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진행자 송해 별세..."내 인생 딩동댕"

현역 최고령 진행자 송해 별세..."내 인생 딩동댕"

2022.06.08. 오후 2:19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 진행 : 김영수 앵커, 엄지민 앵커
■ 출연 : 김헌식 / 대중문화평론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현역 최고령 MC인 방송인 송해 씨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제 귀에는 아직도 일요일마다 고인이 힘차게 외쳤던 전국노래자랑이 맴돌고 있는데요. 1988년부터 줄곧 '일요일의 남자'였던방송인 송해, 고인의 삶과 관련해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모시고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헌식]
안녕하십니까.

[앵커]
저희 기자가 잠깐 소개해 드렸는데 송해 선생님이 처음에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셨나 봐요.

[김헌식]
사실은 창공악극단이라는 곳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방송이 아니고 이런 악극단이라고 하는 단체를 통해서 전국 투어 공연을 했습니다.

[앵커]
55년이면 방송국도 제대로 없을때니까요. 라디오 방송 정도?

[김헌식]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악극단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다 했거든요. 노래도 하고 또 오늘날의 개그라고 할 수 있는 희극도 하고. 또 여기에서 간단한 여러 가지 연극적인 부분들도 보여줬기 때문에 일종의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그런 극단이었는데 사실 여기서 잔뼈가 굵었다는 건 모든 분야들을 다 섭렵하고 그걸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토대가 돼서 전국노래자랑에서 명MC로, 국민MC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 사실 오늘날 관점에서 봤을 때는 이렇게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가지고 이런 거인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굉장히 우리 대중문화의 역사의 산증인이 현장에 있었던 볼 수 있겠습니다.

[앵커]
평론가께서는 송해 씨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김헌식]
사실 종로3가에 가면 송해 거리가 있거든요. 송해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곳 같은 경우 3호선과 5호선이 교차하는데 5호선 쪽 출입구에 가면 동상이 있습니다. 아침에 조화가 또 한 송이 있었는데요.

거기에 가면 항상 송해 선생님이 오가셨어요. 왜냐하면 그 근처에 원로희극인 사무실이 있었거든요. 자택은 강남 쪽에 있었지만 항상 그쪽에 출근을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가면 거기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도 사무실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종로3가는 우리 문화예술의 굉장히 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뜻깊은 곳인데요. 중요한 건 저는 아까도 언급하셨습니다마는 국민MC이기보다는 가수로 기억을 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틈나는 대로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르셨어요.

[앵커]
지금 저희가 영상구성을 통해서 앞서 노래하는 장면 보여드렸는데 노래를 잘하세요.

[김헌식]
너무 굉장히 잘하시고요.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앨범을 14장 정도 내셨을 정도로 가수를 잘하셨는데 사실 원래 해주에서 예술학교를 다니셨어요. 거기서 성악을 전공하셨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노래자랑 MC를 할 만하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황해도 해주 출신이시고 성악을 전공하셨고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한테 알려진 것은, 우리 국민들한테 알려진 것은 노래자랑 MC로 많이 알려지셨잖아요.

30년 넘게 34년을 진행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워낙 입담도 좋으시고 친근한 우리 국민들의 MC 아니셨습니까?

[김헌식]
사실 대체 불가능한 MC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실 그 앞전에도 진행자들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한계점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역에서 많은 분들을 실제로 만나다 보면 그분들과 같이 어울려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들이 벌어졌는데 송해 선생님은 워낙 서민적인 생활들을 했고 그런 정서나 감정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처음 출연하는 지역 주민들은 굉장히 긴장을 하시거든요.

그런데 출연자들에게 선뜻 말을 건네면서 아니면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유도했다. 본인도 사실은 그걸 인터뷰에서 말씀을 하셨었어요. 처음 긴장을 하시니까 그걸 풀어주면서 삶의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주민들께서 뭘 준비해 오시거든요. 그럼 그 자리에서 먹기도 하고 소개도 해 주고. 또 가족 이야기도 하고, 이렇게 인간적으로 같이 어울렸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송해 선생님이 빠진 전국노래자랑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기가 높았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고령이셔서 건강상 이유로 하차를 고민하시기도 했었는데 결국에 다시 또 합류를 하셔서 진행을 쭉 해 오시다가 지난주에는 진행을 안 하시더라고요.

[김헌식]
1월달과 5월달에 병원을 가셔가지고 굉장히 팬들이 많이 걱정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연세가 굉장히 많이 있으시기 때문에요. 그리고 3월달에도 코로나 확진, 그런 상황도 있었기 때문인데 사실 그전부터 전국노래자랑의 후임을 굉장히 물색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거론이 됐어요. 그런데 사실은 송해 선생님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언뜻 없었기 때문에 계속하겠다고 밝혔는데 다만 계속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최근에 2번 이뤄졌던 녹화에 참석하지 않아서 뭔가 건강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을 했었는데 어쨌든 지난주까지만 해도 굉장히 정정하셨다고 엄용수 협회장이 얘기하셨는데 오늘 또 이렇게 불의의 타계 소식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앵커]
대체 불가 MC로 생각이 된다고 평론가분께서 얘기를 해 주셨는데 원래 꿈이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싶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헌식]
구체적으로는 재령군이 고향입니다. 그래서 북한에 방문을 해서 2003년에 또 공연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여동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파란 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준비해 갔었는데 여동생분은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생존하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만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해 보고 싶다는 피력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2018년에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 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했는데 결국 분단 77년의 아픈 역사 속에서 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시게 됐습니다.

[앵커]
너무 안타깝고... 다음 주, 이번 주 일요일에 다시 또 진행하실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김헌식]
일요일을 지켰던 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앵커]
모두 다 같은 마음이실 거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고요. 끝으로 내 인생 딩동댕 직접 부르신 노래인데 이 노래 들으면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YTN 최두희 (dh0226@ytn.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