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입양인특집] 깡디스의 특별한 휴가

[한인입양인특집] 깡디스의 특별한 휴가

2018.09.02. 오후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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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희미한 나이에 해외로 보내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전 세계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

지금까지 해외로 나간 입양아들은 무려 17만 명에 달합니다.

프랑스는 스웨덴, 덴마크와 함께 유럽에서 한인 입양인이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데요.

프랑스로 떠났던 한인 입양인들이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합니다.

8박 9일 동안 특별한 인연을 맺고, 소중한 인연을 찾았다는 입양인들.

고국에서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갔을까요?

프랑스 한인 입양인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프랑스 한인 입양인 '깡디스의 특별한 휴가'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 나르본.

치과에서 일하고 있는 깡디스가 일할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늘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깡디스는 직장 동료에게 인기 만점인데요.

그런 깡디스가 요즘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며칠 후면 40년 만에 한국 땅을 밟기 때문입니다.

4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후 처음 찾는 고향입니다.

[깡디스 졸리베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이제 가족도 직장도 안정이 되니 제 뿌리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한국 문화도 알고 싶고, 친부모도 알고 싶어요.]

한국 여행을 기다리는 건 깡디스 가족들도 마찬가지.

프랑스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딸과 깡디스 남동생도 이번 방문에 함께할 예정입니다.

깡디스에겐 같은 양부모 밑에서 자란 남동생이 있는데요.

깡디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입양된 자비에는 특별한 동생입니다.

정체성 고민이 한창이던 사춘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자비에게만큼은 힘든 마음을 잠시 기댈 수 있었죠.

혼란스러웠던 성장기를 지나 깡디스는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됐습니다.

아이들 앞에선 강인한 엄마지만 가슴 한 켠에 품고 있던 궁금증이 하나 있답니다.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은 어떤 곳일까.

[멜리사 졸리베 / 깡디스 딸 : 엄마는 입양 후 한국에 처음으로 가는 거예요. 이번에 가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어요. ‘친부모님'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음에 남는 좋은 것들만 많이 가지고 돌아올 수 있길 바라요.]

40년 만에 찾는 고향, 한국에선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고운 한복을 입고 연신 사진을 찍는 한인 입양인들.

깡디스와 같은 프랑스 한인 입양인 가족 50명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앞으로 8박 9일 동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예정인데요.

깡디스와 동생 자비에도 보입니다.

4살까지 한국에서 지낸 깡디스에겐 고향의 기억이 조각조각 남아있는데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집니다.

[깡디스 졸리베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제가 한국을 떠날 때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시골의 모습이었어요. 시골 풍경이 있었어요. 어떤 여성분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친어머니인지 저를 돌봐주셨던 분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다리', '한옥' 같은 집이 기억에 나요.]

연이은 폭염에 땀 마를 새 없는 한국의 여름.

한국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한옥마을을 찾았는데요.

"오늘의 미션은 한옥마을에 가서 훈민정음의 자음을 찾아 사진을 찾으면 되는 미션입니다."

이응과 똑 닮은 한옥 문고리를 찾았습니다.

"하나, 둘, 셋 이응!"

열심히 사진을 찍는 것도 잠시.

무언가에 홀린 듯 다들 가게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데요.

깡디스는 두 딸을 위한 선물을 골랐습니다.

"한국인?"
"입양인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한국 얼굴(있어요)."

아무래도 한국인 뿌리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쌍둥이 딸을 위한 선물을 안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나가는 한인 입양인 가족의 한국어 캠프.

오늘은 수묵화를 그려보는 시간입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자라서일까요.

다들 솜씨가 제법인데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써내려가는 한글 이름.

"한글로 쓴 거예요?"
"네."

깡디스는 마음속에 있던 말을 적어봅니다.

아직은 서툰 한국어지만 꾹꾹 눌러 담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진심이 묻어나는데요.

[깡드스 졸리베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그리운 고향, 한국. 보고 싶었어요' 라고 썼어요. 저는 언젠가 한국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들 역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한국어 수업도 듣고.

우리나라 전통무용 부채춤도 배워봅니다.

무엇보다 제일 신나는 건 케이팝에 맞춰 춤추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예 솔레얀 / 9·한인 입양인 2세 : 한국 날씨가 더워서 너무 좋고, 잘 놀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

[안나 구흐동 / 15· 한인 입양인 2세 : 한국어를 더 알고 싶고, 어머니의 언어이기 때문에 더 깊이 알고 싶은 것 같아요.]

인연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오곤 합니다.

열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소피-미애 씨는 이번 캠프에서 같은 보육원 친구 안나를 만났습니다.

1980년 프랑스로 입양된 후 38년 만의 재회입니다.

[안나 앙셀므 트리쌰르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저희는 식탁에 앉아 있었고,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를 했어요. 보육원에서 입양 간 사람들끼리 어떻게 연락을 하고 지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죠. 그러다 프랑스어를 아주 잘하시는 수녀님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네스 수녀님이었다고. 반 아네스 수녀님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섯 살이던 미애에겐 좀처럼 입양의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학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 다른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보육원은 문을 닫았고 세상은 내 편이 아니라고 느낄 무렵, 미애가 찾은 세 번째 보육원이 바로 안나가 있던 곳입니다.

미애를 따스하게 맞아준 아네스 수녀님과 보육원 아이들은 미애에겐 가족과도 같았습니다.

열 살이던 미애와 여섯 살이던 안나는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입양됐는데요.

미애의 첫 번째 가족이 돼준 보육원 식구들.

안나와 함께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피 미애 피르다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수녀님 이 방송을 보시면 정말 뵙고 싶어요. 연락을 자주 못해서 죄송해요. 애들도 잘 있었는지 궁금하고요.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드려요.]

소중한 인연을 만나고 소중했던 인연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지는 하루입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을 현장에서 뽐낼 시간이 왔는데요.

직접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장에 찾아가야 합니다.

출발하기 전 다시 한 번 한국어를 복습해봅니다.

"안녕하세요."
"깎아주세요"

잘해낼 수 있겠죠?

드디어 시장으로 출발.

깡디스는 버스 안에서도 연습 삼매경입니다.

한국어를 잊을세라 연습장을 펴고 계속 되뇌어 보는데요.

분주한 한국 전통시장.

호떡을 파는 노점 앞에서 깡디스가 발길을 멈췄습니다.

"안녕하세요. 얼마예요?"
"잠깐만요. 깎아주세요."
"2개에 2천 원."
"깎아주세요"
"깍아줄게요."

그 어렵다는 흥정을 한 번에 성공했습니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는데요.

이제 한국 어디에서든 물건을 살 수 있겠죠?

다음날, 깡디스 동생 자비에에게 아주 특별한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자비에가 애타게 찾던 친엄마가 자비에를 만나러 온 겁니다.

자비에에겐 친동생도 있었답니다.

[윤순례 / 자비에 생모 : 제가 낳기를 1월 28일인가에 낳았어요. 1981년도. 그때 집이 조금 안 좋았거든요. 낳았는데 아이가 아픈 채로 나오니까 힘들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을 갔는데 거기에서 그러더라고요. 국내에선 우리 같이 서민, 없는 사람들은 힘드니까 아이를 위해서 (입양도) 괜찮을 거라고.]

구순구개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해외 입양은 돈 없는 집 아이, 자비에를 위한 선택이었죠.

[윤순례 / 자비에 생모 : 가끔 생각나고 그러면 혹시나 싶어서 (찾아 갔어요)... 상대 쪽에서 연락이 먼저 오기 전에는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애들 아빠가 2004년도부터 아팠어요. 3년쯤 지났는데 그때는 말도 못하고, 못 움직이게 됐는데 그러더라고요. 보고 싶다고. 전화 좀 해보라고.]

[자비에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제가 살아온 지난 37년 동안, 평생 저는 (장애를 가져)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머니께서 제 인생을 구하기 위해 기회라는 선물을 주신 거잖아요.]

지난 세월 자비에는 자신이 장애가 있어 버려진 거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사실로 다가올까 두려워 엄마를 찾기도 무서웠습니다.

친엄마가 평생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자비에는 새로운 삶을 얻은 기분입니다.

앞으로 한국어도 열심히 배워 엄마와 자주 소통하고 싶답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웃음)"

어느덧 캠프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입양인 부모와 아이들이 그동안 준비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날.

윤순례 씨도 자비에를 응원하러 자리에 참석했는데요.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자비에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모릅니다.

무대의 막이 오르고.

열심히 연습한 무대를 선보이는 입양인 가족.

뜨거운 함성에 더욱 힘이 나는데요.

입양인 가족에게 이번 캠프는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장인실 / 경인교대 한국다문화연구원 원장 : 가장 좋았던 건 모든 프로그램에 너무나 진지하게 임해주셨고요. 정말 예술성이 뛰어나셔서 그림을 그리는 거라든가, 유리 공예라든가 이런 것들을 정말 잘해주셨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전부 다 표정이 행복해지고 밝아진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점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한국어 캠프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깡디스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생겼습니다.

공식 일정이 끝난 후 입양인 가족은 한국 가정에서 이틀 밤을 보냈는데요.

희서와 다은이네 가족은 앞으로 깡디스의 한국 가족이 돼주기로 했습니다.

한국 음식도 직접 만들어봐야겠죠?

"오늘은 만두를 만들 거예요."
"만두."
"김치는 매우니까 씻어서 넣을게요."

만두는 처음이지만 능숙한 요리 솜씨로 뚝딱 만두소를 만들어내는 깡디스.

만두를 빚는 건 아이들의 몫입니다.

쌍둥이, 오펠리와 멜리사도 서툰 솜씨로 만두를 빚어보는데요.

[오펠리 졸리베 / 깡디스 딸 : 이 친구들을 만나서 기뻐요. 제 친구들이에요.]

[김희서 / 깡디스 홈스테이 가정 ·귀인초등학교 5학년 : (깡디스 가족을 위해) 풍선을 달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프랑스어도 공부를 했는데 말은 못했어요. (왜요?) 잘못 말할 것 같아서요. (오늘 공연을 준비했다고 들었어요.) 아니 그거는..(비밀이에요?) 네. 쉿.]

아이들이 열심히 빚은 만두가 완성됐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만두가 입맛에 맞는지 두 딸도 맛있게 먹는데요.

어느덧 내일이면 프랑스로 돌아가는 날.

다음 방문 땐 깡디스도 동생 자비에처럼 꼭 친엄마를 만나고 싶습니다.

[깡디스 졸리베/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저도 제 친부모님을 찾고 제 이야기를 알고 싶었어요. 제 부모에겐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제가 네 번째였대요. 유감스럽게도 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제 생각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 중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어머니 홀로 네 명의 아이와 살아야 했던 거죠.'1977년 8월'까지 어머니 집에서 살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그해 10월' 저는 프랑스로 떠나게 돼요.]

[깡디스 졸리베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어머니, 제가 어렸을 때 어땠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제 오빠와 언니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내린 결정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머니를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지 않을 것만 같던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갑니다.

꿈만 같던 한국에서의 여정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모두 공항에 모였습니다.

고향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쌓인 지난 9일.

자비에는 한국어 책도 잊지 않고 챙기는데요.

강행군에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던 시간들.

[자비에 모또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한국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 뿌리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람들과 충분히 대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실력을 키우는 일만 남았죠.]

[깡디스 졸리베 / 프랑스 한인 입양인 : 한국에서 '정체성'을 깨달은 기분이 들어요. 외모적인 부분에서만 느껴지는 건 아니고. 저희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나 입양됐을 때처럼 한국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40년 동안 한국을 찾지 못했던 건 나를 버린 나라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입양 후 처음으로 방문한 한국에서 깡디스는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특별한 인연도 만들었죠.

앞으로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자주 한국을 찾고 싶습니다.

언젠간 깡디스도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겠죠?

"하나, 둘, 셋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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