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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 '빈 깡통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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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설렘과 이별의 아쉬움이 공존하는 기차역.

그중에서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많은 사람에게 일생에 한 번 꼭 타봐야 할 ‘버킷 리스트'로 꼽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열차는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가슴 아픈 역사의 산물이자, ‘고난의 행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고려인 1세 할머니의 증언 :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열차 화물칸에 올라탔어... 어디로 끌려가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그곳은 마치 ‘빈 깡통' 속 같았지. 앉은 자리에서 대소변을 보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잤어. 그러다 하루는 한 아기가 엄마 품에서 죽은 거야. 죽은 자식을 땅에 묻지도 못하고 창밖에 버려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계속 끌려간 거야. '빈 깡통'을 타고...]

안녕하세요?

저는 80년 전 고려인 17만여 명을 태운 '빈 깡통'입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고려인이 끌려간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슬프고도 아픈 ‘회상 열차'입니다.

햇살이 내려앉은 한적한 간이역.

1937년 9월,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된 역입니다.

옛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집과 고향을 버리고 화물 열차에 올라타야 했습니다.

열차를 타기 전, 수천 명의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핑계로 총살됐습니다.

당시 고려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해 ‘통곡의 역'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박재성 / 러시아 동포 : 지금 서 계신 이 역은 '라즈돌노예 역'이라고 하고요. 1937년도 우리 고려인이 강제이주 당할 때 제일 첫 번째 기차가 출발했던 역이 바로 이 역입니다.]

[김 블라디미르 / 고려인 2세 : 제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난방도 안 돼서 한기가 가득한 화물 열차로 실려 갔다고 했습니다.]

당시 고려인의 애달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따금 지나는 화물 열차의 경적 소리만 빼면 평온하기만 합니다.

[김동수 / 열차 탐방단원 : 80년 전에 여기 살던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해서 많은 수난을 당하고, 많이 죽고 그랬는데 역사적인 길을 추적해보고 되새겨 보려고 왔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좁은 열차 복도.

흔들리는 열차에서 밥 한 끼 챙겨 먹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던 깡통 열차에 비하면 이 정도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악취가 진동하고 추위에 떨던 지옥 같은 순간마저 고려인들에게는 오늘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됐습니다.

[황인미 / 열차 탐방단원 : 저희는 목적지가 있었고 이 일정이 끝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도 견딜 수가 있었는데 우리 선조들, 고려인들의 이주는 너무 참담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정진영 / 고려인 회상 열차 탐방단원 : 더운 여름날 무거운 짐을 옮기면서 그때 우리 선조들께서는 너무나 아무 영문도 모르고 강제 이주를 당하셨을 텐데 그런 부분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어요.]

[이 헌 / 고려인 회상 열차 탐방단원 : 강제로 갔다는 그 자체부터 (마음 아프죠). 10월 그 추울 때 25일부터 12월까지 움직일 때 그때는 시속이 이렇게 빨리 간 것도 아니고요. 한 45km~60km 미만이었을 거에요. 그 무렵에는요.]

‘회상 열차'를 주제로 사행시 쓰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빼곡하게 써내려간 글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요?

아픈 역사를 모두 담아내기에 이 종이는 한없이 작기만 합니다.

[정막래 / 열차 탐방단원 : 우리 회상 열차의 의미가 담길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어서 물론 재미있고 장난스럽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를 조금 담아서 써봤어요.]

회: 회상 열차를 타고 고려인 갔던 길 따라 시베리아로 떠난다기에 상: 상상만 해오던 바로 그 길을 따라 가고자 열: 열차에 무작정 올라타 차: 차창으로 밀려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당신의 서러운 과거로 들어갑니다.

광활한 땅을 한없이 달려갈수록 고려인의 서러운 과거를 마주하게 됩니다.

1864년 먹고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떠난 한민족, 고려인.

한인들의 첫 해외 이주였습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씨를 뿌리고 밭을 일궈 삶의 터전을 이뤘습니다.

이들의 개척 정신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대, 한인 집단 거주지 ‘신한촌'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만들었지요.

그러나 1937년, 고려인들은 빈털터리 신세로 쫓겨나고 맙니다.

일제와 대립해 온 소련이 고려인에게 '일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추방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80년이 흐른 지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전전하는 유랑민 신세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광근 / 고려인2세·연해주 아르촘 시 부시장 : 17만 명의 고려인 동포가 (강제이주) 당했지만 80년 후 세월이 지나서 전체 인구가 늘어나서 50만 명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로 나뉘어 다 헤어져 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꼬박 72시간을 달려 도착한 러시아 이르쿠츠크역.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고려인 후손들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줍니다.

[함세웅 / 고려인 회상 열차 공동대회장 : 여러분들을 보니까 1937년 강제 이주 당하셨던 선조들의 삶과 아픔이 되새겨지면서 바로 그 선조들을 여러분들의 모습 속에서 확인합니다.]

몇 세대를 거쳐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부르던 노래 아리랑.

수도 없이 불러본 노래지만 오늘은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문삼순 / 고려인 2세 : 우리 부모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그것을 다 압니다. 80주년을 기념해 여기 와서 진짜 반갑습니다. 감동입니다. 환영합니다.]

‘한민족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 호수.

우리의 먼 조상들은 만 3천 년 전, 바이칼 호수 유역에 정착해 살다 몽골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이 있는데요.

오늘 이곳에서 강제이주 도중 희생된 고려인과 오랜 세월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고려인의 넋을 달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표완수 / 고려인 회상 열차 조직위원장 : 우리 민족의 앞날에 평화와 발전과 희망이 늘 함께 하기를, 선배님들께서 늘 이끌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안녕히 편안하게 쉬십시오.]

80년 만에 올리는 제사입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조상들의 유랑 이야기를 잘 몰랐던 우리의 자화상.

고국의 무관심을 반성하는 헌시도 올렸습니다.

[윤고방 / 시인 : 여든 해의 어리석음과 여든 해의 뉘우침을 싣고 둔중한 철마의 뼈마디마다 새겨진 그날의 통한마저 싣고 갑니다.]

[정 숙 / 참가자 :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역사와 누구의 백성도 아니었던 밑동뿐인 그들을….]

그리고 약속합니다.

이제는 아픔과 다툼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고 말입니다.

[이호영 / 열차 탐방단원 : 시베리아 횡단 열차 대장정이 끝나는 날 우리 역사가 희망의 역사, 평화의 역사, 공존의 역사, 번영의 역사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시베리아 열차는 달린다" - 김석진 자작시 -
80년 전 통곡과 한숨, 사람은 가고 없으나 아리랑은 남아 뜨거운 가슴으로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수만 목숨을 잃고서 일군 기적의 땅을 향해 그 옛날, 그 길을 따라 시베리아 회상 열차는 달린다.

며칠을 또 달려왔습니다.

마침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역에 멈춰 섰습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인데 마을 주민과 고려인들이 환영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카라탈 고려인 선생님 : 우리 카라탈 군에 오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937년 10월, 고려인들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여기까지 끌려오는 사이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베이셈바예브 카이라트 아슈랄리예비치 / 우슈토베 카라탈 군수 :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쌀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옛 소련 시절에 여기서 31명이 정부에서 수여하는 명예로운 노동상을 받았는데요. 이중에서 26명이 고려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헤어지지 않고 서로 형제같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고려인들의 첫 정착지, 바슈토베 마을을 찾았습니다.

고려인 묘지와 첫 정착지임을 알리는 기념비만 외롭게 서 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거친 황무지입니다.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숟가락 하나로 토굴을 파고 부둥켜안은 채 체온을 나누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 냈습니다.

당시 열악한 환경 탓에 태어나자마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는데요.

어린 나이에 화물 열차를 타고 온 고려인 1세 할아버지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80년 전 그날의 기억을 꺼내놓습니다.

[곽응호 / 95세 (고려인 1세) : 기차 안에 난방도 없어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난로 만들어서 거기다가 차 마시고 연명했습니다. 여기로 이주한 해가 제 나이 15살 되는 해였습니다.]

[천억실 / 92세 (고려인 1세) : 기차에 앉아서 한 달 동안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음식도 바로 못 먹고 목욕도 못 하고,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그렇게 짐 싣는 열차에 우리가 탔습니다.]

현재 이 마을에 생존해있는 고려인 1세는 열 명 남짓.

이들에게는 이제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천억실 / 고려인 1세 : 세상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잘 살길 바랍니다. 그 고생하던 그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수많은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1938년 고려인들은 제일 먼저 학교부터 세웠습니다.

2층의 한 교실에는 역대 고려인 출신 교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요.

[김 크리스티나 / 학생 (고려인 4세) : 저는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요. 왜냐면 한국에 갈 거예요.]

[김 예솔레니아 / 교사 (고려인 3세) : 고려인들은 한국 역사를 더 알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더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오랫동안 고려인 학교로 운영됐지만 아쉽게도 최근 일반 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고려인 학생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김병학 / 1992년∼1995년까지 한국어 교사 재직 : 제가 여기에 있었던 흔적이 남아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그렇지만 한글이 잘 지켜지고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데 학생 수가 줄어들어서 좀 유감입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고려인들은 이산의 아픔을 노래로, 그리고 춤으로 달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유일한 고려인 민족극장, 고려극장입니다.

1932년 러시아 연해주에 설립됐다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고려인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왔는데요.

고려인의 85년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셈입니다.

[김조야 / 고려극장 고려인 가수 : 저도 한 핏줄 아닙니까? 한민족 사람이니까 부모님도 일생 동안 여기서 활동했으니까 특히 제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 이 전통과 문화, 예술이 이어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고려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극단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민족 공연단체로 우뚝 섰습니다.

지금까지 300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한국어 대사를 구사하고 러시아어로 동시 통역하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류보위 / 고려극장 극장장 : 고려인이 어디서 살든 인생을 사는 동안 항상 자기 영혼에는 늘 한민족 문화와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문화를 보존하고 더 활발한 활동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85년, 참 고단하고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말과 문화를 잊지 않고 지켜온 건 사는 곳이 어디든 한민족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흩어진 고려인 49만 3천여 명.

그중 모국으로 돌아온 고려인은 4만 6천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재외동포법상 고려인 4세는 외국인으로 분류돼 만 19세가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

고려인의 유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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