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리뷰] '말모이', 이것은 총칼없는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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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오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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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리뷰] '말모이', 이것은 총칼없는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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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있다. 말이 있는 곳에 뜻이 있으며, 곧 독립의 길이 있다."(영화 '말모이' 中)

말과 글은 의식을 반영한다. 소설 '1984' 속 빅 브라더가 신어(Newspeak)로 대중의 사고를 통제했던 것처럼, 1940년 일제는 침략 야욕을 드러내며 이 땅의 말을 없앴다. 정체성을 흔들자 많은 이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소수의 귀한 걸음이 우리말을 지켰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 뿌리의 끝을 잡고 놓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가 눈부시게 일깨운 역사의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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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40년도의 평범한 가장 김판수(유해진)의 시선을 따라간다. 김판수는 까막눈이다. 글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 먹고 살길이 바쁘다. 당장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월사금을 내지 못해 물건을 훔치는데, 하필 주시경 선생의 친필 원고가 든 가방이었다.

가방 주인인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과 인연도 그렇게 시작된다. 이후 판수는 한글을 떼는 조건으로 조선어학회 심부름꾼이 되고, 그들을 보며 언어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아가 함께 조선팔도 우리말 모으기를 위한 험난한 여정에 발을 디딘다.

영화의 타이틀인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이 남긴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 '말모이'에서 따온 제목이다.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극 중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우리말을 모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비밀작전을 의미한다. 1942년 벌어진 조선어학회사건에 상상력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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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만큼 '말모이'의 서사는 단순하고 또 예측 가능하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장면 전환도 적고 드라마틱한 반전에 기대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겐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다. 다만 '말모이'의 등장이 반가운 건 영화가 시대적 배경 안에서 주목한 사건 때문이다.

영화 '암살' '밀정'을 비롯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까지. 그동안 일제강점기와 항일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대부분 무장한 의병의 독립운동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와 달리 '말모이'가 집중한 건 정신적 저항이다. 흔한 전쟁터나 총격 신(Scene) 하나 없지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투쟁은 소리 없이 강렬하다.

영화는 짚는다. 총과 칼을 드는 일 만큼, 말과 글을 지키는 일도 피, 땀, 눈물을 수반했음을. 역사의 한 켠에서 다소 주목받지 못했던 이야기를 '말모이'는 귀중하게 건져 올렸다.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을 그린 첫 영화라는 점에서 기록으로서 가치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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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한 과정을 그리는 감독의 선택은 영리하다. 세련되진 않아도 담백하고 꾸밈없다. 아픈 역사를 미화하지도, 사전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 김판수를 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장엄하게 그리지 않았다.

김판수는 말한다. "벤또건 도시락이건,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요?", "10년간 말을 모아야 뭐 한담. 그 시간에 돈을 모아야지." 그런 판수의 변화는 현실적이라 피부에 와닿는다.

덕분에 영화의 메시지는 힘을 얻는다. 역사를 바꾸는 건 뛰어난 한 명의 열 걸음이 아닌 판수와 같은 보통 사람의 한 걸음이 모여 나온다는 것을. 결과물이 남았다. 보통 사람의 노력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탄생한 '조선말 큰사전'이다. 영화 말미 목숨처럼 지킨 원고 말모이의 실사를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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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하다. 김판수는 유해진이라 가능했다. 재치와 웃음을 담당하지만 동시에 현실과 이상 속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는, 쉽지 않은 롤이다. 그는 감칠맛 나는 연기로 소재의 무거움을 덜고 묵직한 감동을 더했다. 맡은 역마다 늘 그 이상을 보여준다. 괜히 자꾸 보고 싶은 배우가 아니다.

유해진의 동적 에너지에 맞서 윤계상은 진중하고 차분한 면모로 묵직하게 극을 지탱한다. 융통성은 부족하지만 뚝심으로 사전 편찬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작 속 잔혹하고 무자비한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이외에 김홍파, 우현, 김태훈, 김선영 등 명품 조연진이 두 사람의 빈 곳을 채움은 물론, 울림 있는 연기로 영화의 진정성을 더한다.

'말모이'는 2019년 1월 9일 개봉한다. 러닝타임 135분. 12세 관람가.

YTN Star 반서연 기자 (uiopkl22@ytnplus.co.kr)
[사진제공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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