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①] AI에게 바둑 배우는 프로기사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①] AI에게 바둑 배우는 프로기사

2019.05.09.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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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①] AI에게 바둑 배우는 프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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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①] AI에게 바둑 배우는 프로기사

구글 알파고 은퇴 → 페이스북 엘프고 공개 → 프로기사 AI 학습 본격 시작

프로기사끼리 복기해도 정답 모를 때, 인공지능은 척척 대안 제시

현재 인기 있는 AI 바둑 프로그램 '릴라제로·엘프고·미니고'

AI 모르고 바둑 강자 되는 것은 불가능, 바둑 AI는 선물인가 괴물인가?


2016년 3월, 구글이 만든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와 천재기사 이세돌 9단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인공지능의 4승 1패 압승. 당시 세계바둑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커제 9단은 “자신이 알파고와 둔다면 이세돌 9단보다 더 잘 둘 수 있다, 알파고가 자기는 못 이길 것”이라는 발언들을 쏟아내며 한국 바둑 팬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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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세돌 9단과 싸웠던 알파고 리 다음 버전인 알파고 마스터는 커제 9단과의 3번기에서 더 안정적으로 판을 짜가며 3전 전승을 거뒀습니다. 자신만만하던 커제 9단은 3국에서 절망의 눈물을 보였고, 대국 후에는 “알파고가 너무 냉정하게 둬서 바둑 두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알파고 최종 버전인 ‘알파고 제로’는 프로기사 기보를 학습하는 과정 없이 기본적인 바둑 규칙만으로 바둑을 배웁니다. 자기들끼리, 즉 AI끼리 대국하면서 실력을 쌓아가며 그야말로 입신(入神-바둑에서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9단을 이르는 말)의 경지에 오른 것입니다. ‘알파고 제로’는 AI가 방대한 빅데이터 없이도 스스로 학습하며 더 나은 무엇을 찾을 수 있고, 갖출 수 있고, 더 나아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까지도 예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준 것입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그 예측은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적 변화가 바둑계의 일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시점은 2018년 5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8년 5월 2일, 페이스북이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ELF 오픈고’를 공개합니다. (프로기사들이 보통 ‘엘프고’라고 부르니, 이하 기사에서도 ‘엘프고’로 쓰겠습니다) 이때부터 누구나 공개된 AI 프로그램인 ‘엘프고’를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조금 좋은 그래픽카드는 필수입니다. 엘프고의 등장으로 많은 프로기사들이 인공지능과 직접 대국을 하기도 하고 복기(復棋)까지 하면서 바둑을 배우게 됩니다. (복기는 끝난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을 말하며, 복기를 하면서 좋은 수, 나쁜 수 등을 검토하기도 하고,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패착과 승착 등을 가려내기도 합니다. / 패착(敗着)은 바둑을 지게 된 결정적인 악수를 말합니다. 승착(勝着)은 바둑을 이기도록 한 결정적인 한 수를 뜻하며, 축구에서의 결승골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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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기사끼리, 즉 사람끼리 복기하는 것과 인공지능과 복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려운 장면에서는 프로기사끼리 복기를 해도, “이 수가 이상했네요, 이 수 대신에 이렇게 두는 게 정답이었군요.” 하고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늘 명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경우는 보다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즉, 이렇게 두는 것이 더 좋았다고 실제 이길 확률을 그 상황에서 제시해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A라는 곳에 두었을 때 흑이 이길 확률이 55%였는데 실전에서는 B라는 곳에 두었고, B에 두었을 때 흑이 이길 확률은 47%로 떨어졌기 때문에, 확실히 B는 이 승부에서 나온 패착이라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공지능과의 학습을 통해, ‘이게 좋나, 저게 좋나?’ 하는 고민이 현저하게 줄고, ‘아! 이렇게 갔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바둑을 보면, 착수할 때 즉, 어떤 한 수를 두었을 때, 흑이 이길 확률과 백이 이길 확률을 실시간으로 표시해 줍니다. 그리고 흑을 기준으로 형세를 실시간으로 판단해주는 그래프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길 확률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주식 차트처럼 올라가고 있는지 떨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악수’로 불리는 나쁜 수를 두면, 당연히 이 그래프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당연히 바둑 수 자체에 표시되는 승률도 많이 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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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바둑에서 공동 연구는 기력 향상에 가장 큰 수단이었습니다. 여러 기사가 마음을 터놓고,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하고 토의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바둑이 정식종목이 되면서 국가대표가 꾸려지고, 국가대표 선수들이 공동 연구하는 것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프로기사들이 혼자 AI 프로그램으로 실력을 키워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공부 방법이 된 것입니다. 즉, 누구에게나 활짝 문이 열려 있지 않은, 공동 연구에 참여하지 않아도, 혼자서도 바둑 실력을 얼마든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프로기사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은 세 가지입니다. ‘릴라제로’와 ‘엘프고’, 그리고 ‘미니고’입니다. 릴라제로는 체스 인공지능을 만들던 벨기에 프로그래머인 카를로 파스쿠토가 공개한 프로그램입니다. 미니고는 구글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앤드루 잭슨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알파고의 은퇴를 아쉬워한 구글 엔지니어 앤드루 잭슨이 알파고 논문을 보고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구글과 공식적으로 관계가 있는 프로그램은 아닙니다. 앤드루 잭슨은 미국바둑협회에서 3, 4단 정도의 실력, 우리나라 타이젬에서는 5단 정도의 실력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바둑을 좋아해서 만든 프로그램임은 분명합니다.

한국의 프로기사들은 어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많이 쓰고 있을까요? 신진서 9단은 릴라제로와 미니고, 이 둘을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공개된 초창기에는 프로기사들이 엘프고를 제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일 덜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엘프고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그때 많이 쓰는 인공지능이 다른 것은 업데이트를 가장 최근에 한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더 좋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당연히 성능이 좋아지는데 현재 엘프고 업데이트 시기가 가장 오래됐으니, 상대적으로 릴라제로와 미니고가 더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프로기사뿐만 아니라 바둑을 가르치는 바둑도장에서도 이 프로그램은 필수품이 됐습니다. 알파고 첫 등장 때 TV 출연하면서 반신반의하며 이야기했던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AI한테 바둑 배우겠어요” 그 말이 어느새 진짜가 되버렸습니다.

[인공지능, 바둑 판을 바꾸다-①] AI에게 바둑 배우는 프로기사

프로기사들에게 ‘인공지능은 바둑에서 [ ]이다’라는 문장을 보여주고 빈칸을 채워보라고 물었습니다. 극과 극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극찬이 있는가 하면, 불호(不好)의 감정도 드러내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한 박하민 6단은 “바둑에서 인공지능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게 하는 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바둑을 연구한 뒤 역시 성적이 급상승한 이호승 4단은 “바둑에서 인공지능은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저에게는 목진석 국가대표님 감독의 답변이 가장 인간적으로 들립니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은 물음표다!”

인공지능이 기사들의 바둑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앞으로 바둑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미지수라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하수(下手)는 고수(高手)의 수를 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물음표가 많습니다. 사람이 인공지능을 물음표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둑계에서 차지하는 인공지능의 존재감, 인간보다 훨씬 앞선 인공지능의 무게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YTN 김동민 기자(디지털센터장, 아마6단)
kdongmin@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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