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2018.09.15.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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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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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홋카이도 여행 첫날 밤. 새벽 3시, 삿포로 호텔에서 잠을 자던 도중 낯선 감각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뇌가 깨닫기도 전에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현지에 도착해 유심을 대여한 휴대전화에서는 '地震です-(지진입니다)'라는 알람과 함께 다급한 경보음이 울렸다. '뭐지?' 라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굉음과 함께 건물이 휘청였다. 바닥이 양 옆으로 흔들렸다. 마치 방 안이 거대한 놀이기구가 된 것처럼. 그런데 놀이기구의 느낌이 아니다. 파도를 타는 듯 흔들린다. 이미 선반 위에 두었던 과자 봉지는 떨어져 바닥을 굴러다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진이 났을 때 외부에 있다면 공터로 향하고, 건물 내에 있다면 책상이나 보호물 아래로 몸을 숨기고 숨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예상 못한 강진을 맞닥뜨리니 이론은 무의미했다. 옆에서 자고 있던 가족과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지만, 진짜 공포 앞에서는 조심하라는 충고도, 일말의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가장 길었던 몇 분이 지나자 옆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큰 흔들림은 잦아들었지만 뒤이어 여진이 쉴 새 없이 덮쳐왔고 땅이 요동치는 느낌에 어지러워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다. 메스꺼웠다.

[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호텔 투숙객들은 복도로 몰려나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일부는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려가기도 했다. 휴대전화로 검색해보니 규모 6 정도의 지진이 삿포로 인근에서 발생했다는 속보가 나와 있었다. (지진은 후에 규모 6.7, 최대 진도 7로 수정됐다)

로비로 내려가려는 찰나, 호텔 지배인이 계단으로 올라와 "내부가 가장 안전하다"며 객실에 머무르라고 충고했다. 결국 나는 방 안에서 해가 뜰 때까지 뜬 눈으로 몇 시간을 버텼다.

불안한 마음에 찾아본 온라인 여행 커뮤니티에는 '지금 당장 귀국편을 찾으려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다'는 한국 여행객들의 글이 줄을 이었다. 일부는 비싼 택시비 때문에 함께 공항으로 갈 일행을 구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가장 빠른 귀국편을 찾아봤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지진 자체보다도 뒤이은 쓰나미로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그리고 2년 전 구마모토 지진의 경우 규모 6.5의 지진이 일어나고 이틀 뒤 다시 진도 7의 지진이 발생해 앞선 지진이 본진이 아니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시내로 나섰다. 편의점에는 끝도 없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겨우 편의점에 들어갔지만 선반은 텅텅 비어 있었다. 손을 뻗어 경쟁하듯 물과 과자를 집어 줄을 섰다. 카드 결제기의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아 현금으로 계산을 하느라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도로와 건물 곳곳이 갈라지고 파열된 흔적이 보였다. 그야말로 '재난'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길거리에서 지진을 알리는 호외를 뿌리고 있었다.

[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진에 이어 악재가 몰려왔다. 정전과 이에 따른 신호 고장으로 지하철, 기차, 비행기, 버스 등 모든 교통수단이 멈췄다. 유일한 수단은 택시뿐이었지만 이마저도 찾기 어려웠다.

일부 호텔은 안전을 이유로 투숙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갈 곳을 잃은 투숙객들은 길거리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결국 삿포로를 빠져나가기를 포기하고 예약해 둔 다음 호텔을 찾아갔다. 하지만 호텔 측은 단수와 정전으로 청소를 하지 못해 예약자도 당장 입실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해보니 시리즈 47] 홋카이도 여행,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길거리에 나앉은 지 14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체크인해 방 안에 짐을 풀었다. 안심하던 찰나, 진도 5의 여진이 다시 찾아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돼 종일 속이 울렁거렸다.

모든 상점(심지어 편의점도)은 영업을 정지했고 온종일 먹은 것이라곤 물과 감자칩 뿐이었다.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전기가 들어와 다시 영업한다는 가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을 찾아갔다. 사실 너무 놀란 탓에 그렇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래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식당으로 향했지만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의 식사는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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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앞에 끝없이 줄 선 인파를 발견했다. 그 옆 건물에는 임시 멀티탭으로 휴대폰 충전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재난 상황에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1순위가 먹을 것이라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재해 관련 소식을 받고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휴대 전화'였다.

우리나라 삿포로 총영사관은 10여 개의 임시 대피소로 한국인들을 안내해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을 도왔고, 이틀 뒤부터 신 치토세 공항 국제선 터미널에서 영사지원 데스크를 운영했다. 다행히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안정을 찾았고 영업을 재개하는 식당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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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공포를 느낀 여행객들은 이틀 뒤 국제선이 열리자마자 앞다퉈 출국을 준비했다. 나 역시 일정을 앞당겨 가능한 가장 이른 시간에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다행히 출국 이전에도 이후 더 큰 지진은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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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상담을 가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지진 트라우마는 심했다. 멀쩡히 길을 걷다가 땅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조그마한 진동에도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진 대비가 취약한 우리나라에 강진이 찾아온다면 어떤 피해가 생길지 암담했다. 더구나 이미 포항과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우리나라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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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안전처 소방방재청은 과거 2012~2015년 서울시립대 산학협력단에 '지진재해로 인한 사회·경제적 피해예측 모델'을 의뢰한 결과 과거 조선 시대에 지진이 잦았던 수도권 부근에서 규모 7의 지진이 일어나면 2만7581명이 사망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포항 지진 이후 개정된 건축법령에 따르면, 내진 설계 기준이 강화돼 신축하는 모든 주택은 층수와 면적에 상관없이 내진 설계가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내진 설계 기준이 소급 적용되지는 않아 기준 강화 이전에 지어진 기존 주택은 지진에 취약하다.

결국 십여 년의 기한을 두고 (그 안에 강진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기존 건축물을 내진 설계가 강화된 건축물이 대체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시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난 재해 대피 훈련을 강화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인 대비책이 됐다.

지진을 겪은 뒤, 지난해 포항과 경주에서 지진으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의 공포에 더욱 공감하게 됐다. 예측할 수 없다면 꾸준한 안전 설계로 대비책을 세우는 게 최선이다. 홋카이도에서의 4일은 자연 재해의 공포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몸으로 깨달은 시간이었다.

만약 해외여행을 하다 강진이 발생할 경우, 책상 밑 등 낙하물에 다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몸을 피하고 현지 교통경찰 등의 대피 지시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나라 영사관이나 대사관의 조치를 확인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진 다발 지역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간다면 위급 상황을 대비해 현관 등 가까운 곳에 여권과 현금, 생수 등을 휴대할 수 있는 가방을 둬 빠르게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비책이 될 것이다.

YTN PLUS 정윤주 기자
(younju@ytnpls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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