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걸작선 '삼등과장'

한국영화 걸작선 '삼등과장'

2018.01.01. 오후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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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든 영화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 이후부터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1년 사이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들은 다른 시대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영화는 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설렘이 듬뿍 묻어나는 작품입니다.

김승호, 황정순, 도금봉 주연의 영화 '삼등과장'입니다. 지금 만나보시죠.

삼천리 운수 주식회사의 동부영업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구준택.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막내딸 영희가 자신의 회사로 첫 출근하는 날 아침.

[준택 부: 옛날 같으면 계집애를 일터에 내보낸다는 것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못 된다오.]

[준택 모: 그래서 당신더러 애들이 봉건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툭 하면 옛날 같으면, 옛날 같으면. 어이구. 그래도 좀 몸이 아프면 주사다, 의사다 신식을 찾으면서.]

준택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누는 이 대사는 봉건적인 가치를 구식으로 여기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데요.

집안에서는 존경받는 아버지이지만, 영희는 첫날부터 하필 민망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송 전무: 아니, 며칠 굶었소? 나도 점심을 안 먹었는데. 진부리에서 굴러떨어졌다면서?]

[준택: 아 네. 사실은 저.]

[송 전무: 사실은 저가 뭐야. 아니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점심밥이 넘어가오? 아니 그러고도 당신은 출장소 소장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버지가 직장 상사에게 문책을 당한 모습을 지켜본 영희.

준택으로서도 딸 앞에서 여간 망신스러운 게 아니겠죠.

[준택: 이 아비의 꼴을 보고 너 실망했지?]

[영희: 실망이라뇨? 난 아버지의 그러한 성격이 싫어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비굴하기 때문이에요.]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이죠.

이런 가운데, 송 전무는 자신의 내연녀를 위해 댄스 교습소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송 전무: 동부출장소 2층에 남몰래 차려 놓으면 나도 안심이 되고. 그리고 사원들의 교양 향상에도 도움이 될 거고. 일거양득이란 말이야.]

[준택: 네. 알아듣겠습니다.]

[송 전무: 근데 그걸 어떻게 기술적으로 해봐야 하겠다는 말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저 사람하고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거로 하고 저 사람을 아는 건 나 아닌 구 소장이 아는 거로, 이렇게 해봐야 하겠다는 말이야.]

한편, 대학 졸업반인 큰 아들 영구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여성과 연애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요.

[영구: 먹는 자유, 말하는 자유. 이것이 입의 자유야. 입의 자유를 막는 자 누구냐.]

4.19 혁명 직후의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사입니다.

댄스 교습소를 차려준 공로를 인정받아서였는지, 준택은 드디어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준택: 정말 모두들 고마워요. 25년간의 성실한 내 공로가 인정받게 된 것이 정말 고맙단 말이야.]

[준택 부: 그러니까 25년 만에 과장이 됐으니 국장이 되려면 50년 있어야 하나?]

[준택 모: 아이고. 그만두고 고기나 잡수세요.]

승진의 기쁨도 잠시, 송 전무의 내연녀를 위한 댄스교습소는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문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요.

[영희: 적어도 농구보다는 차라리 댄스 같은 것이 문화적인 것이죠. 뭐.]

[오철: 아니, 유한계급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하는 댄스 따위가 문화적인 겁니까?]

[영희: 흥. 그래서 출장소 2층의 댄서 하고 문화적으로 교제하시는군요.]

[오철: 뭐? 닥쳐?]

[영희: 어머. 이게 뭐예요. 신사답지 못하게. 예이.]

오해의 불똥은 급기야 준택에게까지 튀고 맙니다.

송 전무의 내연녀가 준택의 내연녀로 둔갑하고 만 것이죠.

[아내: 난 정말이지 당신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준택: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송 전무 처: 구 과장님, 그게 무슨 짓이에요? 다 큰 아들 딸을 두고서.]

[준택: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을 수가…. 잘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만.]

[송 전무 처: 동부출장소 2층에 댄서를 잘 아신다죠?]

송 전무와 관련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난처한 입장.

구 과장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성실하고 선량한 가장을 둘러싼 해프닝을 펼쳐 보이고 있는 영화 '삼등과장'은 4.19 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종 유쾌하고 밝은 톤을 보여줍니다.

젊은 세대의 가치관과 자신감도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죠.

[영구: 학생이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4.19 혁명은 우리가 일으키지 않았어요?]

길고 긴 군사 정권에 의해 좌절된 표현의 자유가 잠깐 만개했던 시절의 축가. 영화 '삼등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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