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파일] IMF위기 극복의 견인차 강봉균 전 장관 별세

[인물파일] IMF위기 극복의 견인차 강봉균 전 장관 별세

2017.02.01. 오후 2:04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20년 전 국제통화기금, IMF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기였습니다.

외환 위기 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향년 74세로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강 전 장관은 194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돈을 벌며 공부해 늦깎이 대학생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 6회로 합격하면서 관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한강의 기적 시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경제기획원에서 초임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며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경제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유달리 많아 '꾀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었고 젊은 시절부터 가장 주목받는 경제관료로 꼽혔습니다.

40대에 이미 차관을 지내고 문민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에 오른 강 전 장관이 인생의 가장 빛난 시절을 보낸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경제의 최대 위기 때입니다.

강 전 장관은 외환위기와 함께 임기를 시작한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정경제부 장관을 잇따라 맡아 재벌 개혁,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고통스러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구조개혁을 하루빨리 끝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며 힘들었던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8월에는 재보선으로 고향인 군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18대까지 3선을 하며 당내 경제통으로 역할을 했지만 2012년 3월 19대 총선을 앞두고 친노 지도부는 강 전 장관에게 정체성이 부족하다며 공천을 주지 않았습니다.

강 전 장관은 친노 입맛에 맞는 좌파만 정체성이 있냐는 쓴소리와 함께 곧바로 정계를 은퇴합니다.

지난해 총선에서는 새누리당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되면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으로 영입된 김종인 전 위원장과 정치 진영을 바꿔 이슈가 됐습니다.

두 경제통의 경제공약이 맞붙기도 했습니다.

강 전 장관은 한국판 양적 완화 공약을 제시하며 김종인 대표의 '경제 민주화'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강봉균 /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 : 경제 민주화한다고 대기업에 족쇄를 채워놓고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해서 청년 일자리가 생겨납니까?]

3년 전부터 췌장암 투병을 해 온 강 전 장관은 최근까지 난국을 헤쳐나갈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외환위기 당시 경제 수장들의 기록인 '코리안 미러클4' 발간 보고회에 참석한 모습이, 경제 거목 강봉균 전 장관을 본 마지막 모습이 됐습니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