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으로…한인 입양인의 친가족 재회 이야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한인 입양인의 친가족 재회 이야기

2019.10.12. 오후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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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을 기다렸습니다.

프랑스로 입양 보낸 막내딸이 이제 곧 한국에 도착합니다.

딸과 연락이 닿은 지 1년, 엄마는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누군지 알겠어? 알아?고생 많았다. (언니랑) 똑같아. 둘이 똑같아."

41년 만에 만난 모녀, 한국말을 모르는 딸,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프랑스에서 온 입양인 박현숙 씨가 엄마와 고향을 찾았습니다.

강원도 춘천 근처 작은 산골 마을, 논밭을 마당 삼은 이 주황색 지붕 집이 현숙 씨가 네 살까지 살던 집입니다.

[장돈옥 / 박현숙 씨 친모 : 제 외할머니가 우리 친정엄마랑 살면서 (현숙이를) 키웠는데 돌아가셨어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애들이 너무 많잖아요.그래서 얘를 거둘 수가 없어서 내가 보냈어요. 가서 잘 먹고 잘 크라고.]

네 살 아이를 떠나보낸 그날을 생각하면 엄마는 지금도 가슴이 턱 막혀옵니다.

남편은 현숙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떴고, 자식 네 명과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했던 돈옥 씨에게 삶은 너무도 버거웠습니다.

[박복녀 / 박현숙 씨 첫째 언니 : 엄마가 삼촌이랑 (현숙이를) 업고 나가면서 춘천까지 가서 옷 싹 사 입히고 구두랑 다 사서 입히고. 08:02 그러고 나서 서울에서 오신 분에게 인계하려고 했어요. 그분이 애를 데리고 가면 혼자 가니까 울까 봐 삼촌이 따라가려고 했는데 희한하게 애가 울지도 않고 엄마 손 놓고 그 아줌마 따라가더래.]

[장돈옥 / 박현숙 씨 친모 : (현숙이가) 20살 될 때까지는 항상 꿈을 꿨어요. 얘가 '엄마' 하고 찾아오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꿈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얘가 아마 엄마가 보고 싶어서 꿈에 보이는 건가 했는데 꿈에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나를 포기하고 잊어버렸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죠.]

현숙 씨의 프랑스 이름은 깡디스,

좋은 양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 현숙 씨가 가족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가정을 꾸리고 자신과 똑 닮은 아이들을 마주하면서였습니다.

지난해 여름, 현숙 씨는 입양된 지 40년 만에 모국을 찾았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 엄마를 찾고 싶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간 지 일주일 정도 뒤 기적처럼 친어머니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깡디스 졸리베(박현숙)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제가 한국을 떠날 때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시골의 모습이었어요. 시골 풍경이었어요. 또 '작은 다리'랑 한옥 같은 집이 기억나요.]

현숙 씨의 어릴 적 기억은 정확했습니다.

[박복순 / 박현숙 씨 둘째 언니 : 여기 '다리, 조그만 다리'. 다리가 있었잖아. 이거 생각나지? 여기 건너서 저기에 화장실이 있었고.]

[박현숙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 저를 다시 새롭게 알아가고 싶어졌고 제 아이들에게도 설명하고 싶어졌어요. 이렇게 제 뿌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이야기의 퍼즐 조각을 맞출 수 있어서 감사해요.]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 이름, 가족.

자식을 보낸 죄책감에, 내 뿌리를 알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힘겨워했던 세월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리려 합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물줄기처럼 앞으로 현숙 씨에게도 좋은 일만 가득하겠죠?

[장돈옥 / 박현숙 씨 친모 : 다 같이 오니까 뿌듯해요. 사위도 좋은 사람 같고. 내 딸 현숙이를 아껴주면 고맙잖아요. 너무 뿌듯해요.]

[박현숙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평생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한국 가족들이 오랫동안 건강했으면 좋겠고 우리의 다음 만남이 41년 후가 되지 않길 바라요. 오랜 시간 기다려온 만큼 앞으로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어요.]

41년 만에 맞잡은 이 손을 이제는 놓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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