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엽의 세상읽기] 판소리, 그 절묘한 가락에 무얼 못 실을까

[송태엽의 세상읽기] 판소리, 그 절묘한 가락에 무얼 못 실을까

2019.04.09. 오후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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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엽의 세상읽기] 판소리, 그 절묘한 가락에 무얼 못 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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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인후동에 가면 종일 한 가수의 트로트 곡을 틀어주는 중국집이 있다. “가수가 누구요. 절창일세.” 이 정도 찬사 날리면 군만두 서비스 등장이다. 가수가 그 집 딸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공부한 재원이다. 그의 스승인 김연의 얘기다. “소리를 참 잘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 ‘3년만 트로트하고 돌아올게요’라고 하더군요. 국악으로 먹고살기 힘든 걸 알기 때문에 그러라고 했어요.”

요즘 방송에 젊은 국악인이 많이 출연한다. 그중 상당수가 트로트 가수로 변신해서 나온다. 판소리나 민요를 한 가수에게 트로트는 쉽다. 대중에게 접근하기도 좋은 장르다. 어떻게든 공연 기회를 잡고 싶은 청년들이 비좁은 국악계를 빠져나와 방송국을 찾아간다. 비주얼의 시대다. 때마침 한복의 아름다움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단아한 치마저고리 차림에 후련한 목청으로 들려주는 트로트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세대 아닌가. ‘좋아요’를 누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방송은 도덕과 거리가 멀다. 젊은 가수에게 짧은 치마를 입혀놓고 밑에서 위로 훑는 카메라의 시선은 음란하다. B급을 넘어 또 다른 청년 착취다. 관객을 부끄럽게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 예인들을 이렇게 푸대접할 건가. 이렇게 이름을 얻은 젊은 국악인은 과연 국악의 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문화부를 지향했지만, 평생 거친 사회부와 따분한 경제부에만 있었던 기자의 괜한 걱정인가.

지난주 열린 원로 명창 안숙선 (70)의 이야기 창극 공연은 이런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냥 판소리가 아니었다. 집중할 수 있는 무대와 탄탄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전혀 새로운 무대였다. 이름만으로 위대한 김소희, 박귀희 두 명창과 판소리의 에피소드가 소재로 사용됐다. 무료 공연이지만 온라인으로 예약을 받고 여러 차례 예약확인을 해 관객의 충성도를 높였다. 돈 내고 가야 할 공연이다. 공연을 기획한 기업재단을 칭찬하고 싶다.

청년 국악인 ‘이자람’이 음악감독을 맡은 창극 ‘패왕별희’도 보고 싶었다. 이자람의 기존 공연으로는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마르께스의 ‘이방인의 노래’를 보았는데 소설과 연극, 판소리를 엮어 자기만의 연희예술로 빚어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유럽과 남미를 넘어 이젠 중국인가. 장국영의 우희 역이 잊히지 않는 ‘패왕별희’에 판소리를 싣다니. 경극의 화려한 의상과 판소리의 절묘한 가락이 어떤 조화를 이뤄낼지 궁금, 또 궁금하다.

과문한 기자는 두 공연이 국악계와 젊은 국악인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판소리가 조선 시대에 사랑받던 유행가라면 2019년 우리 시대의 노래는 달라야겠죠.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을 우리 가락으로 소화하고, 다양한 서양악기까지 조화롭게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전통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돼서 가능한 일이죠.” 국가무형문화재 기능협회 홍보대사이기도 한 국악인 오정해의 말이다.

5060 세대는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음미체보다 국영수의 시대를 살았다. 국악을 즐긴다는 건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 드니 우리 가락이 그립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우리 귀명창이라도 되자. 세상에 치이고 삶에 지친 아재들이여. 이어폰을 꺼내시라. 유튜브 좋지 않은가. 김소희의 88올림픽 폐막곡인 ‘뱃노래’라도 틀어놓고 슬그머니 눈을 감아보자.

송태엽 해설위원실장 [taysong@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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