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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개척자들 1부 '고려인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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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014-10-18 20:54
러시아 극동 관문인 블라디보스토크.

150년 전, 가난에 쫓겨 국경을 넘은 한인들이 희망의 씨앗을 뿌린 곳입니다.

[인터뷰:이양구,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당시 1900년대 해외에서 가장 큰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 연해주입니다."

모진 세월, 삶의 터전을 잃고 중앙아시아에서 떠돌던 후손들이 하나 둘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땅 연해주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고 있지요.

[인터뷰:리키타 최, 고려인 3세]
"우리가 여기 와서 한번 파보니까 땅이더라고. 조금씩 조금씩 파면서 이렇게 됐어."

일제 강점기,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낯선 동토에서 분투했던 독립 열사의 후손들은 역사 되찾기에 나섰습니다.

[인터뷰:발렌틴 최, 독립유공자 후손]
"한국인들이 고려인의 역사를 이해하고 훌륭한 독립 운동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서 책을 썼지요."

같은 말과 문화!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뿌리깊은 자긍심이 흩어진 동포들의 힘을 하나로 묶습니다.

[인터뷰:발레리아 김, 연해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부회장]
"고려인들은 자부심이 많이 생기고 다른 소수민족들도 (고려인을) 더 존경하게 되고"

가난과 억압이라는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더 깊이, 더 단단히 뿌리 내린 고려인들!

15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이겨낸 그들만의 저력은 무엇일까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우수리스크.

연해주에서도 가장 많은 고려인 2만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시내를 벗어나 30분쯤 더 들어가면 한적한 시골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됐던 고려인 후손들이 다시 이주해 정착한 곳인데요.

부모님의 고향이 이들 마음속에도 고향으로 남아있어서일까요?

마을 이름도 '고향'이란 뜻의 '로지나' 입니다.

18가구, 모두 70여 명의 고려인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마을 이장이기도 한 63살인 리키타 최씨는 13년 전 연해주로 이주해 온 고려인 3셉니다.

마을이 처음 생길 때부터 목수로, 운전기사로 굳은 일을 도맡아 해온 제일가는 일꾼으로 통하지요.

마을에는 누님 두분도 함께 살고 있는데요.

한 건물인데 들어가는 문만 다르니 말 그대로 '한지붕 세가족'인 셈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어떻게 먼 고향마을까지 오게 된 걸까요?

[인터뷰:리키타 최, 고향마을 이장]
"소비에트가 망하니까 우즈베키스탄이 또 우즈베키스탄 말만 하라고 하고.그런 소문이 나니까‘앞으로 여기서 살기 힘들겠다.’했지. 소문에 원동(연해주)에 가야한다고 원동(연해주)에 가보니 괜찮다고"

지난 1991년 소련 붕괴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애써 쌓아올린 기반을 모두 잃은 리키타 최씨에게 연해주는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공사판과 시장에서 날품을 팔며 힘겨운 나날을 버텨가던 삼남매는 다시 삽과 곡괭이를 잡았습니다.

리키타 씨를 비롯한 고향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갈대밭을 뒤엎고 씨앗을 뿌렸습니다.

땅은 결코 땀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리키타 최, 고향마을 이장]
"다 재미있지. 심으면 거기서 많이 나잖아요. 많이 나면 좋지. 올해도 일 잘해서 이렇게 나왔구나 하고"

여의도 면적의 1/4에 달하는 드넓은 황무지는 이제 콩과 채소로 가득한 옥토로 변했습니다.

주민들이 손수 기른 콩으로 만든 청국장과 된장은 한국에까지 수출되고 있습니다.

[인터뷰:예까짜리나 최, 리키타 최 둘째 누나]
"한국으로 보낸 것을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서 ‘소련(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이 맛있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드시면 우리도 편하고 반갑소. 기쁘고"

오랜만에 조용하던 고향 마을이 시끌벅적해졌습니다.

한국 청소년들이 동포들이 사는 모습을 체험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온 겁니다.

조국에서 온 반가운 손님에 최 씨 남매도 먹을거리 준비에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사는 곳은 달라도 정 많고 인심 가득한 우리 민족의 핏줄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아이들은 고단한 역사의 질곡을 헤쳐 온 동포들의 억척스런 삶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들은 척박한 땅을 다시 일구고 그 위에 또 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고수경, 로드스꼴라 여행 대안학교 재학생]
"이런 척박한 땅, 낯선 땅에서도 항상 어떻게든 농사를 짓고 자기 생계를 이어나갔고 그 중에서도 많이 뛰어나셨잖아요. 지금 이렇게 같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정말 좋아요."

지난 1863년, 가난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하나 둘 한인 정착마을이 생기면서 일제 치하인 1920년대 중반에는 연해주의 한인 수가 무려 16만 명에 달했습니다.

한민족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는 버려진 갈대밭을 곡창지대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동포들의 살림이 조금씩 펴지면서 빼앗긴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도 커졌습니다.

[인터뷰:이양구,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정말 십시일반이라도 독립 운동에 대한 열망, 염원 등이 다 작용해서 어려운 시기 가운데서도 독립운동이 가능했고 또 개중에는 최재형 선생 같은 큰 부를 이루었던 분들의 큰 힘도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

구한말 독립 운동가였던 최재형 선생도 이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큰 돈을 벌었던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를 돕고, 독립단체에 자금도 지원했습니다.

연해주 항일 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입니다.

한때 이루었던 부에 비하면 굉장히 초라한 집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그의 열정과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 시내 외곽에 있는 한 서민 아파트.

이 곳에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77살 발렌틴 최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의 집 구석구석은 최재형 선생의 흔적들로 가득해 작은 역사관 같습니다.

발렌틴 최 씨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90년, 쉰 살을 훌쩍 넘겨서였습니다.

모두가 신분을 감춘 채 살아야 했던 소련시대가 막을 내리자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족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발렌틴 최, 최재형 선생 손자]
"먼저 아버지랑 이모가 기록하신 내용에 대해 많이 물어봤어요. 그리고는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죠. 연해주에서부터 우수리스크, 카자흐스탄에도 다녀왔습니다."

발렌틴 최 씨의 뿌리 찾기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한인 후손인지 알아가는 가슴 벅찬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2000년 할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인터뷰:발렌틴 최, 최재형 선생 손자]
"고려인들은 늘 조국을 기억했습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상관없이 항상 한국을 생각하고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 독립의 꿈은 이제 이뤄졌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분투했던 할아버지와 독립 열사들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 알리는 것은 손자인 그의 몫이 됐습니다.

모스크바에 사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모임은 연해주 이주 150년을 맞아 얼마 전에 출간된 책을 함께 점검하기 위해섭니다.

발렌틴 최 씨는 1997년부터 러시아 독립유공자 후손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최 씨와 함께 고려인들의 삶을 역사 기록으로 남기는데 동참한 후손은 모스크바에만 20여 명에 이릅니다.

[인터뷰:잔나 송, 독립유공자 후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가 그것 때문에 역사학자도 되고 박사도 됐습니다. 그리고 책도 썼어요."

[인터뷰 : 로리안 이/ 독립유공자 후손]
"조국에 대한 애정은 늘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다할 자금 지원이나 관심도 부족한 힘든 작업이지만 선조들의 숭고한 뜻이 빛을 볼 그날을 위해 오늘도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인터뷰:발렌틴 최, 러시아 독립유공자 후손협회장]
"저희가 하고 있는 일에 많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고려인뿐 아니라 한국에 계신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뀔수록 민족 고유의 역사와 문화는 흐려지기 쉽습니다.

고려인들이 고국의 전통과 문화를 소중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한 이윱니다.

우수리스크 시내 중심에 자리한 고려인 문화센터.

1층에 들어서자 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사관입니다.

연해주로 이주해 온 뒤 살아온 고려인들의 역사가 생생히 전시돼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농업 영웅 김만삼 선생의 사진도 걸려 있는데요.

획기적인 벼 재배 기술로 소련 훈장까지 받았던 김만삼 선생은 후손들에게는 아직도 큰 자랑거립니다.

귀에 익은 말과 장단.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할머니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고려인 1세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노동 민요라고 하는데요.

문화센터는 이렇게 고려인들의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곳입니다.

공연기획 전문가인 발레리아 김씨는 이곳에서 고려인 문화 전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나오는 고려 신문도, 굵직한 문화 행사들도 모두 김 씨의 손을 거칩니다.

든든한 파트너인 남편과 함께 고려인 문화 전수에 평생을 바치기로 한 건 늘 귓가에 맴도는 아버지 말씀 때문입니다.

[인터뷰:발레리아 김, 연해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부회장]
"(아버지가) 집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봤는데 아이들이 자기 말로 놀고 있더라고. 공부도 학교에서 안하는 아이들도 자기 말을 안 잊어버리는데 우리 아이들은 한국말을 아무 것도 모르고 잊어버리는 것이 진짜 마음 아픈 일이라고"

요즘은 연해주 이주 150주년 행사를 앞두고 공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습니다.

매일 이어지는 공연 연습.

아이들은 강행군에 지칠법도 한데, 웬걸 미소가 끊이질 않습니다.

[인터뷰:이리나 강, 고려인 4세]
"춤추는 게 즐겁고 아름다운 춤을 배우는 게 좋아요. 의상도 예쁘고요."

[인터뷰:베라니까 김, 고려인 4세]
"한국 춤을 추는 게 좋아요. 춤출 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들어요."

한민족, 같은 뿌리라는 세대를 뛰어 넘는 공감대가 늦은 밤 연습장을 환히 불밝히고 있습니다.

사물놀이 패의 신명나는 가락이 축제를 알립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춤 솜씨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아이들부터, 장농 속에 고이 간직해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까지

오늘은 '고려인'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잔칫날입니다.

추임새도, 어깨춤도 절로 나는 신명나는 우리 가락에 보는 이들도 덩달아 흥이 납니다.

[인터뷰:유지혜, 한국전통예술단 '아울' 무용 담당]
"여기서 장구소리든 춤이든 한복이든 의상을 함께 입고 하는 것들이 어떤 동질감도 느껴지고 뭔가 기분이 모락모락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무대 밖에선 한바탕 전통 놀이 체험 행사도 펼쳐졌습니다.

발이 줄에 걸릴까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르고, 조그마한 통 입구에 온 신경을 모아 힘껏 화살을 던지는 아이들.

고려인 잔치에 함께 축하해주러 온 외국인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연해주 130여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이주 기념 잔치를 한 것은 고려인으로, 이들에게 또 하나의 자랑이 됐습니다.

[인터뷰:발렌티나 신, 고려인 4세]
"기분이 정말 좋아요. 우리 전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게 좋네요."

150년, 격변의 세월 속에 흘렸던 땀과 눈물은 이제 성취감와 자긍심으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힘겹고 고단한 삶에서도 꺾이지 않은 강한 의지와 열정!

한민족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그들은 ‘고려인’입니다.

[인터뷰:김동영, 러시아 유학생]
"고려인들은...굳센 사람들이다"

[인터뷰:알라 허, 고려인 3세]
"흥 많은 민족이죠. 생활력이 강한 민족이고요."

[인터뷰:예까짜리나 최, 고려인 3세]
"우리는 일 열심히 해서 어찌됐든 벌어먹고 살아요.나도 인물은 이래 없어도 고려 민족인 것이 반갑소.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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