집니다.

광호는 점점 더 깊은 불안의 늪에 빠져들고, 급기야 진숙의 환각까지 보게 됩니다.

영화 '마의 계단'은 남성의 야망에 버림 받은 여성의 복수라는,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 곳곳에 무심한 듯 배치한 촘촘한 복선들이 하나의 퍼즐처럼 맞춰진 이야기의 밀도가 상당한 편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장면도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게 만든 것이죠.

이 영화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스타일리스트라고 평가 받는데요.

장르적인 이야기에 걸맞게 다양한 소품과 배경을 활용한 화면 연출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죠.

과장되게 크게 울리는 시계 소리, 수풀이 우거진 물 웅덩이, 병원 건물의 허술한 나무 계단과 목발 소리, 목격자를 암시하는 듯한 깜빡이는 조명.

이 영화에서도 이런 장치들을 통해 스릴러 영화다운 긴장을 뽑아내는 남다른 연출력을 과시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그동안의 한국영화 답지 않게 "이웃 나라 냄새가 날 정도"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할리우드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스릴러의 의미심장한 개척을 이뤄낸 영화, '마의 계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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