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육사 선생 순국지, 표지석도 없이 쓸쓸히 77년

베이징 이육사 선생 순국지, 표지석도 없이 쓸쓸히 77년

2021.03.01. 오후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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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광야, 청포도 같은 시를 지은 민족 시인 이육사 선생은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7개월 앞두고 중국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순국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77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지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남아 있습니다.

베이징 강성웅 특파원이 다녀왔습니다.

[기자]
베이징 자금성 근처의 전통 가옥들이 보존된 거리.

1944년 이육사 선생이 최후를 맞은 일본 감옥이 있던 둥창후퉁입니다.

일본군은 당시 베이징을 점령해 이곳에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베이징 둥창후퉁 주민 : 항일 전쟁 시기에 이 안에 일본 감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골목길 중간쯤 둥창후퉁 28호라고 주소가 씌여진 곳으로 들어가 봤습니다.

한때 관공서로 쓰였을 법한 건물이, 출입문이 폐쇄된 상태에서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좁은 통로로 거쳐 안쪽 마당까지 가면 가로 8m 세로 25m 정도의 낡은 건물이 나타납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선생이 일제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감옥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이옥비 여사 / 이육사 시인의 딸 (유일한 혈육) : 관 뚜껑을 여니까 온 전신에 피가 낭자해 있었고 그리고 눈을 못 감고 계셨대요.]

어두운 건물 안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원래 주거용 건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 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사방이 막힌 부지에 2층 건물 여러 동이 배치돼 있어 이곳이 감옥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베이징에 있는 '둥창후퉁'이라는 오래된 골목길 입니다.

이육사 선생은 이곳에 있었던 일본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이육사 선생의 본명인 이원록의 제적부에도 순국 지는 둥창후퉁 1호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제가 골목 이름을 조금 변경했지만 현재의 둥창 후통은 순국 당시 그 장소 그대로입니다.

[홍성림 / 재중 화북 항일역사기념사업회 : 둥창후퉁의 창성할 '창(昌)'자는 일제가 북경 점령 시기에 잠시 개명해서 사용했던 명칭이기 때 문에 두 장소가 같은 장소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감옥 추정 건물이 위치한 지번이 둥창후퉁 28호여서 1호라고 기록된 것과 차이가 납니다.

1호 지번에는 이미 대형 건물이 들어서 감옥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바로 골목 건너편 28호에 있는 감옥을, 부속 건물 로 간주해 1호에 통합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추정에 불과하다 보니 중국 당국과 유적지 로 보존하자는 논의도 진전되기 어렵습니다.

백마 탄 초인이 올 거라는 굳은 믿음으로 일제와 싸우다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민족시인 이육사.

순국지에 표지석 하나 새우지 못한 채 세월은 77년을 넘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이옥비 여사 / 이육사 시인 딸 (유일한 혈육) : 조국은 우리에게 맡기고 편안히 가시라고 세 번을 눈을 감겨드렸더니 감으시더래요.]

베이징에서 YTN 강성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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