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2018.04.14. 오전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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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인 지위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성평등 지수는 여전히 비교적 낮은 수준입니다.

영화는 어떤 시대의 여성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참고서가 돼주기도 하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1960년대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가부장제적인 전통에 갇혀 있지만, 욕망의 주체로서의 근대적 여성상이 엇갈리면서도 공존하는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여섯 살 옥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옥희: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을 과부집이라고 부른답니다. 과부가 뭔지 난 잘 몰라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물어봤더니 남들은 아버지가 있는데 나는 아버지가 없다고요.

아빠 없이 자랐지만 옥희는 스물여덟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는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아이입니다.

어느 날, 이 집에 손님이 찾아옵니다.

옥희 외삼촌이 자신의 친구를 데려오는데요.

옥희 외삼촌 : 저, 일전에 말씀드린 한 선생입니다.
한 선생: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폐를 끼치겠습니다.
옥희 할머니: 뭘요.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으실걸.
옥희 외삼촌: 저 그리고 내 누이동생일세.

그림을 그리는 한 선생은 이렇게 이 집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하는데요.

유교적인 전통이 여전한 시대.

낯선 남자 손님의 방문에 옥희 엄마는 껄끄러운 기색입니다.

하지만 아빠 없이 자란 옥희는 왠지 한 선생이 좋습니다.

한 선생: 이 그림책 옥희 줄까?
옥희: 정말?
한 선생: 응. 가져.
옥희: 싫어.
한 선생: 왜 그래?
옥희: 엄마한테 혼나.
한 선생; 괜찮아. 아저씨가 주는 건데 뭐.
옥희: 고맙습니다. 그 대신 엄마보고 아저씨 맛있는 반찬 해드리라 그럴게.
한 선생: 그럼 못써.
옥희: 왜 못써?

이렇게 옥희는 사랑방 손님 한 선생을 친아빠처럼 따르는데요.

옥희: 말이지.
옥희 모: 너 그게 뭐냐?
옥희: 사랑 아저씨도 말이지. 나처럼 삶은 달걀 제일 좋아한대.
옥희 모: 너 그런 못된 짓 할 테냐?
옥희: 싫다는데도 자꾸만 줬어. 엄마. 아저씨도 나처럼 삶은 달걀 좋다고 엄마한테 그렇게 일러주랬어.

옥희는 사랑방의 한 선생과 엄마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의 매개 역할을 하는데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옥희만 바라보고 살아온 옥희 엄마도 서서히 한 선생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됩니다.

그걸 눈치챈 것일까요? 옥희는 엄마에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옥희: 엄마, 말이지. 이 꽃 사랑 아저씨가 줬어.
옥희 모: 사랑 아저씨가? 옥희: 응. 엄마 갖다 주라고.

딸의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꽃 선물을 한 선생이 준 줄로만 아는 엄마.

옥희 모: 옥희야.
옥희: 응?
옥희 모: 너 이 꽃 얘기 아무 보고도 하지 마.
옥희: 왜 하지 마?
옥희 모: 글쎄 엄마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
옥희: 할머니한테도?
옥희 모: 응

바로 이 대목에서 여성의 수절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과, 슬며시 연정이 피어나는, 그러니까 여자로서의 옥희 엄마의 욕망이 묘하게 교차 됩니다.

옥희 엄마는 한 선생에게 받은 꽃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남편을 잃은 뒤 처음으로 연주를 합니다.

이 연주를 통해 영화는 옥희 엄마의 마음속에 한 선생을 향한 설렘이 슬며시 피어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방에 앉아 옥희 엄마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는 한 선생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옥희 엄마의 피아노에 마치 답례라도 하듯, 한 선생도 옥희 엄마에 대한 애틋하고도 남모를 감정을 그림으로나마 달래 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가슴에 품은 연정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옥희 엄마의 답답한 심리는 이 대목에서 상징적이고도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옥희: 아저씨가 그린 엄마 얼굴 봤어?
옥희 모: 뭐? 엄마 얼굴을 그렸어?
옥희: 응. 똑같은데 엄마하고 눈 있는 데가.
옥희 모: 아저씨 얘기 하지마 이제.
옥희: 왜 하지 마우? 아저씨가 밥값 안낸다고 미워졌수?
옥희 모: 그래. 아주 미워서 내보내고 말겠다.

옥희는 한 선생과 엄마 사이의 사랑의 가교역할을 이어갑니다.

옥희: 엄마가 지금 가만히 그러는데 아저씨 밥값 안 내면 내보낸다는 건 거짓말이래.
한 선생: 그래?
옥희: 우리 엄마 거짓말 참 잘하지?
한 선생: 정말, 엄마의 마음은 알 수 없구나.

정말 알 수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라던가요?

영화는 이렇게 전통적인 가치와 자신의 주체적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아슬아슬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상황.

과연 두 사람의 순정은 여성을 가둔 가부장제의 장벽을 뛰어넘어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1935년 일제 강점기 때 발표된 주요섭의 소설을 1961년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문예 영화인데요.

원작을 단순히 영화로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밀고 당기는 연정의 심리를 탄탄한 멜로 드라마의 구조 안에 훌륭하게 담아냈습니다.

옥희 엄마를 탁월하게 연기한 여배우 최은희는 이 영화를 연출한 신상옥 감독과 부부 사이였는데요.

나중에 이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나란히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8년 만에 탈출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옥희를 연기한 전영선은 이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아역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전통의 굴레와 새로운 시대의 여성상이 충돌하면서도 타협했던 시대의 우아한 풍속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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