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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으로 돌아온 고려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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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017-07-06 15:46
앵커


전 세계 180개 나라에 걸쳐 있는 한민족의 이주 역사를 살펴보고, 더 큰 코리아로 나가기 위한 교훈을 찾아보는 한민족 발자국 순서입니다.

80년 전 강제 이주의 고난을 딛고 중앙 아시아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려인 동포들입니다.

오늘은 IOM(아이오엠) 이민정책연구원의 오정은 박사님과 함께 고려인의 이주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진행: 오 정 은 박사 / IOM 이민정책연구원]
안녕하십니까? 전 세계 180여 개국에서 생활하는 우리 한민족 그 한민족을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인은 누구일까요? 고려인은 과거 소련이라 불리던 그 지역에서 생활했던, 오늘날의 CIS 지역에서 생활하는 한민족입니다. 고려인들이 처음 CIS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세기 말 당시 조선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많은 농민이 한반도 북쪽에 있는 당시 러시아 땅으로 이주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CIS 이주사가 시작됩니다. 당시 많은 한인이 러시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언제부터 한민족의 이주가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기록은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19세가 말에 많은 한민족들이 이주했고, 특히 1864년 러시아에서 동아시아지역을 조사하면서 1864년 러시아의 라자노프 중위가 우수리 강 주변 한인들이 살고 있다. 한인들이 14가구가 살고 있다고 러시아 정부에 보고서를 쓰면서 당시부터 한민족이 공식적으로 러시아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1864년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 한인들이 해외로 이주한 공식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숫자이고 기록입니다.

우리 고려인의 이주사는 한민족의 전형적인 모습. 계속 더 넓은, 더 나은 삶을 때로는 강요되고 때로는 자신의 선택 때문에 이주해갔던 그래서 전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 한민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연해주에는 점점 더 많은 한민족이 모여듭니다. 일종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고, 코리아타운은 점점 많은 사람이 생활하는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이곳은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한반도에서, 한반도의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하나의 기회의 땅으로 비쳤고, 연해주는 한반도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활용됩니다.

당시 많은 애국지사가 연해주에 코리아타운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다시 독립시키고자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당시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굉장히 유명한 분들인데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분들이 대부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의병장인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용 등 애국지사들 그리고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위종 또 민족교육가였던 이동영, 정순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국민회의를 창간했던 정재관, 이관, 김성무. 식민 회에서 활동했던 안창호, 이종호, 이각, 조성환, 유동열.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박은식, 신채호.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동휘, 백순, 그 밖에도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가고자 연해주 한인사회 지도자 역할을 하셨던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김항만 등 많은 사람이 연해주를 근거지로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하지만 연해주를 근거지로 우리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걸 일본이 모를 리 없겠죠. 이것을 눈치챈 일본은 신한촌 참변이라는 한민족 독립운동사에 정말 슬프고, 역사적인 사건을 저지릅니다. 신한촌 참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것을 근거로 일본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초토화한 사건입니다.

일본과 러시아 적군에 긴장 관계가 극에 달하던 시절. 러시아 적군을 공격한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한민족까지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많은 한민족 애국지사들을 체포하고,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한인들을 체포하고 민간인을 학살했고 한인들의 무기를 몰수하면서 신한촌을 초토화합니다.

하지만 고려인 사회의 어려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1937년 당시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 일본과 독일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던 상황 당시 소련 정부는 일본과 독일이 점차 점차 전 세계에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특히 동아시아지역에서 많은 일본군이 진출하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러시아 영역 안에 있는 이민족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특히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일본의 스파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죠.

이에 두려움을 가진 소련 정부는 동아시아지역의 한인들을 일본 근처에서 먼 곳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1937년 9월 소련 정부가 결정한 극동지역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결정입니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는 한반도 근처였지만, 소련은 한반도에서 거의 6,000km 떨어진 먼 곳으로 한인들의 강제이주 계획을 세웁니다. 많은 한인을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시킵니다.

이렇게 이주 된 한인들이 18만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먼 길에 이주당한 당시 많은 한인은 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련의 명령에 따라서 기차를 타고, 언제 멈출지도 모르는 긴 여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기차역의 편안한 기차도 아니고 짐처럼 화물칸에 실려서,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화물차 안에 꽉꽉 채워진 상황에서 전염병이 돌았고 음식이 부족해서, 죽는 사람이 나타나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한 달 가까운 여정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고려인이 처음 강제로 이주당해 기차에서 내려졌던 지역입니다.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라는 지역이고요. 여기 고려인들이 비석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원동, 고려인 입장에서는 먼 극동이 아니라 먼 동쪽, 원동에서 강제 이주 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에 내려서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입니다.

처음 기차에 내려진 고려인들은 집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없는 곳에 그냥 기차에서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월 추워지는 겨울을 맞으면서 많은 고려인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땅을 파고 토굴을 파고 그해 겨울을 지냈다고 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었고, 하지만 살아야 했기에 이 지역에서 토굴을 짓고 살았습니다. 또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삶을 연명하면서 다음 해 봄을 맞이했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려인들은 열심히 사는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여기 사진은 우리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지였던 우슈토베 지역에 조성한 한인 공동묘지입니다. 고려인의 역사를 이곳부터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려인들은 낯선 영토, 척박한 땅과 어색한 농사환경, 그리고 말이 안 통하는 민족들 사이에 섞여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그리고 이 집단농장에서 생산력이 높고 성실하고 모범적인 농부로 성장합니다.
나아가 열심히 러시아어를 공부해 소련의 시민으로 성장합니다. 2세 교육에 적극적으로 헌신했고, 2세 3세를 거치면서 한민족 고려인들은 소련의 중앙정부에 진출하고, 전문 인력으로서 성장하면서 농부에서 고급인력으로 성장한 모범 민족이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한민족에게 어려운 시기를 살아나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요, 이 과정에 한국어를 상실하는 그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는 고려인들이 처한 새로운 어려움, 그리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고려인들의 슬기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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