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이틀째...개별 오찬 진행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개별 오찬 진행

2018.08.21. 오후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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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환 /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명성희 / 北 출신 팝페라 소프라노

[앵커]
잠시 후인 오후 3시부터 단체 상봉이 예정이 되어 있는데요. 영상 보면서 이산가족 상봉 관련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모셨습니다.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그리고 북한 출신의 팝페라 소프라노죠. 명성희 씨 나오셨습니다. 두 분 어서 오십시오.

우선 영상을 보는 게 급할 것 같으니까 지금 들어오고 있는 영상을 좀 먼저 보여주시죠. 지금 오전 개별 상봉 영상인데요. 두 손을 꼭 잡고 김주환 기자, 오늘 오전 개별 상봉은 방 안쪽에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기자]
지금 그런데 걸어가죠. 금강산 지구에 호텔이 크게 2개가 있습니다. 금강산호텔과 외금강 호텔이 있는데 금강산호텔은 현대아산이 지은 거고 외금강호텔은 고인이 된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정숙이라는 사람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북측 관리동이 되겠죠. 그래서 금강산 호텔에 있던 북측 가족들이 외금강 호텔 쪽으로 걸어서 이동을 해서 개별 상봉장으로 가는 겁니다. 식사도 같이 했죠. 그러니까 지금 화면에는 아직 안 잡힙니다마는 중간에 북측 가족들이 남측 가족들을 위해서 선물도 준비해서 전달을 해 주고 그런 장면이 지금 보여집니다. 다행히 날씨가 덥지도 않고 아직까지는 비도 안 오고 그래서 저런 야외 이동이 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죠.

[앵커]
명성희 씨 같은 경우에는 탈북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인터뷰]
제가 한 13년 되어갑니다.

[앵커]
13년 정도? 지금 어제부터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하는 모습을 보고 계신데 저희가 보는 거하고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36년 간에 일제강점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북한의 6.25전쟁이 일어나게 된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북과 남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이런 광경을 볼 때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고 그걸 어떻게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정말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고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고령의 어르신들도 하루빨리 혈육의 정을 담고 혈육의 정을 그리면서 서로가 소통할 수 있고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도록 그런 조치가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앵커]
혹시 북에 아직도 죄송하지만 친척들, 친구들 있으시죠? 생각 많이 나시지 않습니까?

[인터뷰]
많이 그립고 이런 광경을 보면 더군다나 더 그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뿐만이겠습니까? 여기에 3만 명의 탈북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역시 저 같은 마음을 가졌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인들도 언젠가는 소외되지 말고 이렇게 남북한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날도 하루빨리 왔으면 하는 그런 바람도 많이 있습니다.

[앵커]
지금 북측 이산가족 할머니 같은데요. 지금 오늘 오전에 개별 상봉 같은 경우에는 방 안쪽에서 일어난 가족들 간의 분위기 있는 조용한 만남이라서 촬영 같은 건 안 하는 거죠?

[기자]
그렇게 일부 우리 취재를 적극적으로 했던 기자들한테 북측 관계자들이 보장성원이라고 하는데 찍지 말라고 이렇게 제재도 하고 그런 장면도 연출됐다고 합니다. 일단은 외금강 호텔 1층에서 8층까지 객실을 89명이 올라갔습니다.

그 가족들은 객실 90여 개를 나누어서 각자 가족들끼리, 남북한 가족들끼리만 오붓하게 만났는데 한 할머니는 오빠가 늦게 오니까 왜 우리 오빠 빨리 안 오냐고 굉장히 발을 동동 굴렀는데 다행히 뒤늦게 모습을 나타내서 오빠 왔냐고 반갑게 맞이했다는 풀기자단의 전언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다시 단체 상봉을 하고 사실상 이틀째 날의 만남은 오늘 17시부로 종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일 오전에 다시 기약 없는 헤어져야 되는 그런 갈림길이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룻밤을 잤으니까 벌써 헤어져야 되느냐라는 그런 아쉬운 이야기를 벌써부터 하는 분들도 있다라고 합니다.

[앵커]
현장 분위기를 저희 가 있는 합동취재단 기자들이 전해 오고 있는데 이전 상봉과 비교했을 때 북한 측 관계자들이 한결 부드럽다라고 했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기자]
사실은 아무래도 올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전반적인 어떤 기조 변화, 북한의 외교정책의 기조 변화의 일환으로 전달이 됐다고 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이라든가 여러 가지 관심사가 많이 있고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것이 얼마 저것까지 북한의 관영매체들에서 굉장히 날카롭게 지적했던 중국 내 북한 식당 여종업원의 탈북 문제를 이런 이산가족과 연계시킬 거라는 예측이 있었는데 실제 북측 관계자들이 그런 문제 이미 다 지나간 거 아니냐, 조용히 지나가자, 이런 의외의 이야기를 해서 그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앵커]
저희 취재팀에 따르면 북한의 보장성원이라는 분들이 같이 다니는 것 같아요. 보장성원이 죄송하지만 어떤 사람들입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북한 당국에서 보위원이라는, 여기로 말하면 약간 예전의 안기부 비슷한 국정원 비슷한.

[앵커]
국정원 관계자를 말하는 건가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 분들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남한은 적국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또 임무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이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다 이렇게 좀 감시도 하고 어떻게 남한 측에서 어떻게 발언을 하는 거에 대해서도 리서치도 해야 될 필요성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보장성원들이 함께 따라다니는.

[앵커]
항상 행사에 같이 남측 행사에도 그렇고 외국 사람들이 오면 보통 그렇게 되나요?

[인터뷰]
그렇죠. 더군다나 외국 사람들보다는 한국분들이 많이 좀 중요시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한번 생방송 했을 때 남한 할아버지가, 남측 할아버지가 김일성인지 김정일을 막 욕하는 게 생방송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게 계기로 되면서 북한에서는 생방송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또 남한 측에서 좋지 않은 말을 북한 사람이 들었을 때 사상적으로 변질될까 봐 그런 거를 시기적으로 그런 게 조사하는 그런 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필요한 거죠.

[기자]
사실 보장성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산가족 규모를 한번 할 때 확대하자. 북한이 시설 문제 때문에 100명 이상 곤란하다는 게 지금 말씀하신 것에 다 녹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보장성원, 남자들을 보장성원이라고 하고 여성을 봉사원이라고 하는데 어떤 체제 유지를 위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이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어우러져서 북한이 한 번 이산가족 상봉할 때마다 한 차례 할 때 100명 이상 못 해 그런 어려움이 내부적으로 깔려 있는 겁니다.

[앵커]
지금 영상에 보면 오늘 개별 상봉 때 북측에서 나눠준 선물인데요. 명 선생님, 저게 어떤 건지 설명을 해 주시죠. 백두산들쭉술 같은 거, 비단인가요?

[인터뷰]
저게 백두산들쭉숙은 북한에서 유명한 술입니다. 참 맛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국분들은 저걸 마시면 머리가 좀 아파 하시더라고요, 보면.

[앵커]
저건 비단입니까?

[인터뷰]
비단이죠. 북한에서 사용하는 비단 천입니다.

[앵커]
용도는 어떤 건가요? 장식용인가요 아니면?

[인터뷰]
저 천은 원래 그렇게 많이... 상위층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천인데 북한에서 소위 선물로 줄 때. 제가 보기에는 저게 북한 가족 방문단에서 준비한 것보다는 여기서 선물로 팔기 위한 그런 내용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거든요.

[앵커]
평양술도 보이고요. 저 북측에서 저거를 하나씩 마련을 해서 우리 남측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오신 분들한테 나눠줬다고 해요, 저걸. 그래서 지금 행사가 끝이 나고 /개별 상봉이 끝이 나고 이런 선물을 받았다고 지금 저희취재팀한테 얘기하는 건데. 이 영상은 보면 지금 개별 상봉을 하고 있는데 도시락을 갖고 배달한다고 봐야겠죠?

[기자]
이번에 처음으로 21번째까지의 이산가족 만남이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 생긴 제도라고 해야 되겠죠. 프로그램인데 외부의 시선 없이 가족들끼리만 만나서 객실에서. 그러기 위해서 개별중식이라는 용어를 전했습니다, 남과 북이. 그래서 북측이 준비한 도시락을 합니다. 그러니까 24일부터는 똑같은 형태가 되는데 우리가 도시락을 준비해서 북측에서 내려온 이산가족 가족들한테 전해지는 그런 형태가 되겠습니다.

[앵커]
지금 도시락을 나눠주시는 분들을 보면 전부 다 한복을 입고 계시고요. 한복을 입고 계시는데 통상적으로 북한에서는 저렇게 한복을 계속 입고 계신가요, 아니면 특별히 행사라서 저렇게 입은 건가요?

[인터뷰]
특별한 행사고 북한은 정부 행사라든지 이산가족 행사, 대외에 많이 알릴 수 있는 그런 행사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여성들이 한복을 입고 이렇게 그 자리에서 한복을 입고 행사에 임하는 일이 많죠. [앵커] 지금 조금 전에 도시락이 배달이 됐는데 도시락 메뉴도 궁금합니다. 명 선생님, 혹시 저걸 잠시 뒤에 열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사이다, 금강산, 물이겠죠?

[인터뷰]
배사이다.

[앵커]
메뉴가 혹시 보입니까?저게 어떤 건지 보이시나요? 밥하고... 이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인터뷰]
약간 수산물 순대 비슷한 것 같고.

[기자]
저건 이제 우리로 말하면 쉽게 말해서 작고하신 저희 어머니도 저 비슷한 음식을 해 주셨는데 완자 중 일부인데 저걸 기름에 굉장히 많이 튀깁니다, 절구에 빻아서. 전 그다음에 지금 형태로 봤을 때는 달걀조림이죠. 이런 형태가 나오고. 지금 하나 추가로 금강산 물은 생수병 형태가 우리 시중에서 편의점에서 파는 생수병이 똑같습니다. 작은 게 있고 1.8리터로 똑같은데 저걸 왜 말씀드리냐면 2002년도에 북한이 합영법을 발표하면서 그때 서방자본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재일교포 자본가들이 들어가서 저런 생수공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북한도 저렇게 판매하는 생수병도 우리 것하고 똑같고 우리 시중에 고추장 팔지 않습니까, 빨간색 케이스에. 평양고추장도 참고로 케이스가 똑같습니다, 규격품이.

[앵커]
명 선생님, 저 도시락에 있는 메뉴, 반찬 그리고 밥. 북한의 일상적인 겁니까, 아니면 좀 잘 된 도시락입니까?

[인터뷰]
일반 사람들은 저렇게 못 먹죠. 상위층들은 저렇게 먹을 수 있지만 일반 사람들, 여기에 참여하신 분들이 저는 그렇게 상위층 분들이 아니라고 봅니다.

[앵커]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해서 북한 측에서 특별히 준비한 도시락?

[인터뷰]
그렇죠.

[앵커]
이런 것 같다는 말씀이시죠. 오늘 이산 상봉 행사 개별 상봉, 오전에 취재진이 전해온 바에 따르면 행사 도중에 잠깐 정전이 됐었다고 하더라고요. 한 2분 정도. 일상적인 일인가요?

[인터뷰]
그래도 2분 정도 뒤에 불이 왔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요. 이 행사를 위해서 미리 전에 다 준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정전이 되는 경우에 암암리에 이렇게 불이 또 올 수 있도록. 그런데 북한은 정전이 자주 일고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불이 안 오는 일도 비일비재한 형편이고요. 그래도 이렇게 정전이 안 되고 이렇게 더운 날씨에 정전이 안 돼서 너무 다행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앵커]
명 선생님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저 금강산 지역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인터뷰]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님이랑 같이 금강산에 많이 놀러갔었거든요. 저희 어머님 사촌이 금강산에서 중으로 일하고 계셨었어요.

[앵커]
스님이요?

[인터뷰]
네, 그래서 많이 놀러갔었는데 그 이후에 남측에서 많이 금강산 관광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로부터는 북한 사람들이 관광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앵커]
남쪽이 개방이 된 이후에 북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게 없게 되었다.

[인터뷰]
들어갈 수 없게 되었죠. 그래서 많이 아쉬웠고 북한분들이 좀 많이 의견이 있었어요.

[앵커]
좀 죄송하지만 불만이 있었겠네요?

[인터뷰]
네.

[앵커]
금강산 관광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아까 말씀하셨던 보장성원들이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 관심이 되게 많았다고 저희 취재진들이 전해 왔더라고요.

[기자]
사실 이렇게 봐야 되죠. 저희가 과거에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 있는데 그 전에 금강산 관광이 됐고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놓지 못할 달러박스죠, 외화벌이 수단인데. 지금 이번에 우리 이산가족 상봉단이 북측 기자들한테 현금으로 주는 것도 사실은 한화콘도에서 달러로, 미화로 환전을 했는가 봅니다. 환전을 해서 미화로 전달했는데 마찬가지 개념에서 볼 때 5.24 조치 이후로 스톱이 됐죠.

그리고 금강산 관광지구는 김정은 위원장이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는 원산지구와 연계돼 있는 겁니다. 차로 한 2시간 거리인데 우리 도로를 개선하면 한 40분 내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과거 어르신들이 말할 때는 원산만, 영흥만 일대 명사십리도 펼쳐져 있고요. 그래서 굉장히 천혜의 관광조건을 가진 곳인데 다행히 북한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겠죠.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제재가 있고 금강산 해제가 안 되고 사실 남북 접촉을 하다 보면 저 문제를 굉장히 풀어라. 저거와 서쪽에는 뭐가 있습니까? 개성공단 공업지구, 이 문제를 해제를 해라라고 요구를 하니까 아무래도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의 보장성원들이 한마디 한마디 기류 변화라든가 이걸 읽으려고 물어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앵커]
지금 저희가 보여드린 영상은 오전에 개별 상봉과 관련된 영상이고요. 잠시 뒤 시간이 정확하다면 한 3분쯤 뒤부터는 단체 상봉이 예정이 돼 있고요. 이 영상은 또 촬영이 되는 대로 북측에서 남측으로 인편으로 배달한 뒤에 저희가 보여드릴 예정인데요.

명성희 씨, 어제부터 오늘까지 오늘 건 첫 그림이고요. 어제도 상봉 장면, 가슴 뜨끈한 그런 장면들 많이 보셨죠?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산가족 어떤 분이 있으신가요?

[인터뷰]
어떤 분이 남측에 계시는 분이 아버지 머리에 혹이 있는데 하니까 맞아, 우리 아버지도 여기에 혹이 있습니다 하면서 그 순간에 포옹을 얼마나 뜨겁게 하는지 제가 그 장면 보고 막 소름이 끼쳤었어요. 그래서 너무 감동적이었고 또 어떤 할머님은 앞을 잘 보시지도 못하는데 북한에 있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걸 귀담아 들으시고 그런데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정말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하시는 분들한테 번호표를 새기고 그분들을 호텔에서 따로 만나게 하고 이렇게 이벤트 형식으로 이렇게 계속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고요.

이런 형식이 아니라 진짜 남에서 북으로 가서 이산가족, 그러니까 가족 방문도 하고 또 북에 있는 분들은 한국에 오셔서 가족 방문도 하고 이것이 정말 통일로 가는 한 오솔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날이 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기자]
사실 이번에 우리가 이산가족을 21번째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1차를 2000년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1차로 계산합니다. 그런데 이거는 정기적인 남과 북의 약속이고 그 전에 말씀하신 1990년대 중반 남북이 고위급회담을 한 적이 있어요. 최고위급, 그러니까 당시 우리는 정 총리가 있었고. 그래서 지금 말씀하신 대로 남측 관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한 번 했고요. 서울로 와서 한 번 했습니다. 그때는 어떤 형식이었냐면 저렇게 사전에 약속을 해서 한 게 아니라 아마 강남의 특정 호텔, 호텔 홀에서 남측 가족들을 기다리면 문이 열려서 한꺼번에 북측 가족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눈물바다를 이루는.

[앵커]
그 얘기 하니까 제가 현장에 있었거든요. 그 큰 체육관에서 계속해서 울음소리만 들리는 거예요. 그게 한 10분 갔나요? 저는 그렇게 기억이 되는데.

[기자]
그렇게 됐고 그다음에 지난 3.1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축사에 언급했던 오영재라는 북한의 계관시인이 있습니다. 월북 작가인데 어머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그래서 오영재 시인이 1950년대 와서 자기 어머님이 전남분이신데 전쟁 과정에서 북으로 갔는데 이분이 굉장히 낭만주의 시를 많이 썼죠.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도 받고 그랬는데 그 시를 낭독을 해서 당시 눈물바다를 서울 전체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시를 회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고 굉장히 시집에 많은, 굉장히 우리의 이산의 아픔을 감성을 드러내는 굉장히 잘 쓰여진 시인데 그런 적도 있었죠.

[앵커]
남이나 북이나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명 선생님, 북한 사람들에게 북한 계실 때 혹시 기억이 나시면 이산 상봉 행사,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나요?

[인터뷰]
그동안 저희 할머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항상 남한에 월남하신 분들 기억을 되살리면서 옛말처럼 말씀을 항상 하셨어요. 그렇게 옛말처럼 하던 분들을 그 자리에서 생생하게 만나게 되니까 얼마나 가슴이 찡하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분들을 가족들을 다 만나고 하다 보니까 너무나도 그 뜨거움에 목이 메서 와서는 그 트라우마가 생겨서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가지고 힘도 제대로 못하고 목이 아파서 말도 못하시고. 오히려 기뻐서 잘 다니고 해야 되는데 더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앵커]
약간의 부작용이네요.

[인터뷰]
부작용이 있고 자꾸 우울증 현상이 옵니다. 내가 그때 우리 오빠를 만났는데 그렇게 오빠가 나 많이 늙었다 그러고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런데 그분들이 정말 힘들게 거기서 사시고 하시다 보니까 여기 한국분들의 생활에 비해서는 많이 겉늙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보다시피. 그러니까 어떤 분은 어머니가 너무나도 자기 모습 보고 너무 힘들어하시더라. 계속 앓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계속 우시는 분들. 그러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계속 한을 안고 살아야 되나 하고 계속 우세요.

[앵커]
지금 명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정말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 더 나아가서 상시화, 더 나아가서 조금 더 몇 발짝 더 나아가서 통일에 대한 생각을 좀 간절하게 하게 되는데.

[인터뷰]
그렇죠. 지금 상황들이 북한만 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어떤 마음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통 큰 판단력을 내려서 좀 현명하게 남측에 있는 분들, 아무런 것도 바라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한에 있는 분들이 북한에 방문을 한다든지 북한에 있는 분들이 남한을 방문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가족의, 혈육의 뜨거운 마음을 그동안 못 나눈 그런 마음들을 다 한 번에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더 간절해집니다. 화상통화나 영상통화도 좋겠지만 만남 이상 좋은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앵커]
저희가 오늘 오전에 있었던 개별상봉 영상은 대체적으로 봤고요. 지금 조금 전부터 아마 예상대로라면 단체상봉, 어제와 비슷한 형식의 단체상봉이 지금 진행이 되고 있는데요. 여기까지 듣도록 하고요. 이 단체상봉과 관련된 영상은 다시 또 들어오는 대로 이어지는 뉴스 시간에 저희가 곧바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그리고 북한 출신의 팝페라 소프라노입니다, 명성희 선생님이었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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