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수첩] 韓 첫 황금종려상...그날 봉준호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Y수첩] 韓 첫 황금종려상...그날 봉준호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2019.05.29. 오전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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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수첩] 韓 첫 황금종려상...그날 봉준호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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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alme d'Or goes to Parasite of Bong Jun Ho."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입니다.")

제72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인 이냐리투 감독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눈과 귀를 의심하던 찰나에 기자실에 있던 한국 취재진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옆에서 함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온 기자가 제 어깨를 툭 치며 이야기했습니다. "축하해. 근데 나는 정말(truly) 봉준호 감독이 받을 것 같았어."

취재차 처음으로 칸을 찾았습니다. 숙소 바로 앞에 푸르른 해변이 보이고 값비싼 요트들이 줄지어 서 있는 프랑스 남부의 휴양지입니다. 명당자리라면 3일간 요트 정박비만 1,300만원에 이른다고 하는데요. "맑은 날씨 덕에 유럽의 부호들이 휴가지로 자주 방문한다"는 우버 기사와의 말이 무색하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15도 안팎의 쌀쌀한 기온으로 연일 흐린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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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베를린과 함께 3대 영화제로 널리 알려졌지만, 누군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를 묻는다면 답은 '칸'일 겁니다. 상업성과 전문성을 적절히 결합한 칸 특유의 프로그래밍은 이들이 최고 영화제임을 증명합니다. 동시에 대단한 권위만큼 쉬이 그 곁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유난히 뚫기가 어려워 난공불락이라고도 불립니다. 영화제가 열렸던 72년간 한국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칸은 기자들에게도 실로 엄격한 곳입니다. 매체가 처음 취재하러 가려면 제출하는 각종 서류만 열 종류가 넘고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게다가 승인 배지를 엘로우-블루-핑크-화이트 순으로 구분하고 색에 따라 입장 순서와 취재 범위를 엄격히 제한합니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과 일등석의 차이를 마주한 느낌일까요. (칸 영화제와 스킨십이 잦을수록 높은 등급의 배지를 주는데요. 여담이지만 블루를 받은 저는 도합 3시간을 기다려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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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준비부터 특별했던 칸 영화제가 남다른 경험으로 남은 건 단연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식 때문입니다. 한국 영화가 100주년을 맞은 해에 들려와 더욱더 값진 낭보입니다. "첫 칸 출장에 황금종려상이라니, 일복 터졌다"는 선배들의 말에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던 이유입니다.

올해도 칸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은 고작 2주간 진행되는 영화제를 위해 꼬박 1년간을 발로 뛰었고 각국에서 보물 같은 작품을 건져 올렸습니다. 영화제 초청만으로도 주목받고 화제가 되는 이유죠. 올해 영화제가 유난히 기대를 모았던 건 '이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라인업 덕분이었습니다.

경쟁 부문에 진출한 총 21편의 작품 중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이 5명에 이릅니다. 켄 로치, 다르덴 형제, 테레스 말릭, 쿠엔틴 타란티노 등 이름만 들어도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최고상은 하나였습니다. 지난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받았기에 2년 연속 아시아 작품의 황금종려상이 가능할지 걱정하는 시선도 있었고요. 봉준호 감독의 수상을 간절히 바랐지만,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던 이유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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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상영 당일, 방구석 깊숙이 박혀있던 드레스와 구두를 갖춰 입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칸 영화제의 보수적인 복장 규정에 맞추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유난히 좌석이 빨간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내 실감이 났습니다. 영화의 아버지 뤼미에르 형제, 그 형제들의 이름 본 따 만든 칸의 랜드마크, 그 극장입니다. 세 차례의 보안 검사, 핏빛 장막이 걷히고 시그널 음악(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7악장 수족관)이 들린 후에야 비로소 '기생충'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기생충'은 단연 특별했습니다. 한국영화 혹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상영 후에는 약 8분간 꽉 찬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자리를 지키며 박수를 보탰습니다. 필름마켓, 인터뷰 장소, 공식 기자회견장까지 '기생충'(parasite)을 언급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습니다. 유난히 불호를 찾기 어려운 영화기도 했습니다. 영화제 기간에는 현지 분위기를 발 빠르게 전달하는 소식지를 통해 반응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요. 3곳 중 2곳에서 '기생충'에 가장 높은 평점을 줬습니다.

수상자가 결정되는 대망의 시상식 날이 밝았습니다. 유난히 궂은 칸의 하늘이 맑게 개었습니다. 영화제 측은 이날 점심 즈음 수상자를 확정하고 발표 전 이들에게 행사에 꼭 참석하라고 언질을 줍니다. 혹시 주변 도시나 국가에 머무는 수상자에 '얼른 칸으로 돌아오라'는 일종의 메시지일까요. 어느 부문인지는 몰라도 참석이 곧 수상인 셈이죠. 정오까지 연락은 없었습니다.

[Y수첩] 韓 첫 황금종려상...그날 봉준호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다소 허탈한 마음으로 기자실에 들어와 노트북을 여는데 드디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먼저 알려지면 안 된다는 엠바고와 함께 말입니다.

수상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공개됐고, 어느덧 최고상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긴장을 놓기엔 일렀습니다. 영화제 기간 호평을 받았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직 무관이었기 때문입니다.(봉준호 감독은 타란티노가 무관임에도 참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면에는 황금종려상을 든 봉준호 감독과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손뼉 치는 송강호의 얼굴이 잡혔습니다.

수상 직후 수상자의 얼굴을 마주한 진귀한 경험도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기자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차분한 봉준호 감독마저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기자실을 들어오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오른손을 번쩍 드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송강호는 "오후 12시부터 1시 사이에 연락이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41분에 연락이 왔다. 그 40분이 피를 말렸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러고는 기자들이 있는 테이블에 트로피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열기가 사진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영국 가디언에서 '기자실을 찾은 봉준호'로 기사가 나왔더군요. 모두가 행복하게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Y수첩] 韓 첫 황금종려상...그날 봉준호 감독이 찾아왔습니다

"상을 못 받는다고 영화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또 상을 받는다고 없던 재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공식 상영회 이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감독이 말이 정답입니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떼고서도 '기생충'은 걸작입니다. 그렇지만 봉준호 감독 덕분에 이렇게 칸에서의 마지막 밤은 한국에서 온 모두에게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해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한국 영화를 마주할 수 있어서, 새로운 거장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어서.

칸=YTN Star 반서연 기자 (uiopkl22@ytnplus.co.kr)
[사진 제공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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