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글로벌코리안] 독일로 간 천사 '광수의 일기'

[특집 글로벌코리안] 독일로 간 천사 '광수의 일기'

2016.06.26. 오전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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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가난'이라는 질곡의 시간을 걷던 1960~70년대.

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 독일로 건너간 어제의 청춘,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여자들의 군대'로 불리는 간호사 세계에서 고된 근무와 인종 차별, 문화적 충격을 견뎌낸 50년 세월.

작고 여린 체구로, 절대 녹록지 않았던 '독일 살이'를 지탱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파독 간호사, 오늘은 오롯이 그녀들의 숨겨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제 고향은 삼천포 지리산 밑이었는데 굉장히 빨갱이도 많고, 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도 인민군이 와서 사람을 죽이고 그랬거든. 우리 사촌 오빠도 잡아갔어요.]

1950년 9월 25일, 총성이 난무하는 지독한 전쟁 통에 어린 광수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나이 예순일곱(67)에 낳은 늦둥이 막내딸.

광수의 출생은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지요.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제가 3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하더라. 그런데 그때는 다 죽으니까 죽는 줄 알았대요. 저도. 그런데 저는 살았어요. 흉이 참 많았거든….]

얼굴을 뒤덮은 흉터 자국을 볼 때마다 '차라리 죽을 걸'하며 몸서리를 쳤습니다.

삼천포 앞바다 벼랑 끝에서 몇 번이고 자살을 생각하던 어느 날, 신문에서 '파독 간호사'를 뽑는다는 글귀를 봤습니다.

집 떠나 돈을 벌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잡기 위해 없는 살림에 어머니를 졸라 1년 동안 간호 학원에 다녔습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왜 (파독 간호사를 하러) 가려고 하노? 그러니까 오빠 우리 형편이 이런데 내가 성형수술을 해야 하니 독일 가서 돈 벌어서 나는 성형수술을 할래. 그랬더니 오빠가 대답을 못 하겠더래. 자기도 경제 형편이 안 좋으니까. 그래 그럼 꼭 3년만 있다가 와라.]

1970년 9월 30일, 스무 살 광수가 독일 땅을 처음 밟던 날.

뿌연 안개가 자욱한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히피들이 머리는 이렇게 길러서 옷은 벗고 누워있고 그렇더라고. 그런 게 대한민국에서는 한 번도 못 본 상태였어. 문화의 충격. 그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녀가 일하게 된 곳은 심장내과.

납으로 만든 무거운 옷을 입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독일 간호사들은 꺼리는 일이랍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엑스레이 방사선 (방지) 옷을 입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게(그 옷이) 7kg입니다. 그걸 입고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보통 힘이 들어서 못 해요.]

병원 청소는 물론 환자들의 대소변까지 직접 받아내야 하는 고된 근무를 하면서도 언제나 웃음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꼭 3년만 일하고 돌아간다던 약속은 무려 44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얼마 전 광수 씨는'간호사의 꽃'이라는 수간호사 자리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했지요.

그사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가려지지 않던 천연두 흉터도 말끔하게 치료했습니다.

[크로흐만 / 비반테스 병원 심장과 과장 : 그녀는 독일 간호사들과 달랐습니다. 조용했지만 열심히 일했어요. 아침에 가장 먼저 와서 마지막으로 퇴근했습니다. 정말 열심이었죠.]

독일에 온 지 5년쯤 지났을까.

우연히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독일로 유학 온 남편 피터를 만났습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따뜻한 마음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가난과 에이즈로 시름 하고 있는 우간다.

광수 씨는 2003년부터 남편과 함께 우간다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희망의 씨앗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50년 가까이 일하던 병원에서도 우간다에 보낼 침대며 의약품을 무료로 제공해줬습니다.

[크로흐만 / 비반테스 병원 심장과 과장 : 사실 아프리카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 독일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정광수 씨가 아프리카를 돕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동기부여가 됐죠.]

남편은 두 해 전, 심장마비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광수 씨는 다시 힘을 냅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베를린에 기부금 통이 약 20개 있는데 시민들이 한 푼 두 푼 넣어 준거 우리가 잘 쓰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큰 도움이 되죠.]

어린 광수가 절망의 순간, '파독 간호사' 라는 희망을 만나 다시 일어선 것처럼, 남은 인생 광수 씨는 남편을 꼭 닮은 아들과 함께 우간다에 희망을 심는 일을 계속해나갈 생각입니다.

[정광수 / 1970년 파독 간호사 : 우리 배고프고 그럴 때 떠나서 여기서 열심히 해서 지금 배고픈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저는 굉장히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마음은 표현할 수가 없지요.]

광수 씨보다 몇 달 먼저 독일에 온 임종선 씨.

[임종선 / 1970년 파독 간호사 (72세) : 저의 목적은 탈출. 이 상황 속에서 떠나오는 것. 어떻게 해서도 좋다, 내가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우선 이 상황에서 탈출해야 되겠다는 것.]

여자로 태어난 게 죄가 되고,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던 시절.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그냥 어디든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임종선 / 1970년 파독 간호사 (72세) : 떠나오지 않으면 안 됐던 그 당시의 상황이 항상 가슴속에 묻혀있는 것 같아요.]

독일 병원에서 일한 35년 세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종종 차별과 멸시를 당한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설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임종선 / 1970년 파독 간호사 (72세) : 나한테만 뭐를 물어요. 이게 뭐냐, 저게 뭐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상했습니다. 우울증도 오고 잠도 못 자고...]

독일인 남편이 지난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도 없어 그녀는 황혼의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데요.

독일에서도 이방인, 한국에 가도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는군요.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고국을 향해 뛰고 있습니다.

[임종선 / 1970년 파독 간호사 (72세) : (여생을 마치게 된다면) 반은 한국에 묻히고 싶어요. 뿌려지고 싶어요. 낙동 강변에. 내 많은 인생이 흘러갔던 그곳에….]

라인강이 유유히 흐르는 도시 쾰른.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학 병원의'최고령 간호사'가 수술방에 들어갈 채비를 합니다.

올해 69세, 이순희 간호사!

1965년 11월 1일 독일에 와 꼬박 50년을 근무했습니다.

정년퇴직할 나이는 진-작에 지났지만 병원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달에 절반은 출근을 하고 있습니다.

[휴텐 브링크 / 쾰른 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과장 : 이순희 간호사는 아주 빠른 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늘 뛰어다니죠. 아주 빨라요.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간호사들의 모범이 되고 있어요.]

수술 과정을 눈으로 좇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수술 기구를 의사 손에 쥐여주는 이순희 간호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수술 후 주의사항'이나 '부작용'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한국이 어디냐?'는 질문이었죠.

그럴 때마다 이순희 씨는 한국의 위치를 설명해주며 '민간 외교관'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이순희 / 1965년 파독 간호사 : 우리 피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이 나쁘다 그러면 그 소리를 누가 듣기 좋겠어요. 한국을 될 수 있으면 좋은 나라다, 여행가고 싶으면 한국에 가봐….]

이제 파독 간호사들 대부분은 64세가 넘어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1975년부터 76년 사이 독일에 온 막내 간호사 몇몇만이 병동을 지키고 있지요.

장점숙 씨도 정년퇴직까지 3년이 남았는데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전라남도 순천에서 먼 길을 떠나온 점숙 씨는 월급을 받으면 빵 사 먹을 돈만 남겨놓고 모두 집으로 보냈습니다.

덕분에 그 시절 동생들은 모두 대학 공부까지 마쳤고, 집안 살림에도 큰 보탬이 됐습니다.

[장점숙 / 1975년 파독 간호사 : 우리 가족 욕 안 먹게 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가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 한가지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50kg이 채 안 되는 가녀린 몸으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장점숙 / 1975년 파독 간호사 : 몸으로는 정말 힘이 들었어요. 독일 사람들이 신체가 저희와는 다르니까 간호하기에는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끝날 것은 아니다….]

무뚝뚝한 독일 간호사와 달리 상냥하고 친절한 장 간호사 때문에 일부러 이 병원을 찾는 환자도 많다는 군요.

[안나 / 독일 환자 : 다른 간호사들에 비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요. 제가 이해할 때까지 참을성을 갖고 잘 돌봐주고, 굉장히 사랑스러운 간호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 또 누군가에게는 '탈출'이었던 독일 가는 길.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50년, 그 길고 고단한 '독일살이'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힘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 그리고 '간호사'라는 자부심입니다.

우리가 단체로 독일에 오게 된 때는 지난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독일 마인츠 대학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이수길 박사가 파독 간호사들의 취업을 주선한 주인공인데요.

[이수길 / 1960년대 마인츠 대학 병원 소아과 근무 : 당시 독일에 병원이 많이 생겨서 양로원이나 요양원이. 3~4만 명의 간호사가 모자란다는 겁니다.]

그는 독일 병원 10여 곳에 한국 간호사를 고용해달라는 편지를 써 보내고, 여러 차례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을 했습니다.

1966년 1월 31일.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128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전세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를 거쳐, 꼬박 스무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연숙 / 1966년 파독 간호사 (1진) : 그땐 비행기에서 밥을 안줬어요. 오다가 내려서 밥 먹고 또 올라오고 이러는데 토하다 토하다 못해 가슴팍과 등허리가 붙는 것 같았어요. 너무 많이 토를 해서...]

1966년부터 76년까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는 모두 만 3백여 명.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밤 근무에 주말 당직까지 해가며 고국으로 보낸 돈은 1억7천만 달러, 우리 돈 2천억 원에 이릅니다.

이 돈이 대한민국 발전의 종잣돈이 됐다는 것은 뒤늦게 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요.

[이수길 / 1960년대 당시 마인츠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 :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밤 근무를 해요. 잠을 자지 못하니까 그게 고욕인데 그래도 그걸 해요. 그래서 그 돈을 한국에도 보내고….]

독일 언론은 우리를 '동양에서 온 천사'로 소개했습니다.

환자들에게는 '주사 잘 놓는 간호사'로 통했습니다.

[김연숙 / 1966년 파독 간호사 : 우린 어떻게 주사를 놨는지 알아요? 탁탁탁 이렇게 치면서 주사를 놔요. 그럼 언제 들어갔는지 몰라. 그렇게 기술이 좋았지. 그러니까 한국 간호원한테 주사 다 맞겠다 그러고...]

마침내 우리는 3년이라는 체류 기간이 정해진 '손님 노동자'가 아니라 체류 기간을 계속 연장할 수 있는 '무기한 노동권'까지 받게 됐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 성실함으로 우리는 '독일에서 가장 성공한 이주민'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콜브 / 외국인 이민 역사 박물관장 : 한국인 간호사들은 우선 한국과 독일을 좀 더 가깝게 했고요. 독일에 간호사가 부족하던 시절 한국인 간호사들이 와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매우 높게 평가할만한 업적입니다.]

독일 에센시에 위치한 옛 탄광 시설에 아리랑이 울려 퍼집니다.

파독 간호사 역사 반세기를 맞아 그동안 독일 전역에 흩어져 살던 간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서로가 걸어온 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떤 말 대신 그저 뜨겁게 안아줍니다.

[최숙자 / 73세·1965년 파독 간호사 : 처음에 와서는 되게 힘들었어요. 음식도 다르고 언어도 그렇고 집에 가고 싶고 그랬는데….]

물설고 낯선 타향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50년 세월.

꽃다운 청춘은 저만치 달아났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사이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순위 11위까지 올랐고, 이제는 적어도 돈 없어 굶주리는 사람은 없어진 것 같아 참 다행입니다.

[토마스 쿠펜 / 에센 시장 : 한국 간호사들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협동심이 있는 고급 인력이라고 평가됩니다. 에센 시장으로서 지난 50년간 열심히 일하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조규형 /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 그들의 땀과 노력이 20세기 한국인들의 세계 진출의 출발점이 되었고,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우리의 삶을 그린 연극 공연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배우는 바로 우리, '파독 간호사'들입니다.

"사랑하는 딸 현자야. 너무 힘들면 돌아와라. 너무 멀리 보내서 어미 가심이 찢어진다. 돈 벌라고 밥은 절대 굶지 말거라. 돌아오걸랑 어미 옆에서 같이 살자."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쳤던 지난 세월.

병원 청소와 궂은일을 도맡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낸 우리의 50년 세월이 무대 위에서 다시금 빛나고 있습니다.

[김금선 / 파독간호사 연극단 '빨간구두' 단장 : 파독 간호사는 한국의 역사에요. 그 역사를 우리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그게 3년이 됐는데요. 역사의 기록으로 연극으로 한국에서 남기게 됨을 정말 감사하게 여깁니다.]

과연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우리의 얘기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공감했을까요.

[윤제균 / 영화 감독 : 국제 시장을 준비하면서 어느 세대가 제일 힘든 세대인 것 같으냐 했더니 다 자기 세대가 제일 힘들다고 말해요.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치열하게 사셨던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들의 세대에 대해서 잊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분들도 마음의 위안을 얻으실 것이고 젊은이들도 타산지석,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열심히 파이팅해서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더 좋아지지 않을까....]

가장 가난하던 시절, 내 가족, 내 나라를 위해 젊음과 청춘을 바친 파독 간호사!

우리의 이야기가 소중한 역사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주기를.

지금 이 시간에도 '삼포세대', '오포세대'로 불리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청춘들이 힘을 내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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