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코리아 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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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오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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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1세.

20세기 초중반 고국을 떠난 이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지켜왔을까요.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차별 그들의 굴곡진 삶에 대해 들어봅니다.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참다운 것을 침해당하는 데 반대하려는 의지입니다. 시라는 게. 사상을 무릅쓰고, 정치적 사상을 무릅쓰고 참다운 것.]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해방된 지) 열흘 정도 지나고 온 나라가, 동네가 떠나갈 듯 환희에 넘쳤죠. 하루 종일 '만세' 소리가 들렸고. 대중들 속에서 학생이나 청년들이 교통 정비로부터 시청, 구청 업무까지 다 했고 당시 우리나라에는 자치 정부가 없었으니까. 미군 위촉을 받은 일종의 행정기관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순식간에 군정을 펴 우익이 활보했고 미군에 의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커졌어요. (우익 단체의) 백색 테러가 자주 일어났어요. 그런 것들이 쌓여 4.3 사건이 일어났죠.]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관탈도라는 섬이었는데, 마치 일본 후지 산처럼 보이는 바위섬이야. 거기에 나흘 동안 숨어있었어요. 사흘째 일본으로 갈 여객선이 온다고 했는데 안 왔고, 나흘째 밤에 (왔어).. 인생에서 그렇게 하루가 길었던 적은 없었지. 춥기도 했고. 마이코(오사카 인근의 소도시) 바닷가로 오니까 (함께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싹 흩어져 사라져버렸어요. 나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었죠. 사람이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는지 몰랐어요. 여기가 어딘지 몰랐고.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고. 그러다가 같은 배로 온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따라 (오사카로) 가서, 자이니치(재일동포) 생활이 시작됐지요.]

밑바닥 자이니치의 삶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문명국이고 일본에서는 동포들도 꽤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또래 동포 중에서는 초등학교도 못 다닌 아이들이 많았어요. (공동주택에) 수도가 하나만 있었고 그 공동 수도에서 좀 떨어진 데에 공동 화장실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오수가 공동수도 쪽으로 흘러넘치더라. 그런 데서 자랐어요. 끔찍했죠. 정말로. (오사카에 와서) 태어나고 처음으로 노동이라는 걸 했는데. 양초 공장에서. 하숙하면서 일할 수 있는 데를 찾아갔는데, 그게 이카이노 1가의 양초 공장이었어. 말이 공장이지 빈 땅에 지붕을 세우고 양철로 만든 것인데, 단조로운 일이었지만.]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이승만 정권이 4.19 학생혁명 때 무너지고, 그래도 전두환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군사) 정권이 계속되니까. 만약 내가 한국에 가면 맨 먼저 KCIA(현 국가정보원)에 잡혀갔겠죠. 뭐 입국비자도 못 받았을 거에요, 내가 가려 해도.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못 뵈었고,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죠. 달보다 먼 곳이었어, 한국은.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은.]

49년 만의 귀향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김대중 정권 때 임시여권(여행증명서)을 받을 수 있어서. 내가 (제주도에) 가면 많은 비난을 받을 거라 생각했어요. '못된 놈'이라며. 주의나 사상이 그렇게 중요하냐'면서 욕먹을 게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제주도에서) 친척들이 비난하기는커녕 '잘 살아 돌아왔다'면서. 아무도 나를 꾸짖는 사람이 없었던 게 또 괴로웠지요. 덩굴이 얽혀진 안에 아버지 어머니 산소가 있더라. 소리치고 울었다. "아버지가 말이야, 내가 아는 범위에서, 아버지만큼 술고래는 없었어. 정말 술을 좋아하셨어. 그 아버지께 술 한잔이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못 드렸어. 심지어 어머니께 물 한잔, 차 한잔 드린 적 없었어. (그게 항상 가슴에 남아 계세요?) 그렇지. 밤낮으로 (부모님) 사진을 보잖아. 인사드리고.]

일본어로 일본어에 저항하다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나는 일본 국민이 아니고, 좋든 싫든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해방 후) 손톱으로 벽을 긁듯 한글을 배웠죠.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어요. (하지만) 나의 의식이라는 건 일본어로 만들어져 있던 셈이야. 언어라는 건 인간의 의식이기도 하거든.일본어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언어잖아요. 우리나라는 해방돼서 일본어와는 인연이 끊어졌겠지만, 일본에서 살면서 여전히 그 언어로 살고, 글을 쓰게 된 것이죠. (해방된 지) 70년 이상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요. (그래서) 매끄러운 일본어는 쓰지 말자는 것이 일본어에 대한 나의 의지예요. 내 일본어는 매우 투박하고 읽기 힘든 것이에요. 나는 나 스스로를 만든 일본어에 보복을 하고 있는 셈이죠. 참다운 것을 침해당하는 데에 반대하는 의지입니다. 시라는 게. 사상을 무릅쓰고, 정치적 사상을 무릅쓰고 참다운 것.]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할 때를 그저 헛되이 보내고만 있다. 36년을 거듭하고서도 아직도 나의 시간은 나를 두고 간다. 저 멀리 내가 스쳐 지났던 거리에서만 시간은 활활 불꽃을 돋우며 흘러내리고 있다.]

김시종 『광주시편』'바래지는 시간 속(褪せる時のなか)'에서

[김시종 / 89세. 재일동포 1세 : 나는 조국의 결정적 순간에 일본에 도망 와서 본국에서 여러 가지 민중 투쟁이 일어났을 때 언제나 일본에서 살고 있고 그랬어요. 그러면 왜 (나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사느냐, 그런 생각을 해야죠. 내 나이가 90이 되어서 내일모레 저 세상 가는데, 그런 것(일본에 사는 것)에 대한 뜻을 밝히는 데 나머지 생을 보낼까 싶습니다. 일본에 살 수밖에 없는 놈이 일본에 산다는 뜻을, 또 내가 일본에 산다는 뜻을 연달아 집요하게 써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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