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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발자국] 시베리아의 페치카,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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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018-05-10 17:07
앵커


한민족의 이주 역사를 살펴보고 더 큰 코리아로 나가기 위한 교훈을 찾아보는 한민족 발자국.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연해주에서 거부가 됐지만 조국 독립과 동포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운동 대부이자 항일 기업인 최재형 선생, 차가운 시베리아 땅에서 난로처럼 동포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전해줘 시베리아의 페치카라고 불렸습니다.

한민족 발자국 다섯 번째 순서에선 지난 4월 서거 98주기를 맞은 최재형 선생의 삶을 돌아봅니다.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아아, 애달프도다. 내 동포여. 원한의 그 한마디. 우수리스크 하늘 아래, 일제의 총칼 앞에. 대한독립!"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순국 98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최재형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번 추모식은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국립현충원에서 진행됐습니다.

[인터뷰: 김 수 필 /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중국에 김구 선생이 있고 미국에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최재형 선생이 있다. 이렇게 대륙별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항일 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1860년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건너간 뒤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동의회>, <권업회> 등 항일 투쟁 조직을 만들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를 도왔습니다.

[인터뷰: 김 수 필 /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리 최재형 선생님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과 러시아 국교가 늦게 됐기 때문에."

최재형 선생은 30여 개 학교를 세워 동포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기념사업회는 고려인 학생 6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추모식에는 장학생들도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습니다.

[인터뷰: 최 엘레나 / 고려인·최재형 장학생]
"저는 고려인이라서 최재형 장학금이 저한테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 저는 최재형 장학금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너무 행복했어요. 등록금도 내고 다른 아르바이트도 안 해도 되니까. 공부에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 김 창 송 / 최재형 기념사업회 명예 이사장]
"(최재형 선생은) 이른바 사회 빈민들 내지 두만강 건너온 조선 동포들을 자기 가족같이 심혈을 기울여서 일자리 마련해주고 그 어린 아이들을 교육까지. 이 정신을 미약하나마 승계해야겠다."

조국과 동포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눈 최재형 선생을 한인들은 '페치카'라고 불렀는데요.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합니다.

한없이 따뜻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삶을 자세히 알아봅니다.

'1860년 8월 15일,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다'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분은 함경북도 경원 두만강 바로 근처입니다. 그쪽 지역에서 출생하셨는데 아버님이 그 당시 노비, 최흥백이란 분이셨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함경도라는 지역이 조선시대 때는 차별받던 지역인 데다가 집안이 그 당시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에서도 가장 천한, 노비 집안이셨고. 그런데 이제 이분들이 1868년도에 함경도가 흉년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분들이 야반도주를 한 거죠. 도주를 해서 그 당시에 먹고살기 위해서. 1860년대 중후반 최재형 선생이 9살 경에 러시아로 도주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 그래서 이제 최재형 선생이 처음으로 이주한 곳이 지신허라고 하는 그런 지역으로 도주를 하셔서 거기에 정착하면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쟁 특수로 러시아 거부(巨富)가 되다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분이 있던 러시아의 지신허라든가 이런 지역이 오늘날 지역으로 말하면 북한하고 러시아하고 중국의 국경지대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관련해선 러시아의 군사도시라 그럴까요? 그래서 군납업 이런 것들이 굉장히 활성화된 지역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걸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최재형 선생이 참 운이 좋았던 게 그 당시 1900년에 의화단 사건이란 게 있었고 또 1904년 5년에 러일전쟁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전쟁 특수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그게 이제 최재형 선생이 아마 돈을 좀 많이 벌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조금 더 역사학적으로 접근해보면 러시아 정부에선 러시아로 이주한 사람한테 무조건 러시아화 시키려고 그랬어요. 러시아 학교도 보내려고 하고. 최재형 선생이 최초로, 한국인 가운데서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그런 학생이었어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러시아말을 못하는데 이분은 러시아학교에 최초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어가 가능했던 점이 아마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고요.“

한민족이 살길은 '교육과 계몽' 강조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최재형 선생은 참 노비의 자식으로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러시아에 와서 러시아 학교 러시아어를 배우는 학교에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입학생이 됐습니다. 그런 교육과정을 통해서 본인이 성장했기 때문에. 최재형 선생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육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직접 체험했고. 수많은 한인 자제들한테 가능하면 많은 지식, 올바른 지식, 선진적인 지식을 가르칠 때만이 비로소 개인의 성장과 더불어서 한인사회가 성장할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들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교육시켰고 자기 지역뿐만 아니라 두만강 근처의 향산동이라는 데가 있는데. 바로 두만강 옆입니다. 지금 핫산 지구인데요. 거기도 학교를 만들고. 또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대동학교라고 해서 한인 최초의 학교. 또 블라디보스토크에도 만들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우리가 외교권을 일본한테 빼앗기잖아요.

대동공보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계몽운동도 최재형 선생이 1905년부터 10년 사이에 활발히 전개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신문을 통한 계몽. 좋은 글이라든가 좋은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우리 한민족을 보다 계몽시키고 강력한 한민족(을 만들겠다). 그래서 이제 이분이 러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의식을 가진 대표적인 신문인 대동공보 신문도 간행하고, 교육을 통해서 뭔가 민지(民智)를 개발해서 사람들, 우리 한인들을 보다 발전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안중근 의사의 숨은 후원자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의병투쟁의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동의회라는 조직인데 동의회라는 조직을 최재형 선생이 사실상 얀치헤에 조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총재가 돼요. 그리고 그 밑에서 활동했던 분이 우리 독립운동가 관련해서 너무 유명한 안중근 의사, 그다음 봉오동 전투와 관련해서 유명한 홍범도 장군. 이런 분들이 최재형이 만든 동의회에서 활동을 합니다.

국경지대거든요 그래서 거기가 두만강을 넘어서 수많은 국내에 들어가서 진공작전, 의병투쟁, 이것에 실질적으로 무기를 댄다든가 또는 의복이라든가. 여러 가지 활동 이런 걸 전체적으로 후원해주신 분이 바로 최재형 선생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너무나 유명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 그러한 모든 계획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최재형 선생이 후원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는 안중근 의사가 브라우닝 권총하고 리볼버 권총 두 자루를 갖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출발합니다. 그 총을 제공하고 이런 사람이 바로 최재형입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그 당시에 얀치헤 지역에 있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로 초청을 해서 그 당시의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모든 계획을 짰던 것이 바로 대동공보 사인데, 대동공보 사의 사장이 바로 최재형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모든 행동 준비라든가 저격 이런 것도 최재형 선생이 후원했고 뿐만 아니라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의 가족들이 안중근 의사 의거 후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해서 그분의 부인과 자제분을 러시아 연해주로 모셔서 안전하게 피신생활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안중근 의사 동생이었던 안정근과 안공근도 러시아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을 때 그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일본 총영사에 체포되었다가 여순감옥으로 이송되는데 그때 바로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 변호사를 파견했던 사람이 최재형입니다. 미하일로프라는 변호사를 파견해줬고.

또 안중근 의사의 모든 의거 소식이 최초로 전해진 곳이 바로 최재형 선생이 운영했던 대동공보입니다.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와 최재형과의 상호관계는 굉장히 밀접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끝까지 연해주 독립운동 현장을 지키다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국내외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서 재산가 가운데서 가장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1919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최재형이 재무총장이란 자리에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최재형 선생은 1919년 정도 가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우리 동포들이 20만 명 가까이 살고 있고 또 항일투쟁, 무장투쟁, 계몽운동의 역사적 현장이고. 그 현장을 떠나서는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하기는 어렵다고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위라든가 권위라든가 명예라든가 이런 것보다도 삶의, 투쟁의 현장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 이런 것들이 최재형으로 하여금 재무 총장이란 자리를 사양하고 바로 러시아 현장에서 투쟁하도록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4월 참변' 일제 만행에 희생되다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수많은 항일운동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지는데 그 배후에는 항상 최재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재형을 비롯한 러시아적인 항일운동 세력을 꺾지 않고는 참 어렵겠다는 생각을 일제가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일제가 1920년 4월 달에 보통 저희는 4월 참변이라고 부르는데 4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수색과 학살을 자행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저희가 4월 4일이나 5일경에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고요. 헌병대에 끌려가서 우수리스크 헌병대입니다. 우수리스크 헌병대에 끌려가서 최재형과 몇몇 동지들이 탈출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바로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 선생을 누구보다 먼저 체포해서 4월 7일 날 헌병대를 끌고 가서 총살시켰습니다.

시체에 대해서는 그냥 갖다버리는. 그래서 그분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제대로 묻히긴 한 것인지 전혀 지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 현재 한국의 동작동 현충원에 위패만이 모셔져 있는 그런 형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페치카' 최재형을 돌아보며

[인터뷰: 박 환 /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왜 그렇게 그분을 따뜻한 분이라고, 페치카라고 했냐.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중 가장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산 그분이 번 돈을 모든 동포와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쓰셨습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이야길 하잖아요. 가진 사람이면서도 그 당시에 물론 그분이 어렵게 고생하면서 크셨는데 러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한테 많은 부분을 베푸셨던 것 같아요. 특히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분이 공감하고 있고. 특히 본인이 워낙 어렵게 사셨기 때문에 어렵게 사는 분들에 대한 배려라든가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았던. 그래서 보통 그분을 애칭으로 애칭이라 그럽니다 그걸. 최 페치카, 페치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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