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2019.05.10. 오전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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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알파고 대국 후 9연승 이세돌, 엘프고 등장 뒤 승률 곤두박질

인공지능에게 바둑 배운 기사들, 초반 포석 강해졌다!

인공지능과의 스파링 경험으로 세계정상급 기사에 대한 두려움 없어


이제, 국민들의 사랑을 한껏 받았던 이세돌 9단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중국에서 열리는 세계 바둑대회 취재를 갔을 때에도, 수수한 복장으로 혼자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이세돌 9단과 같은 비행기, 그것도 옆 좌석에 앉아 가며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항 바깥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림처럼 저에게 선명하게 기억돼 있습니다. 비행기에서는 가족에 대해 묻고, 바둑에 대해 묻고, 바둑 이후의 삶에 대해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적이지만 천재적인 면 또한 숨길 수 없는 프로기사의 면모를 녹음이 아니고 녹화도 아닌, 기록되지 않는 일상에서의 대화를 통해 조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당시, 저는 YTN 뉴스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습니다. 바둑을 둘 줄 알고, 스포츠부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출연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파고를 경험한 이세돌 9단의 기력은 이제 굉장히 세질 것입니다.” 근거는 간단했습니다. 알파고가 제일 세다면, 제일 센 그(인공지능을 ‘그’라고 해야 하는지, ‘그것’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와 바둑을 둔 이세돌 9단의 실력도 덩달아 세질 것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습니다. 그런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예상에 대해 대다수의 프로기사도 동의했습니다. 실제로 바둑은 자기보다 실력이 강한 고수와 많이 둘수록,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그럼 알파고와 대국 이후, 이세돌 9단의 실력은 더 좋아졌을까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체크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성적입니다. 알파고 대국 이전과 이후 성적을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큰 그림이 보일 것입니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대국하기 전 1년 동안 61승 31패를 기록했습니다. 세계대회와 국내대회 전적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승률 66%입니다. 그리고 알파고 이후부터 엘프고 공개 시점까지의 기록은 100승 41패입니다. 승률이 71%로 올라갔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률로 보면, 분명히 이세돌 9단은 알파고 이후에 더 세졌습니다.

또 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연승 기록입니다. 알파고 이후에 이세돌 9단은 프로기사들을 상대로 9연승을 기록했습니다. 원성진 9단, 박영훈 9단, 강동윤 9단, 김지석 9단 등을 상대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 팩트는 지금부터입니다. 많은 프로기사들이 인공지능으로 학습하기 시작한 때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8년 5월 2일 엘프고 프로그램 공개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프로기사들은 본격적으로 1대 1로 인공지능에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엘프고 공개 이후, 즉 2018년 5월 2일 이후부터 1년간 이세돌 9단이 거둔 성적을 살펴봤습니다. 조금 충격적입니다. 32승 36패로 승률이 48%로 추락합니다. 승률이 71%에서 48%로 떨어진 것에는 내부적인 변수도 있겠지만, 분명 외부적인 변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정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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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다른 프로기사들도 인공지능으로 학습하며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했다는 추정입니다. 인공지능으로 바둑을 공부한 기사 중에 실제로 성적을 내고 있는 기사들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팩트는 다음 기사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세돌 9단의 인공지능과의 대국 경험은 정말 엄청난 자산이었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실전에서의 배움, 절망적 상황에서 길을 찾고 찾으려는 인간의 처절한 손길, 절망하고 또 절망하지만 다시 또 길을 찾고 길을 만들어내려는 그 승부사적 경험은, 실전에서만 오롯이 누릴 수 있는 아픔이자 기쁨입니다. 큰 경기 경험이란 실제로 뛰어들어 경험하기 전까지는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월드컵이나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뛴 축구 선수와 국내리그만을 경험한 축구 선수의 경험치가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경기를 보는 시야, 큰 경기장에서의 낯선, 그러나 열광적인 응원, 단 한 번의 실수로 큰 경기가 끝날 수 있다는 압박감과 긴장감. 실전 경험은 시간과 기회가 쌓여야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세돌만이 갖고 있던 그 자산은 인공지능 프로그램 공개 이후에는 더 이상 빛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많은 프로기사들이 인공지능과의 대국을 통해 잘 둔 수와 잘 못 둔 수에 대한 분명한 평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포석은 과거에 비해 많이 단순해졌습니다. 복잡한 변화가 생기는 길을 선택했는데, 대부분 안 좋은 결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복잡해도 그 길을 선택하는 프로기사가 적어집니다. 그래서 알파고 이후 바둑의 외연이 넓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오히려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바둑의 길이 좁아진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바둑의 외연은 넓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바둑의 길은 좁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초반 포석이 약한 기사들이 인공지능과의 스파링을 통해 초반전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약점을 보완하다보니, 이제는 정상급 기사와 붙어도 해볼 만하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정상급 기사여도 인공지능보다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②] 알파고로 뜬 이세돌, 엘프고로 졌다

이세돌 9단은 올해 3월, 커제 9단과의 특별 대국 이후 “올해가 끝나고 휴직이나 은퇴를 생각하고 있고, 지난해부터 고민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알파고를 한 번만이라도 이겨서 ‘인간의 희망이 되어 달라’는 국민들의 바람에 대답이라도 하듯, 제4국 신의 한 수로 불리는 제78수로 알파고를 이겼던 이세돌 9단입니다. 알파고 이후 71%의 승률을 자랑했지만, 엘프고를 비롯해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보편화된 이후 50% 이하의 승률로 추락하며 휴직과 은퇴 이야기를 꺼내는 그에게 바둑 인공지능은 득이었을까 실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이세돌 9단은 알파고로 떴고, 엘프고 이후에는 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아니 바둑을 좋아하는 팬은, 알파고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줬던 그가 다시 한 번 멋지게 비상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람의 희망을 대표한 우리들 모두의 대표선수였으니까요.

YTN 김동민 기자(디지털센터장, 아마6단)
kdongmin@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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