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2018.09.23.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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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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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마다 미디어가 전하는 모습이 있다. 꽉 막힌 고속도로,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 여성들, 차례를 지내는 남성들, 긴 연휴를 틈타 해외로 나서는 인파로 붐비는 인천공항 등….

그러나 모두의 명절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명절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쉼에 충실한 홀로 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 매년 두 차례 텅 빈 서울을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는 여성

가족과 함께 사는 회사원 김모 씨(32세)는 연휴 전에 차례상을 준비해서 추석 연휴에는 쉬며 보낸다. 지난 주말에 미리 벌초하러 다녀오고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해놨다. 차례에 '얼굴만 내밀면 되는' 수준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일가 친척이 멀리 살고 있고 왕래도 별로 없어 가능한 스케줄이기도 하지만 가족끼리 보내는 차례상 준비만 마치면 그의 몫은 다 한 셈이다.

김 씨는 추석 당일 외엔 쉬지 않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당이 많아 혼자 밖으로 나가 독서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보낼 계획이다. 저번 설 연휴 때는 매일 같은 카페 같은 자리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김 씨는 연휴에는 오히려 도심으로 나가는 편이다. 혼잡한 것을 싫어하지만 "추석 연휴에는 서울이 텅 비어 쾌적하다"고 전했다. 단 서울로 귀향하는 차량이 많아지는 시기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김 씨는 추석이 가족과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추석이라고 요란스럽게 가족을 챙기는 것보단 모처럼 긴 연휴에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정화의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목표다.

"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 어차피 매년 똑같은 명절이니까 미련 없는 여성

전모 씨(55세)는 3개월 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이혼한 지는 8개월 되었다. 서울 근교에 본인 명의의 아파트에 사는 전 씨는 이번 명절에 친척들을 방문할 계획이 없다.

명절에 갈 시댁도 없어지고, 아이는 군대에 있고 본인은 퇴직한 상태여서 추석이라고 해서 특별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다만 건강을 위해 등록한 헬스장이 문을 닫고, 추석 연휴에는 만나줄 친구들도 없기 때문에 달리기와 함께 평소 보고 싶던 영화를 잔뜩 볼 계획을 세웠다.

전 씨는 결혼 생활 내내 시댁과 친정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해왔는데, 이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마음 놓고 친정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혼한 자신을 바라보는 친인척들의 수군거림이 싫어 이번에는 방문하지 않을 계획이다.

"아들이 독립하게 되면 흔히 말하는 독거노인이다. 주변에서도 그런 걱정을 많이 한다. 그래도 나쁜 면보다는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내 또래 주부들은 명절이 끝나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친구한테 시댁 욕하고 남편 욕하고…. 남은 차례 음식을 며칠씩 먹는다. 해봐서 안다. 외롭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만나면 형제끼리 갈등을 겪고 어떤 때는 소리까지 지르고 했던 명절이 훈훈한 가족 모임이 아니었다는 걸 떠올려본다."

전 씨처럼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한 작은 소모임들도 조금씩 생겨나는 추세다. 한국 여성 민우회는 정례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회원 소모임에서 추석 명절에 작은 행사를 열고 있다.

내용은 소모임 별로 다르지만, 몇 년 전에는 존경하는 여성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회원들끼리는 일종의 '불효녀 모임'을 열기도 하고 불공평한 상황에서 일상의 대응력을 높여가기 위해, '싸움의 기술'을 공유하고, 가정 내 성 평등 실험 후기를 논의하기도 한다.

소모임은 비혼이든 기혼이든 상관없이 한 '개인'의 자격으로 모이는 자리라는 것이 민우회 관계자의 말이다.

요즘에는 민우회 같은 단체뿐만 아니라 명절에 비혼여성이나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한 SNS 모임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차례 음식 안 만들어요" 명절을 걷어찬 여성들

◈ 오래 산 아파트 주민들끼리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여성

노인정 반장(?)을 맡고 있는 할머니는 전화통화에서는 "우리 ○○노인정은 자식 안 오는 사람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서울 강서구에만(2017년 말 조사) 독거노인은 1만 6천 명,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노인정에 출퇴근하는 어르신도 적지 않다.

노인정에서 자식이 명절에 오지 않는 유일한(?) 이 할머니(73세)에게 명절은 아파트 풍경부터 달라진 모습으로 찾아온다. 어르신이 많이 사는 작은 평수 아파트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주차장도 붐비고 낯 모르는 아이들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다. 주변 노인들의 손주들이다.

이 할머니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현관문을 열어놓고 복도로 신발이 늘어설 만큼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오는 노인의 집이다.

평소처럼 저녁을 일찍 먹고 TV를 볼 계획이고 특별한 일도 없다. 자신과 같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명절을 보내는 이웃들과 모일 예정이다. 소주 한 잔과 함께 각자 만들어온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평소 저녁과 다를 바 없다.

"명절에는 노인정 문도 닫으니까, 예전엔 혼자 차례 지냈는데 힘드니까 그런 것도 안 하게 되고..."

'정작 노인정에는 자식 안 찾아오는 노인이 없다 한다'고 전하자 "뭐 좋은 일이라고 떠들어 귀찮으니까 다들 가족 온다고 하지 뭐..."라며 말끝을 흐렸다.

구청마다 명절에 독거노인에게 안부 전화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만, 이번 추석에 노인을 위한 행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할머니는 그런 행사가 있다고 해도 나가지 않는다. 고맙지만 아직 거동도 불편하지 않고 주변에 아는 할머니도 꽤 있다.

이 할머니는 한 아파트에 오래 사는 노인이 많다 보니 그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아니까 자식이 안 오는 노인들끼리 자연스레 모이게 된다고 말한다.


YTN PLUS 최가영(weeping07@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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