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바람 불어 좋은날

[한국영화 걸작선] 바람 불어 좋은날

2018.09.01. 오후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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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무참하게 짓밟은 신군부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꺾으면서 시작됐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암울했지만, 한국영화계에는 새로운 재능을 가진 감독들이 꾸준히 좋은 작품들을 선보였는데요.

이장호 감독이 그 선두에 서 있었죠.

오늘 한국영화 걸작선에서 소개해드릴 영화는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풍경을 대단히 신랄하게 포착해 주목을 끌었습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날', 지금 만나보시죠.

영화의 도입부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세 명의 청년, 덕배와 춘식, 길남이 갖은 고생을 하며 일하는 장면을 익살스러운 톤으로 보여줍니다.

원래 농촌이었다가 재개발로 도시로 변한 서울의 변두리 마을이 이 영화의 배경인데요.

각자의 고향에서 상경한 세 젊은이들은 밑바닥 생활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갑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위안을 삼죠.

[길남 : 야, 너 어렸을 적에 개구리 넓적다리 구워 먹던 거 생각 안 나냐?]

[덕배 : 맛있지. 닭고기랑 한 가지야.]

[춘식 : 이 녀석들 또 비위 상하게 만드네.]

덕배는 다툼을 벌이던 상류층 젊은이들 때문에 배달 중인 음식을 엎어 버리는 낭패를 당하고.

그들의 다툼에 끼어드는데요.

[덕배 : 음식값 좀 물어주시오.]

덕분에 남자에게 모욕을 당하는 덕배.

[명희 : 10만 원짜리 바꿀 것 있어요? 어느 집이죠? 어느 집에서 일하냐고요.]

이 대목을 통해 빈부의 격차, 계층 간의 골이 깊어진 한국 사회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죠.

춘식은 같은 이발소에서 일하는 미스 유를 좋아하지만, 역시나 가난한 처지의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 입장이 못됩니다.

[미스 유 : 얘, 춘식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어머 얘 내려와!]

[춘식 : 미스 유! 미스 유! 사랑해.]

[미스 유 : 뭐라고?]

미스 유는 그러나 이발소 단골이자 부동산 부자 김 회장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김 회장 : 미스 유. 춤출 줄 알아?]

[미스 유 : 아니요. 못 배웠어요.]

[김 회장 : 저런. 요즘 여자가 사교춤을 못 춰서 쓰나. 어때. 배울 마음 없어?]

[미스 유 : 뭐, 배우고는 싶지만….]

[김 회장 : 됐어. 오늘 밤부터 당장 시작하는 거야.]

미스 유는 춘식을 마음에 품고 있지만, 병중인 아버지 수발과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김 회장의 첩이 되고 맙니다.

한편, 덕배는 같은 중국집에서 일하는 소년에게 서울 살이에 대한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주는데요.

[덕배 : 참고 살아야 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벙어리인 척. 나 말 더듬지 않을 수 있어. 그런데 서울 와서 몇 년 고생하고 보니 뱉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어디 할 수가 있어야지.]

이 대사는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데요.

누군가의 피고용인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는 하층민의 경제적 사정과 당시의 억눌린 정치적 상황을 동시에 은유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풍자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요.

앞서 덕배와 우연히 만났던 상류층 명희가 덕배를 불러내 유혹하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명희 : 뭐하고 있어요? 어서요.]

[덕배 : 진심인가요?]

[명희 : 아이, 빨리요.]

[덕배 : 정말로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명희 : 아이 참, 어서요. 아하, 재미있어.]

[덕배 : 그럴 줄 알았어.]

[명희 : 덕배 씨, 날 찾아봐요.]

[덕배 : 날 장난감으로 알고 있나 봐.]

"날 장난감으로 알고 있나 봐."

덕배의 이 자조적인 한 마디는 계층 사회에서 하층민이 받는 대우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자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이장호 감독의 논평이기도 합니다.

요즘 말로 갑질이라고 하죠.

돈 없고 어눌하다는 이유로 감정 노동을 강요 받아야 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더욱 특별한 리얼리즘 영화로 탄생시켰습니다.

세 청년의 엇갈린 운명 속에서 고단한 서울 살이의 단면을 흥미롭게 펼쳐 보인 영화,

'바람 불어 좋은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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