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의거 109주기, 팽배했던 친일 분위기속 총성

안중근의사 의거 109주기, 팽배했던 친일 분위기속 총성

2019.03.28. 오전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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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의거 109주기, 팽배했던 친일 분위기속 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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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김호성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3월 28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김호성 앵커(이하 김호성): 출근길 라디오로 만나는 가볍지만 깊이 있는 오디오 칼럼시간입니다. 목요일마다 역사의 향기 가득한 이야기 풀어주시는,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나오셨습니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김호성: 오늘의 칼럼 제목이 무엇인지요?

◆ 전우용: “의사의 의미” 정도라고 볼까요.

◇ 김호성: 여기서 ‘의사’는 역사학자 박사님이시니까 닥터 말하는 거 아니죠?

◆ 전우용: 그런 우스개가 있어요. 이재명 의사라고 이완용에게 칼을 찔렀던 그런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 알려져서 그걸 닥터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어요. 우리가 익히 아는 의사들보다는 좀 낯선 분이니까 그렇게 인터넷에 보면 잘못 쓰는 경우도 있는데, 말씀하셨듯이 그 닥터는 아니고요. 과거 순국선열들, 선열이라고 부르고요. 나눌 때 보통 의사 열사 지사 이렇게 나누잖아요.

◇ 김호성: 의사 열사 지사. 그런데 아까 1부에서 이종걸 의원께서 안중근 의사 이야기하시다가 순간 열사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안중근 의사는 열사가 아니라 의사이신 거죠?

◆ 전우용: 그렇죠. 의사 열사 지사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데, 보통 잘 구분을 못하고 쓰는 경우가 좀 많은 것 같아요.

◇ 김호성: 청취자분들을 위해서 좀 구분해주세요.

◆ 전우용: 당시에 무장투쟁, 의에 따라서 봉기해서 스스로 목숨을 잃을 줄 알면서도 무장투쟁에 나섰던 분들을 의사라고 해요. 의병, 집단을 이뤄서 항거했으면 의병이고요.

◇ 김호성: 의롭다 할 때 한자 의(義) 자죠.

◆ 전우용: 그렇죠.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던진 사람들이에요. 또 의를 위해서 총을 든 사람들이고요. 똑같이 일제에 항거는 했지만 무장투쟁을 하진 않고 맨손으로 항거하다가, 또는 특별히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일본에 의해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분들. 목숨을 잃은 분들에 한해서 붙이는 것인데 무장투쟁을 하지 않은 분들이에요. 이런 분들이 열사죠. 그래서 유관순 열사, 이렇게 부르게 되거든요. 스스로 항거하지 않고, 항거하지 않았다기보다 일본과 맞서지도 않고 스스로 자결한 분들도 열사라고 불러요. 그래서 황현 열사, 이런 식의 칭호를 붙이는 것이고요. 또 일본 통치권력에 협조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투옥됐던 목숨을 잃지 않은 분들, 이런 분들을 지사, 애국지사 이런 식으로 나눠서 부르죠.

◇ 김호성: 제가 알고 있는 게 그러면 약간 좀 틀릴 수도 있겠나 싶은데요. 저는 의사 하면 거사를 일으켜서 결과를 얻어낸 분. 열사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숨을 거두신 분. 그래서 안중근 의사, 이준 열사 이렇게 나뉘는 게 아닌가 했는데.

◆ 전우용: 그렇진 않고요. 무장투쟁을 하신 분들을 의사, 무기를 든 분들이 의사예요. 

◇ 김호성: 무장투쟁인데, 사실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싸우는 건데. 우리 쪽에서 봤을 때는 의사이지만 상대 쪽에서 봤을 땐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 전우용: 그건 의병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이런 차원의 문제겠죠. 의병이 집단 테러리스트들이냐, 아니면 국가의 공식 군대 시스템, 군사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또 외적의 불법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저항했을 때 이것을 무슨 국제법상으로 이게 군대냐, 교전상대냐. 이렇게 따질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더욱이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그래서 우리가 그분들을 의병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예컨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이 있었고, 또 을미사변 이후, 또 을사늑약 이후, 또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이 대규모로 봉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의사들의 활동. 의병부대가 집단으로 활동하는 것이라면 개인적으로 또는 의병 부대의 특수요원격으로 활동한 분들이 의사가 되는 거죠. 이를테면 윤봉길 의사 같은 경우 한인애국단이라고 하는 작은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또는 김상옥 의사나 나석주 의사 같은 경우에는 의열단이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일본을 대해서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고 그랬던 거니까요.

◇ 김호성: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1부에 이어서. 박사님께 여쭤보고 싶었던 것은, 그때 당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고 의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때 당시의 대한제국의 분위기, 상황은 어땠습니까?

◆ 전우용: 그러니까 짐작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1년 후에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승전의 전리품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법률적·형식적 표현으로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세상 전체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다 인식하던 시절이었고요. 눈치 빠른 사람들, 약삭빠른 사람들, 기회를 찾는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한쪽에선 이토 히로부미에게, 정 줄이 없으면 일본군 병사에게라도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죠, 정말. 또 이토 히로부미는 스스로 통감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의, 1907년 이후에 특히 순종. 순종을 강제로 황제로 올려놓고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라고 했어요.

◇ 김호성: 황태제.

◆ 전우용: 제인데 황태자라고 불렀어요, 그냥. 그게 일본식이죠. 그걸 삼아놓고 그 수습을 자처했거든요. 그래서 국내에는 이토를 무슨 통감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흔히 태사라고 불렀어요. 황태자의 스승이다. 또 더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나라의 스승이다. 이렇게 해석할 만큼 이토가 실제로 당시 대한제국 황제였던 순종의 권위를 훨씬 능가하는 그런 식이 있었고요. 분위기가 이런 상태였어요. 일반 백성들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서 친지들이나 친척들이 의병으로 나섰다가 목숨을 잃고 감옥에 가고 하는 일들이 눈에 보이고 있고, 또 그에 따라 행패를 부리는 일본인 앞잡이들, 당시에는 토왜 이렇게 불렀습니다만, 토왜들의 행패가 눈에 보이는데도 세상 전체는 일본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됐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줄을 못 서면 뒤쳐진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줄 만큼,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친일파들만 늘어나고, 친일파가 못되면 낙오되는 것 같은 그런 위기의식. 그런 느낌이 아마 사회를 휩싸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저항의식이 잠재해 있었지만. 그런데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쏜 총알은, 이건 이토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렇게 세상 전체를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친일파들과 그리고 자기,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사이에서 내가 이 친일파들과 얼마나 다른가라고 하는 거리, 그 거리를 확인시켜준 총성이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의사들의 의결이라고 하는 게 그런 의미가 있거든요. 마치 잠잠하고 세상이 다 평화롭고 일본의 통치가 순조로운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총성으로써 일깨워주는 것이고요. 그럼으로써 백성들을 자각시키는 그런 의미가 있었던 거죠.

◇ 김호성: 식민지배의 상징 같은 존재, 총성을 통해서 멈추게 만들어버린 거였어요, 그렇다면.

◆ 전우용: 멈췄다기보다는 이토에 대한 온갖 환상이랄까요. 친일파들이 유포시켰던 환상이죠. 이 사람이 우리나라를 잘살게 해줄 것이다, 등등의. 그게 아니다라는 것을 일깨워준 거죠. 백성들이 이거 우리 스스로 친일파가 돼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어떻게 보면 그런 느낌 가질 수가 있잖아요. 살다 보면 다 그래요. 분위기가 여론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 같으면 나도 친일해야 되는 것 아니야, 했을 때 지금 방금 말씀하신 대로 그 총성 한 방이 ‘안 돼!’ 라고 깨우쳐준 거죠.

◇ 김호성: 안중근 의사가 쓴 ‘동양평화론’ 이것에 대한 간략한 서머리, 정리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전우용: 사실은 이 문제는 당시 일본이 주도했던 동아시아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얘기냐면, 일본은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페리에 미국 함대가 강제 게양시켰을 때부터 이거 자꾸 전에는 포르투갈인이 오더니, 그다음에는 네덜란드인이 오고, 이번에는 미국인이 오고, 뒤이어서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들이 자꾸 일본에 와서 위협을 하는데 이러다가 우리가 무슨 수로 저 서양인들을 당하겠느냐. 저기에 맞서려면 황인종이 전부 연대해야 한다. 그래서 아시아연대론이라는 걸 내세웠어요. 사실 동양평화론이라고 하는 안중근 의사의 글도 그 아시아연대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1884년 한국에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에는 한국이나 중국이 각성해서 일본 수준으로, 일본인들의 판단이죠. 일본 수준으로 근대화 하기는 어렵겠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망하고 말겠다. 그러니까 일본은 태도를 바꿔서 우리가 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유럽인의 관점에서 아시아를 대하자. 제국주의자로서 침략하자, 이런 쪽이었어요. 그런데 일본이 자국민들에게 두 가지를 왔다갔다하면서 설득을 했지만, 아시아인들에게는 끊임없이 마치 아시아가 힘을 합쳐서 유럽에 맞서야 한다는 그런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인 양 그렇게 꾸미고 속였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정체성도 흔들렸고요. 안중근 의사도 사실은 동양평화론에서는 그런 취지를 선의로 생각해서 자기가 러일전쟁 때 일본을 응원했다. 그런데 이기고 났더니 태도를 돌변해서 똑같은 제국주의의 행태를 보이더라. 이건 동양평화, 이른바 아시아연대라고 하는 동양의 가치를 어긴 것이고, 이토 스스로가 동양인 전체에 죄를 지은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남긴 것이 동양평화론이었죠.

◇ 김호성: 그렇군요. 오늘의 2019년 현재 안중근 의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김호성: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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