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 전후석 감독 "文 '헤로니모' 이야기에... 되게 감동 받더라"

[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 전후석 감독 "文 '헤로니모' 이야기에... 되게 감동 받더라"

2019.12.13. 오후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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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 전후석 감독 "文 '헤로니모' 이야기에... 되게 감동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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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 대담 : 전후석 영화 <헤로니모> 감독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 전후석 감독 "文 '헤로니모' 이야기에... 되게 감동 받더라"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의 역사를 잘 모르는 분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입니다. 이들과 함께 쿠바 혁명의 중심에 한국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로니모 임, 한국 이름은 임은조라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 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의 전후석 감독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전후석 영화 <헤로니모> 감독(이하 전후석)> 네, 반갑습니다.

◇ 이동형> 청와대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요?

◆ 전후석> 네, 그래서 안 매던 타이를 오랜만에 맸습니다.

◇ 이동형> 청와대에 왜 초청받으셨습니까?

◆ 전후석> 거기에 오늘 3.1절 100주년 기념 사업회 오찬이 있어서요. 갔다 왔습니다.

◇ 이동형> 이 영화 때문에 다녀 오셨겠죠?

◆ 전후석> 네, 우수 사업 중에 하나로 손꼽혀서 발표자가 세 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였고, <헤로니모> 영화에 대한 발표를 대통령님 앞에서 5분 정도 드렸습니다.

◇ 이동형> 헤로니모 임,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선 이름입니다. 임은조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전후석> 이분은 이분 아버지가 애니깽 농장으로 100년 전에 멕시코로 노예 같이 팔려갔죠. 그래서 그중 일부가 쿠바로 1921년에 이주했어요. 그래서 임은조 선생님은 쿠바에서 태어난 한인 2세로 첫 번째로 대학에 진학한 한인이셨고, 대학을 진학해서 보니까 자기 동기, 동창 중에 하나가 피델 카스트로. 그래서 쿠바 혁명 전선에 뛰어드시고, 이분이 차관까지 하세요, 쿠바 정부에서.

◇ 이동형>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는 왜 몰랐을까요?

◆ 전후석> 그러게 말입니다.

◇ 이동형> 방금 애니깽 말씀해주셨습니다만, 일제 식민지 시절에 남미 쪽으로 많은 분들이 이민을 가셨고, 사탕수수 농장 같은 곳에서 굉장히 힘겹게 삶을 사시면서도 대한 광복을 위해서 또 많은 돈을 고국에 보내고, 독립운동에 애쓰셨던 그런 분들인데요. 그 2세라고 보는 거죠, 헤로니모 선생님이요?

◆ 전후석> 헤로니모 선생님 같은 경우는 2세입니다.

◇ 이동형> 그런데 지금 우리 전후석 감독도 연세가 그렇게 많은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이 헤로니모 임을 몰랐을 텐데 어떻게 해서 알게 됐어요?

◆ 전후석> 저는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쿠바-미국 국교 정상화가 돼서 제가 제일 먼저 미국인으로서 가보고 싶어서 휴가차 배낭여행을 갔는데요.

◇ 이동형> 쿠바로요?

◆ 전후석> 네, 쿠바로.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한국 여자분이신 거예요.

◇ 이동형> 한국인? 한국인은 아니겠죠? 이민자겠죠?

◆ 전후석> 한인이셔서 조금 놀라서 여기 어떻게,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물으니까 이분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헤로니모고, 자신의 할아버지가 임천택 선생님, 애니깽으로 팔려오신,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서 헌금하셨던 그분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는데 처음에는 이게 얼마나 큰 파장력이 있는 스토리인줄 모르고 그런 스토리가 있었냐고 했어요.

◇ 이동형> 택시 타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까?

◆ 전후석> 네, 맞습니다.

◇ 이동형> 영어로 이야기했습니까?

◆ 전후석> 그분이 영어를 곧잘 하세요. 영어로 계속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제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그런 스토리고, 전혀 몰랐던 역사였기 때문에 점점 매료가 됐죠.

◇ 이동형> 그때부터 빠져들게 됐습니까?

◆ 전후석> 그때부터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다음 날 저를 자신의 집에 초청해주셔서 하루 종일 바닷가도 가고, 가족들이랑 다 같이. 이모부 만나고, 삼촌 만나고, 엄마 만나고, 아들 만나고, 그러면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죠.

◇ 이동형> 이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거네요?

◆ 전후석> 그렇죠.

◇ 이동형> 그런데 내가 모르는 역사인데, 이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생각인데요.

◆ 전후석> 처음에는 와서 블로그를 썼어요. 첫 번째는 사람들 반응이 되게 좋았고, 두 번째는 제가 성이 차지 않는 거예요. 학부 때 영화를 공부했었거든요. 처음에는 펀드 레이징을 해서 자금 조달을 해서 유튜브 비디오 같이 2~30분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게 3년이 지나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 이동형> 그냥 변호사 생활하시지 그랬어요.

◆ 전후석> 네,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 이동형> 다 만들고 나니까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 전후석> 그럼요. 굉장히 큰 보람이고, 저도 이것을 제작하면서 굉장히 많이 배우고, 또 이런 해외 동포들이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조국과의 관계, 애국심, 이런 것들을 더 배우게 되었죠.

◇ 이동형> 전 감독도 이민자입니까?

◆ 전후석>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한국에 5살 때 와서 다시 고등학교 때 갔어요.

◇ 이동형>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요?

◆ 전후석> 네.

◇ 이동형> 대학은 미국에서 마쳤고요?

◆ 전후석> 대학과 법대는 미국에서 마치고요. 그래서 저는 재미교포입니다.

◇ 이동형> 재미교포이다 보니까 헤로니모 임 가족에 대해서 더 애뜻한 게 있었겠네요?

◆ 전후석> 아무래도 조금 더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생각해보시면 한반도 밖에서 사는 모든 한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국 정체성, 한인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재미교포 친구들,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친구들이 늘 이런 것으로 평생 씨름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요. 관조자 역할을 하면서 저는 늘 관심이 있었는데, 쿠바에서 이들을 만나고 나서 이들은 다른 이민자들보다 훨씬 오래된 세대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로서 해결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 이동형> 디아스포라가 뭡니까?

◆ 전후석> 디아스포라가 쉽게 이야기하면 재외동포, 그러니까 본국을 떠나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하죠.

◇ 이동형> 만들면서도 동질성을 느꼈겠네요? 자료조사 하시고 하시면서요.

◆ 전후석> 그럼요. 그렇지만 이들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사실 그 어떤 것과 비교해도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동질감이 아니고, 사실 존경심을 느꼈죠.

◇ 이동형> 그러니까 우리가 80년대, 90년대 미국이나 캐나다나 이쪽으로 이민 갔던 분들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 전후석> 그렇죠. 다르죠. 이분들은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기에는 어렵고, 사실 속아서. 사기성 광고에 속아서 가신 분들이기 때문에.

◇ 이동형> 돈 많이 벌 수 있다, 이것으로 속아서 가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신 거잖아요?

◆ 전후석> 그렇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하기를 헤로니모 임 선생님이 쿠바 정부에서 차관까지 지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따님이 택시 드라이버를 한다? 왜 그럴까요?

◆ 전후석> 사실 택시 드라이버를 하는 게 큰 특혜에요. 왜냐하면 우선 사람들이 차가 없고요. 이 차도 1980년대에 선물 받은, 지금 40년 된 차예요.

◇ 이동형> 쿠바 정부로부터?

◆ 전후석> 네. 은퇴하시면서. 그런데 40년 된 차를 아직도 끌고 하시면서 그것으로 조금씩 관광객들 상대로 끼니를 벌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역할을 하시는 거죠.

◇ 이동형> 조금 죄송한데,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나서 그 뭐 ‘빨갱이 영화’를 만들었느냐, 이렇게 비난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한국에서요.

◆ 전후석> 한국에서 댓글이 가끔 그렇게 달려요. 그러면 사실 굉장히 당혹스러운 게 우선 영화를 보시면 전혀 그런 게 아닌 게 확고해지고.

◇ 이동형> 이념하고는 상관없이?

◆ 전후석> 그렇죠. 이념하고 상관없이. 하지만 헤로니모 선생님이, 임은조 선생님께서 쿠바 혁명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 있어요. 그때 한국 사람들은 거기서 노동자였는데, 2등, 3등 시민으로 겨우 끼니를 걸러 가면서 그렇게 사시는 분들인데, 이들이 다른 쿠바인들과 유일하게 번영과 평등을 맛볼 수 있었던 길이 당시에는 혁명이었어요. 사실 피델 카스트로 자체도 본인이 이게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일컫지 않았었거든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거다. 그런데 갑자기 노선이 바뀌면서 그렇게 돼버리죠.

◇ 이동형> 영화 속에서 쿠바 한인들이 ‘아리랑’과 ‘고향의 봄,’ 또 노사연 씨의 ‘만남,’ 이렇게 노래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고 하는데요. 3세, 4세들이 이런 노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들거든요?

◆ 전후석> 1990년대 쿠바가 북한의 고난의 행군처럼 거기도 ‘고난의 특별식’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가난해지고 그러니까 미주에 사는 캐나다, 그리고 재미 한인 선교사님들이 거기에 가서 한글 교육을 하고, 식품 같은 것도 배급해주시면서 가요를 많이 가르치셨어요. 그때 ‘만남’이 하나였고요. 아리랑 그런 것도 선교사님들이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하더라고요.

◇ 이동형> 혹시 우리 말은 조금 하십니까? 3세, 4세 분들이요?

◆ 전후석> 요즘 어린 친구들은 BTS 때문에 한글을 자발적으로.

◇ 이동형> BTS가 정말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 전후석> 정말요.

◇ 이동형> 100명, 1000명 외교관 안 부러운.

◆ 전후석> 전혀요.

◇ 이동형> 대단한데요. 그렇군요. 쿠바에서도 역시 한류 붐은 있나 보네요?

◆ 전후석> 그럼요. 처음 2016년에 갔을 때는 배우 이민호 씨가 굉장히 유명했어요. 그때 ‘꽃보다 남자’가 공영 방송에 나오고 그래서 저희가 촬영을 다니면서 조금 혜택을 봤죠.

◇ 이동형> 한국 사람이라고?

◆ 전후석> 우리 한국 갔다 왔다고 하면 이민호, 이민호, 그러니까.

◇ 이동형> 그래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배낭여행으로 쿠바를 선택했잖습니까? 그러면서 임은조 선생의 따님을 만나면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됐는데요. 쿠바 여행은 어땠어요? 한국 분들이 잘 갈 수 없는 그런 나라니까요. 거리도 있고 해서.

◆ 전후석> 쿠바 여행이요. 한 3박 4일 하면 모든 거품이 빠지고, 저 같은 경우는 그랬어요. 저도 시가랑 오래된 차랑 음악이랑 이미지가 화려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경험하고 3,4일이 지나니까 모든 거품이 빠지고 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거기가 사회주의라기보다 독재 체제죠, 아직도. 표현의 자유도 없고. 그리고 거기서는 한 달 월급이 25불이에요. 3만 원. 모든 사람이 3만 원을 동일하게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일을 해도 받고, 안 해도 받으니까 사람들이 대개 무기력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쿠바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큰 환상이 없습니다.

◇ 이동형> 환상 가지고 여행 가시는 분들 많은데요. 준비를 조금 하고 가야겠네요?

◆ 전후석> 가서 3박 4일 있을 거면 괜찮고요. 조금 더 오래 있으실 거면 준비를 하고 가셔야 할 것 같아요.

◇ 이동형> 알겠습니다. 아까 우리가 쿠바 한인들, 이민자 3세, 4세들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전후석> 지금 한 1000명 정도 계십니다.

◇ 이동형> 그분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할 것 같아요?

◆ 전후석> 네, 하죠. 되게 복잡한 이슈인 것 같아요. 지금 1세대, 2세대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요. 3세대, 4세대 분들은 혁명 이후에 태어나셨어요. 그런데 혁명이 있고 나서 공산주의에 대해서 조금 아시면,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는 한 민족이나 문화가 부각되는 게 금지되어 있거든요. 왜냐하면 다 당원이니까. 다 공산당원이고, 다 우리는 인민이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분들은 한인 정체성을 많이 잃어버리셨고요. 반면에 새로운 세대, BTS, 이민호 세대들은 자발적으로 한인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찾으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있죠.

◇ 이동형>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이 워낙 깊고, 그래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감독님 인생의 화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이스라엘은 왜 갔다 오셨습니까?

◆ 전후석> 이스라엘은 옛날에 갔다 왔고요. 이번에 이스라엘을 가지는 않았지만, 유태인들을 뉴욕에서 만났어요. 유태인 랍비한테 물어봤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재외동포가 몇 명인지 혹시 아십니까?

◇ 이동형>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 전후석> 800만 명이에요.

◇ 이동형> 상당하네요.

◆ 전후석> 5000만 명 대비 800만 명이라고 하면 16%거든요. 16%는 인구 대비해서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본국보다 밖에 사는 나라, 밖에서 사는 사람이 15% 이상 되는 나라가 세계에서 3개나 4개밖에 없는데, 우리나라가 그중 하나에요. 그만큼 많은 재외동포가 밖에 살고 있는데요. 유태인한테 물어보고 싶었어요. 우리들은 나라를 잃은 지 100년, 150년, 그 안에 디아스포라가 800만 명이 생겼는데, 너희들은 3000년 동안 나라가 없지 않았느냐. 하지만 어떻게 정체성을 규정하고, 누가 유태인이냐, 이것을 어떻게 정립하느냐. 랍비가 해준 말이 유태인의 범주, 유태인의 범위를 축소하면 축소할수록 결국 이것은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결국, 더 많은 한인들을 포용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그런 자세를 갖지는 못할망정, 왜 혼혈이면 한국인이 아니야, 한국말을 못하면 한국인이 아니야, 한국에 살지 않으면 한인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계속 규정을 하냐고 저에게 반문을 하시더라고요.

◇ 이동형> 거기서 깨달은 게 있었습니까?

◆ 전후석> 네, 그래서 저희가 왜 한인이 되고 싶은 분들, 새로 우리나라에 들어오시는 다문화 가정이라든지, 이주 노동자들이라든지,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올 수 없었던 한인 디아스포라들을 우리가 더 포용할 수 없을까. 전반적으로 디아스포라에 대한 시각, 재외동포에 대한 시각이 저는 약간 협소하다고 보거든요, 우리나라에서.

◇ 이동형> 예전에는 재일교포들에게 ‘반 쪽바리’ 이러면서 폄하했단 말이죠. 지금도 조선족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재일교포도 있고, 재중교포도 있고, 또 러시아 쪽에 많이 가 계셨고요. 그분들이 지금 변호사님 말처럼 원해서 간 분들보다는 반 강제적으로 간 분들도 상당히 많거든요. 우리가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아줄 필요가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들고요. 감독님은 어때요? 세 살 때 한국에 왔다고요? 다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갔는데,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이 있었습니까? 학창시절이라든가, 혹은 미국에 되돌아갔을 때.

◆ 전후석> 처음에 갔을 때는 있었죠. 왜냐 하면 저도 이중 국적이 있는 상태에서 미국 국적을 선택해서 갔었는데, 사실 고등학생이 결정했을 때 이게 얼마나 큰 파장력이 있고, 앞으로 내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이것을 얼마나 제가 생각하고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에 미국에 가서 아, 나는 더 이상 진정성 있는 한인이 아니구나, 나는 최대한 미국인이 되어야겠다, 하고 한국말도 최대한 사용 안 하고요. 정말 미국화 되려고 노력을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러면 나는 한국 밖에 사는 한인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지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늘 있었어요. 그러다가 미국 내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아이덴티티, 그러니까 재미교포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몇 번 있었고요. 그다음에 연변도 가고, 브라질도 가고, 제가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한인들을 늘 만나면서 이게 비단 미국으로 간 나뿐만 아니고 한반도 밖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깨달음이 있었죠.

◇ 이동형> 그래요. 이번 쿠바 취재하면서 꽤 오랫동안. 3년 동안 취재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 전후석> 네.

◇ 이동형> 어떤 점을 가장 크게 느끼셨을까요?

◆ 전후석> 이런 것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구나, 이런 것을 느꼈고요. 너무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었구나, 이런 생각도 했었고요. 그것을 느꼈어요. 저는 헤로니모 선생님의 삶에 대해서 많이 배우려고 했는데요. 이분은 막 ‘국뽕’을 일으키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었고, 이분은 인본주의자였어요. 그러니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게 쿠바인이건, 한인이건, 아니면 다른 나라 사람이건. 그래서 결국 정체성을 찾는 과정의 목적지는 우리나라가 최고야, 우리나라 사람이 최고야, 이런 민족주의가 아니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우리가 모든 이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겠구나.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 이동형> 우리 젊은 층이 한때는 체 게바라 열풍이 분 적도 있었거든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같은 영화도 보고, 체 게바라 평전도 읽고, 티셔츠도 읽고 다니고,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읽으면서 우리는 왜 해로니모 임을 몰랐을까. 굉장히 의아한 기분도 없지 않아 들고 있네요. 왜 몰랐을까요, 우리는?

◆ 전후석> 저도 쿠바 가서 이분이 아빠가 체 게바라랑 피델 카스트로랑 같이 일했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랐거든요. 왜냐하면 저도 체 게바라를 정말 좋아했었어요. 학교 다닐 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진짜 멋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바로 옆에 한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 이동형> 그러게요. 전혀 몰랐네요. 이거 혹시 지금도 극장 가면 볼 수 있습니까?

◆ 전후석> 제가 야심차게 좋은 배급사 만나서 3주 전에 개봉을 했는데요. <겨울왕국>이랑 같은 날 개봉했어요. 그래서, 꼭 그것 때문은 아니더라도 독립 다큐가 가진 현실이 있더라고요. 대형 극장에서는 이번 주에 내렸고, 독립 극장에서는 아직도 하고 있어요.

◇ 이동형> 보기가 쉽지는 않겠네요.

◆ 전후석> 쉽지는 않은데, 저희가 이번 주 극장에 많이 안 오면 다음 주부터는 또 VOD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라서요.

◇ 이동형> 저도 시간이 없어서 VOD로 나오면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전후석> 단체관람 대관 하나 해주세요.

◇ 이동형> 딜을 할줄 아시네요.

◆ 전후석> 팔로워만 초대하셔도 꽉 찰 텐데요.

◇ 이동형> 알겠습니다. 네. 생각을 해보죠. 혹시 후속작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 전후석>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서 제가 조금 정말로 제 인생에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만한 스토리나 캐릭터를 만나면 모르겠지만 당장 다른 것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 이동형> 이거 찍으면서 너무 힘들었군요?

◆ 전후석> 네, 잘 몰라서 시작했기 때문에. 영화 전문인도 아니고요.

◇ 이동형> 오늘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한테 이 영화 이야기를 했더니 대통령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 전후석> 제 생각에는 되게 감동을 받으신 것 같고요.

◇ 이동형> 아니, 대관해 달라고 대통령한테 이야기하지 왜 저한테 이야기합니까.

◆ 전후석> 감히 제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뻔뻔한 부탁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사 말씀을 하실 때 이런 영화 거론해주시면서 저 멀리 쿠바에서도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청취자들에게 <헤로니모> 홍보 한 번 하시기 바랍니다.

◆ 전후석> 저는 <헤로니모>가 한인 디아스포라를 상징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싶다고 하면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고요.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형> 네, <헤로니모> 영화, 지금 대형 극장에서는 다 내려갔고, 독립 극장에서 볼 수 있다고 하니까요. 지금 그러면 서울에서 몇 군데 정도에서 볼 수 있어요?

◆ 전후석> 서울에서 5개 극장에서 하고 있고요. 혹시 극장 관계자가 이것을 듣고 계시면 추가로 오픈을 해주시면 좋죠.

◇ 이동형> 네, 알겠습니다. 아마 좋은 연락이 있을 겁니다. 기다리시기 바라고. 오늘 출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헤로니모>를 만든 영화 감독 전후석 씨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후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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