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연속기획 - 재일동포 1세의 기록 ③양성종

신년 연속기획 - 재일동포 1세의 기록 ③양성종

2018.01.20. 오후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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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2월 18일 출생 제주도 출신 10대 중반 일본 도쿄로 이주 1985년 탐라연구회 발족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제주도 사람들은 옛날에 제주도에서 했던 방법으로 장례식이나 혼례식을 하고 싶은 거야.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니까 잘 알고 있고. 그걸 계속하자는, 모를 때는 알려주자는 마음이 항상 있어요. 지금도 계속되어 있어요, 나에게는. 그러니까 나는 재일 제주인입니다.]

[양성종/ 재일동포 1세]
"서울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녔어요. 그런데 1950년에 6.25(한국전쟁)가 일어나잖아요. 전쟁 때, 그때가 5학년입니다. 맥아더(사령관)가 인천 상륙해서 (1950년) 9월 조금 지났을 거야. 그래서 한강 다리 넘어야 남쪽으로 가잖아, 서울에서는. 그때는 한강 다리가, 이승만(대통령)이 남쪽으로 도망가면서 다리를 부쉈잖아. 그러니까 철골만 남아 있었어, 한강에.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고 가운데로 가면 무서운 거지. (몸이) 무겁기도 하니까.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억나요. 먹을 것도 없어요.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거기(서울)에서 조금 생활하다가 나의 고향, 제주도에 내려갔어요.]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피난 가신 거에요?) : 피난, 고향에 갔죠. 피난이지만 고향이니까. 고향에 가면 밭이 있으니까. 먹을 게 있으니까. 거기서 약 1년간 (살았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가 일본에 오라고 해서 배 타서 일본에 왔어. 어릴 때는 무서운 존재니까, 아버지는. 별로 좋은 추억도 없고. 어머니도 서울에서 돌아가셨고. 일본에 와서 아버지가 가장 (강요한) 것은 '한국어는 쓰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학교에서는) 조선인이라는 걸 내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구박받는 게 있잖아요? 있었지만 저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그렇게 많이 구박받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고. 일본인한테 지지 말자는 게 항상 머릿속에 있었어요.]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학교에서) 일본식 이름을 쓰셨어요?) 그런 시절도 있었죠.]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친한 친구들에게는 본인이 조선인이라고 (말했어요?)) : 어릴 때 친구들에게는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고. 숨기지 않았지만, 굳이 말할 것도 없었어요.]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제주도) 친목회라는 것이요, 친목회 멤버가 돌아가시거나 결혼식 하려면 전부 다 모여서 장사 지내 드리고요. 제사 지내는 것도 여기 있는 사람들 잘 모르니까 노인네 찾아가서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물어서 듣고. 저보다 여섯 살 위인데 김민주 씨라고. 그 선배하고 (친목회에서) 만나니까 얘기가 통하는 거야. (김민주 씨가) 책을 두 권 줬어요. 제주도에 관한 책인데 읽어보라고. 그 책을 (읽고) 감동해서 제주도 연구를 시작한 거예요. 바로 그 책 때문에 저는 제주도 (연구를) 해보자고 한 거예요. 그 선배하고도 (의향이) 맞고. 그것이 1985년입니다.]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들이 의기투합한 탐라연구회는 1985년 본격적인 제주도 연구를 시작했고 1989년에는 학술지『제주도』를 창간했다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1900년대 (한반도가)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사람들이 여러 조사 사업을 하러 (조선에) 들어갔거든. 그때 조사하던 사람들이 결국 (제주도) 연구를 하게 됩니다. 거기에 학자들도 같이 모이게 되고. 그래서 쉽게 말해서 언어, 제주 방언에 대해서는 우선 일본학자가 (연구를) 시작합니다. 제주대학 선생들도 제주도에 관해서 알려면 일본학자들이 쓴 논문부터 읽어야 해. 그것이 일본어로 되어 있고 알고 보니까 일본 대학에도 많이 있는 거야.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 저의 테마, '일본에서의 제주도 연구'입니다.]

『제주도』 5호(1992년) 중 양성종 '일본에서의 제주도 연구의 현황'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왠지 모르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옛날에 제주도에서 했던 방법으로 장례식이나 혼례식을 하고 싶은 거야. 제사상의 진열 방법도 그렇고.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니까 잘 알고 있고. 그걸 계속하자는, 모를 때는 알려주자는 마음이 항상 있어. 지금도 계속되어 있어요, 나에게는. 그러니까 나는 재일 제주인입니다.]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나는 일본에 안 왔으면 제주도에서 아마, 지금쯤 아마 과수원을 했을 거야. 성격에 맞으니까 그런 것이. 아마. 지금 가만히 조용히 생각하면 저는 일본에 안 오고 제주도에서 과수원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생활하면 (좋겠어요).]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고향에 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돌아가고 싶어요. (후손들에게) 뿌리는 제주도에 있다는 걸 알고 살아달라고 하고 싶어요. 집에서도 제사는 그 때문에 지내고 있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나는 손자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정할 필요는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래도 자기 뿌리는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양성종 씨는 2017년 12월 29일 제주도 성묘를 일주일 앞두고 타계했습니다.

고인은 고향인 제주도에 묻혔습니다.

故 양성종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양성종 / 재일동포 1세 : 뿌리를 감출 수도 없고 감출 필요도 없으니까 당당하게 얘기하고 살았다고, 할아버지는. (후손들이) 그렇게 얘기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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