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글로벌 코리안] 재일 한국인, 21세기의 초상 - 1부 재일 동포 3세로 살아가기

[특집 글로벌 코리안] 재일 한국인, 21세기의 초상 - 1부 재일 동포 3세로 살아가기

2015.07.25. 오후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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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되기 이전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남동부 최대의 도시 오사카와 함께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일본 땅에 정착한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된 지역입니다.

교토 시내 남쪽에 위치한 '히가시쿠조' 지역은 20세기 이후 일본에 온 재일 동포들의 뿌리와도 같은 곳.

동포 1세부터 3세까지 대를 이어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1세들은 고령화되었거나 세상을 떠났고, 최근 이곳은 거의 2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신 타마에, 재일 동포 2세]
"조선 사람 많이 있었는데, 지금도 많지만 지금은 땅값이 올라서 이사 간 사람들도 많아요. 예전에는 재일 동포가 엄청 많았어요."

[신 리츠에, 재일 동포 2세]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젊은 사람들은 다들 나가 버렸어요."

몸은 오랫동안 여기에 살지만 1세와 2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떠나온 고향 같은 곳.

하지만 3세들에겐 사정이 다릅니다.

오히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친근한 것이죠.

[윤향란, 재일 동포 3세]
(재일 동포 친구들이 많은가요?)
"아니요. 일본 사람이 많아요. 결혼해서 남편과 생활하는 데 편하다면 (일본 국적으로) 바꿀 거예요."

3세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이 거의 떠나 버린 히가시쿠조의 허름하고 한적한 모습이 마치 지금 재일 동포들의 변화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혁수, 요코하마 대학교 교수]
"3세가 됐을 때의 정체성이 1,2세와 달라지는 건 거의 필연적이다. 1세, 2세, 3세가 똑같은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본국 분들이 원하신다면, 그건 거의 있을 수 없고, 3세부터는 이미 현지화가 상당히 진행된 정체성으로 생각을 해야 되지 않는가."

오사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에 재일 동포 3세 김철의 씨가 살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섭니다.

그에게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김철의 씨는 메이(MAY)라는 이름의 극단을 운영하고 있는 연극 연출가.

며칠 뒤에 무대에 올릴 연극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오늘은 연극의 책임자인 연출가가 스태프들이나 단원들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김 씨를 뺀 스태프와 배우들은 모두 일본인들.

공연장은 오사카 시내의 한 사찰이 운영하는 문화 센터를 빌렸습니다.

무대를 만드는 이날만큼은 스태프와 배우의 구분이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나서서 하루 종일 구슬땀을 흘립니다.

[김철의, 연극 연출가·재일 동포 3세]
"재일 동포들의 삶을 다룬 연극을 항상 매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2년 전에 북한 방문했을 때 있었던 여러 가지 현실이나 문제, 북한 사람, 청진에 계신 분들의 삶이나 이런 것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연출가가 직접 합니다.

천장에 올라가 작업하는 위험한 일도 김철의 씨의 몫입니다.

김 씨는 한국 국적도, 일본 국적도 아닌, 이른바 조선적입니다.

현재 조선적 재일 동포는 한국 방문이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국적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한국과 북한,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도 작품 활동에 있어서는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김철의, 연극 연출가·재일 동포 3세]
"조선적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근본적인 문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중요한 무기이기도 한 것이에요. 한국에 못 갔으니까 조선적의 김철의가 있다, 그렇게 이름을 팔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나는 못 가는 게 불쌍한 입장이라고 생각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일본 국적이나 한국 국적을 갖는 게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데 더 편리할 수 있음에도 김철의 씨가 끝내 조선적을 유지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김철의, 연극 연출가·재일 동포 3세]
"뒤를 되돌아보면 자기를 위해 걸어온 사람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다음 세대에게, 자기 자신의 보람뿐만 아니라, 이어가는 중요성이 된다. 아버지, 큰아버지의 비극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극의 정반대로 내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절대로 간단하게 살아가면 안 된다."

드디어 연극 'O도의 손바닥'을 첫 무대에 올리는 날.

세팅을 끝낸 무대 위에서 정식 의상을 입은 상태에서의 최종 리허설이 한창입니다.

배우들의 대사 한 단어 한 단어 꼼꼼하게 점검을 하는 김철의 씨.

아직은 뭔가 마음에 차지 않은 표정입니다.

공연이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부족한 부분에 대한 연습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어쨌든 이제 배우와 스태프들을 믿고 가볼 시간입니다.

0석 남짓한 작은 극장의 객석이 꽉 들어찼습니다.

객석 언저리에 김철의 씨의 어머니도 보이네요.

드디어 공연 시작!

연출가이자 배우이기도 한 김철의 씨도 주인공의 아버지 역을 맡았습니다.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건 공연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재일 동포의 역사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화답하듯, 이날 공연에는 재일 동포 4세 학생들이 꽤 많이 왔습니다.

[류아련, 학생·재일 동포 4세]
"국가의 지지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외치는 장면이 있었죠.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도 그러한 사회를 살아가기에 참 감동했습니다."

[김철의, 연극 연출가·재일 동포 3세]
(오늘 첫 공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 일단은 성공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수고하셨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교토의 한 작은 라멘 집.

제일 동포 3세 윤애련 씨가 남편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는 모습이 여간 다정해 보이는 게 아닌데요.

그런데 두 사람, 부부인데 국적이 서로 다릅니다.

윤애련 씨는 한국 국적이고, 남편은 일본인입니다.

[윤애련, 재일 동포 3세·한국 국적]
"우리는 결혼한 지 14년 됐어요. 처음에 그냥 술집에서, 그냥 잘 가는 음식점 단골이었어요. 거기서 만나서 친해져서 사귀었어요."

[나카이 신이치, 윤애련 씨 남편]
"(애련 씨는) 굉장히 밝고, 쾌활하고, 즐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윤애련 씨가 일본인인 나카이 씨와 결혼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군요.

[윤애련, 재일 동포 3세·한국 국적]
"제 교육 환경이 역시 한국 사람 아니면 재일 동포와 결혼을 해달라고 부모님이 많이 원하셨으니까 선도 많이 봤고. 차 한 대 살 수 있을 만큼 선 봤어요. 그런데도 거기서는 인연이 없었고, 내 친구들은 설마 (네가) 일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고."

가정주부이지만 바쁜 시간에는 남편을 도우러 가게에 나오는 아내가 나카이 씨는 꽤나 든든한가 봅니다.

[나카이 신이치, 윤애련 씨 남편]
"(애련 씨는) 가게 분위기를 밝게 한다든지 손님을 응대하고 접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가끔 어쩔 수 없는 문화 차이를 느끼기도 한다는군요.

[윤 애 련·나카이 신이치 부부]
"(애련 씨) 그거 말해도 돼?"
"네."
"한국인은 금방 '와' 하고 화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금방 마음을 드러내고, 일본 사람들은 그러지 않잖아요. 너무나 달라요."

저녁 시간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쩍 아빠와의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은근히 서운했던 나카이 씨는 모처럼 딸이 해주는 안마에 더없이 행복한 표정입니다.

공부를 꽤 잘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사립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 치사.

엄마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딱 그 나이의 소녀 다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나카이 치사, 윤애련 씨 딸]
"빅뱅의 한국어 노래도 이해시켜주고 번역도 해주셔서 그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피가 섞인 자신의 반쪽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걸, 치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나카이 치사, 윤애련 씨 딸]
"식탁에 김치라든지 한국요리가 늘 놓아져 있는 걸 어렸을 때부터 먹어 왔으니까 (음식 맛은) 한국의 맛이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음날, 윤애련 씨가 모처럼 친구를 만났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요시다 에이코 씨.

한국 이름 박영자. 그녀 역시 재일 동포 3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장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윤애련 씨가 민족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반면, 요시다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 학교를 다녔고, 현재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는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 데는 각자의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애련, 재일 동포 3세·한국 국적]
"우리 부모님도 두 분 다 한국 사람이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한국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한 번도 없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불편이 없었거든요. 저는요."

[요시다 에이코, 재일 동포 3세·일본 국적]
"제 주변은 전부 일본인, 제 친구, 동료 모두 다 일본인이고 그런 환경에서 '저는 한국인이에요' 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미국인이라면 '와! 외국인이다 멋지다', 중국인이라면 '에?' 한국인이다 그러면, 깔보는 그런 느낌을 저 자신이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스며 든 윤애련 씨가 차별이나 불편을 크게 느끼지 않은 반면에, 사실상 일본 사회에 동화되며 살아온 요시다 씨가 차별을 의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스스로 한국 사람임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시다 에이코, 재일 동포 3세·일본 국적]
"저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인이라는 것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귀화를 했다는 건, 표면적으로 제가 일본인이 됐을 뿐이지 알맹이는 저는 계속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시다 씨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결혼을 한 뒤 출신과 국적보다 한 명의 사람 그 자체로 여겨주는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적과 정체성은 분명히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요시다 씨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국적을 취득한 한국계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그것은 재일 동포 3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박일, 재일 동포 3세·오사카 시립대학교 교수]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의 선택지로 흔히 말해지는 것이 일본에 동화되든지 아니면 한국인으로서의 모습을 지켜가면서 일본에서 살아가든가 하는 것인데 이런 여러 가지 선택지가 어지럽게 섞여있는 와중에 한국인의 다양한 유형이 생겨나는 것인데 저는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재일교포들이 태어나는 것으로 일본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융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 사이의 쉽지 않은 선택 속에서 살아가는 재일 동포 3세들.

게다가 조국의 한국인이 그들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과 일본 사회의 차별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모두 재일 동포의 특수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유혁수, 요코하마 대학교 교수]
"민족성을 유지한다는 것과 국적이라는 것을 (재일 동포를 바라보는) 본국 분들의 시각도 고정적이고 어찌 보면 편협한, 지역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재외 국민의 이미지가 강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재일 동포들이 (일본) 국적을 따도 그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이 본국에도 좋은 피드백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방향으로 (인식을 바꿔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나가노 아키라, 아사히 신문 기자]
"일본 사회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대부분 없어졌다고 말했었는데 요즘 혐한 시위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여전히 역시 일본 사회에는 뿌리 깊은 한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이 남아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일본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려면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한국 국적이든 조선적이든 국적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수교 이후에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들, 재일 동포 사회는 그들을 이른바 '뉴커머'라고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일본에 정착한 '올드커머' 동포들만큼이나 재일 동포 사회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뉴커머 재일 동포들.

백제 때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그들 역시 다양한 분야에서 신도래인으로서의 삶을 일궈내고 있습니다.

가깝고도 먼 땅 일본에서 펼치는 그들의 도전과 삶을 집중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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