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귀로'

[한류우드] 한국영화 걸작선 '귀로'

2017.11.18. 오전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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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영상 언어로 이야기를 건네는 감독들을, 우리는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릅니다.

한국영화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도 스타일리스트가 있었는데요.

바로 이만희 감독입니다.

대사나 스토리 만큼 영상을 중요시했고, 함축적이고도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미학을 만들어냈던 감독입니다.

이번 주 한국영화 걸작선에서는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 영화 '귀로'를 만나 봅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하반신 마비가 된 퇴역 장교 동우.

헌신적인 아내의 보살핌에 힘입어 살아갈 힘을 얻는데요.

[동우: 여보.]

[아내: 일어나셨군요.]

[동우: 당신이 계단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지.]

[아내: 삐걱 소리가 굉장히 나죠? 계단 좀 수리해야겠어요.]

[동우: 그럴 필요 없소. 난 바뀌는 게 싫으니까. 언제나 난 당신이 이리로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있거든.]

매주 경인선 열차를 타고 남편 동우가 쓴 연재 소설을 신문사까지 직접 가지고 가는 아내.

그러던 어느 날, 신문사 부장은 그녀에게 동우의 소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부장: 유감된 말씀입니다만, 부군의 소설은 시대적인 감각에 좀 뒤떨어진 감이 있습니다.]

[아내: 진실이란 어느 시대이고 변하지 않는 게 아니겠어요?]

[부장: 그러나 건강한 여인이 성불구자와 결혼을 해서 이상 때문에 파탄 없이 수십 년을 살 수 있을까요? 그 여자의 희생을 우리는 진실로 볼 수 있을까요? 부인?]

아내를 모델 삼은 소설 속의 이상적인 여인상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게 신문사의 불만이었죠.

이런 가운데, 이 신문사에 갓 입사한 기자 강욱이 동우의 아내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강욱: 인사가 늦었습니다. 어제 입사한 강욱입니다.]

[아내: 감사합니다.]

[아내: 선생은 그 소설의 여인을 존경하나요?]

[강욱: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첫만남을 가진 두 사람.

강욱은 여인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그녀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가 왠지 싫지 않습니다.

[강욱: 몇 시차를 타십니까?]

[아내: 6시 차예요.]

[강욱: 언제나 기차를 타세요?]

[아내: 네.]

[강욱: 기차를 좋아하시는군요.]

[아내: 지나가는 기차를 보니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나면 답답해요. 단조로운 철로 소리, 말 없는 승객. 아주 답답해요.]

이 대사는 사실 장애를 가진 남편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그녀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죠.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물꼬를 틀 가능성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실제로 기차를 놓쳐 버린 동우 아내는 강욱과 데이트에 나서는데요.

그런데 하필 이 장면을 시동생이 목격하고 말죠.

시동생은 이 사실을 오빠인 동우에게 말하고, 이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금슬 좋아 보였던 이 부부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아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동우: 아니, 별로.]

영화 '귀로'는 동우의 아내이기 전에 한 명의 여성인 여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을 영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요.

동우 아내가 혼자 자는 침실과, 침대에 걸터 앉은 그녀를 비추는 이 장면!

양 옆으로 겹겹이 놓여 있는 문틀을 좌우대칭으로 보여줌으로써, 갇혀 있는 느낌에 사로잡힌 여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여주인공과 남편 동우가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에서도 창틀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을 한 화면 안에서 분할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아슬아슬한, 파탄 직전의 부부 관계를 은유하고 있죠.

육교, 가로등, 거리의 시계, 서울역 광장.

이만희 감독은 다양한 공간과 사물을 활용하면서 여주인공의 결핍과 욕망을 구구절절한 대사 없이도 상징적이며 효과적으로 담아냅니다.

그를 196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영화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상과 현실, 권태와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몸부림.

[아내: 꼭 가요. 다음 차는 싫어요.]

이만희의 모던한 영상 미학 '귀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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