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60여 년 일기 쓴 할아버지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60여 년 일기 쓴 할아버지

2016.02.16. 오후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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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60여 년 일기 쓴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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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6일 금요일. 88서울올림픽의 환경미화부문 자원봉사요원으로 발탁되어 오늘부터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오늘은 길 안내와 질서 계도 임무를 수행하였다. 7년 동안 알뜰히 준비했던 올림픽이 드디어 내일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50억 지구촌의 인류가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다.”

지난 88올림픽 자원봉사자였던 김영달 할아버지(73)가 당시 활동 내용을 담은 일기의 일부이다.

김 할아버지는 86아시안 게임 때도 추진위원과 성화봉송 부주자로 나섰으며, 다년 간 새마을 운동에 참여했다. 이때의 활동 역시 일기장에 꼼꼼히 적혀있다.

김 할아버지가 내놓은 50여 권의 일기장. 누렇고 얼룩진 일기장에서 올라오는 퀴퀴한 냄새가 오랜 시간을 지내왔음을 짐작케 한다. 오래된 세월만큼 종류도 가지각색인 일기장에는 빼곡한 글씨로 하루 일과와 그날 느꼈던 기분이 세세하게 담겨있었다.

“1959년 1월 5일 월요일. 오늘 기분은 명랑한 편이었으며, 더욱 고향 모친께서 부친 편지를 받아 한층 더 즐거웠다. 언제나 잊지 못할 어머님의 은혜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 고생하심을 생각하니 찬바람이 불어도 용기가 난다. 추운데서 잠을 자도 행복감을 느낀다.”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60여 년 일기 쓴 할아버지

열일곱 살이던 1959년부터 60여 년간 매일 일기를 써온 김 할아버지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김 할아버지는 15세에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의면서 집안 식구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었다. 집안이 파산에 이르자 할아버지는 결국 고향 경북 상주에 어머니와 두 동생을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참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낯선 서울 어느 유리 가게에서 일하며 홀로 지내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고 말하는 김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4.19 혁명 등의 현대사를 소년의 눈으로 본 기록들 또한 엿볼 수 있다.

“1960년 4월 20일 수요일. 어제 큰 파동이 일어난 서울 공기는 이상하다. 궁금해하며 신문을 기다렸더니 신문도 중요한 곳은 다 지워져서 나왔다. 이것이 미눚주의인가. 자유당 정부는 정말 최악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체감하기 어려운 예전 물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1959년 1월 12일. 시계가 고장이 나서 시계 수리점에 맡기고 돈 이백 환이 필요했다’, ‘1978년 1월 9일. 술값으로 1,300원이 들었다’ 등의 기록은 당시 물가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60여 년 일기 쓴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기로 지난 2003년 9월 9일 새벽에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를 꼽았다.

“2003년 9월 9일. 생과 사의 갈림길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말을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는데, 나는 오늘 그것을 직접 체험했다. 아침 6시 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가슴에 통증이 숨도 못 쉴 정도로 심해온다. 119 구급대에 전화를 해서 앰뷸런스로 한강성심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김 할아버지는 “어지러워 일어서지도 못하는 가운데서도 밤중에 중환자실에서 홀로 일기를 적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덕분에 그 순간은 아마 평생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젠 일기를 쓰지 않으면 제일 큰 것을 놓친 것 같다는 김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일기는 계속 써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YTN PLUS] 취재 강승민, 사진 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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