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화녀

[한국영화 걸작선] 화녀

2018.06.02. 오후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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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배우들 가운데 최근까지도 TV나 영화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분들이 있죠.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배우, 바로 올해 71세의 윤여정 씨입니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데요.

오늘 한국영화 걸작선에서는 바로 윤여정 씨의 영화 데뷔작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24살에 출연했던 김기영 감독의 1971년작 '화녀'인데요.

신인답지 않게 과감하면서도 농익은, 윤여정 씨의 명연기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영화 '화녀'는 한 가정집에서 벌어진 두 남녀의 살인 사건 현장에서 시작합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강도 살인으로 결론 내립니다.

경찰: 증거는 충분해
강도: 제가 했습니다. 사람도 죽이고 물건도 강탈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증인이 나타나면서 사건의 진실은 미궁에 빠지죠.

경찰: 직업은? 증인: 바 여급
경찰: 죽은 여자와는? 증인: 촌에서 같이 가출했어요.
경찰: 난 촌에서 올라온 여자에게 적극 반감을 갖는다. 기껏 한다는 짓들이 음탕한 직업뿐이야.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농촌의 젊은 여성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들고, 많은 이들이 유흥업소 접대부나 공장 노동자로 일했던 당시 사회상을 드러내는 대목이죠.

경찰의 대사를 통해 그들 여성을 비하했던 시대 분위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이제 영화는 두 시골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친구: 다방, 바, 돈벌이라면 뭐든지 해 명자: 난 옳게 사는 집 식모살이를 할 테야. 잘 사는 법을 지켜보고 배운단 말이야.

직업 소개서에 간 두 여성.

명자의 친구는 원했던 대로 바에서의 일자리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명자는 어느 중산층 가정에 식모로 가게 되죠.

정숙: 우리 집은 닭을 쳐서요, 닭고기하고 계란은 흔해 빠져요.
구직자: 어머 닭 시중까지 하랍신다 명자: 저 닭 길러 봤어요.

이렇게 명자가 오게 된 집은 꽤 잘 나가는 작곡가 동식의 집.

동식: 여보, 당신도 지쳤구려.
정숙: 다행히 식모를 잘 둬 한결 나요 동식: 어디서 그런 촌닭을 구했지?

동식은 시골 출신의 명자를 은근히 깔보는 눈치인데요.

명자: 제가 내일 찬밥 찌꺼기로 동동주 만들어 드릴 테니까 잡수어 보세요. 이게 술이에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주인집을 도와주는 명자.

그런데 어느 날 동식의 아내 정숙이 친정집에 간 사이,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동식의 곡을 탐낸 가수 지망생 혜옥이 그를 유혹하고.

혜옥: 전 작곡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몸이에요.

명자는 주인집 여자가 미리 부탁한 대로 이 상황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동식이 이성을 잃어버리고, 명자를 혜옥으로 오인한 그는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죠.

이날 밤의 상황으로 인해 명자는 아이를 갖게 되는데요.

주인집 부부는 명자에게 낙태를 강요합니다.

그날 이후, 명자는 동식 부부에게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명자: 내 애를 죽였으면 이 집 애도 마땅히 죽어야 돼요.
정숙: 얘, 명자야. 너 미쳤니?

동식의 어린아이를 숨지게 한 명자는 더 나아가 독기를 품은 채 이 집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명자: 이거 한 병이면요, 닭도 백 마리나 죽인대요.
명자: 앞으로 죽는 건 닭뿐이 아니에요. 내가 닭 먹이가 되기 전에 다 죽여요. 다 죽여

여기까지의 줄거리는 '하녀'라는 작품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하녀'가 핍박당한 하층민 여성의 일방적인 복수극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 '화녀'에선 명자와 정숙 사이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극 후반부를 이끄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정숙 역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명자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죠.

두 여성의 대립하는 음모에 엽기적인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서스펜스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도 컬러 영화가 본격화되면서 김기영 감독은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보여주는데요.

세트와 소품에 욕망과 파국을 동시에 상징하는 붉은색을 자주 활용했습니다.

명자의 광기 역시 빨간색 옷을 통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슬라이드 화면을 활용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등 김기영 감독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습니다.

TBC 공채 탤런트로 활약하다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한 윤여정은, 광기와 히스테리를 품은 여성의 심리를 탁월한 연기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은 물론, 시체스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되죠.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 시절.

일찌감치 배우 윤여정의 진가를 증명한 영화, '화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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