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특별기획]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YTN 특별기획] 열도의 독립운동가들

2018.03.01. 오전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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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이 살고 있는 도쿄의 에도 성.

일제 식민 통치가 서슬 퍼렇던 1932년 1월 8일.

바로 이곳에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죠.

[PD : 사쿠라다문이 독립운동 관련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바로 여기 앞에 있는 작은 문인데요. 천황 황가가 바로 여깁니다. 사쿠라다문 앞쪽으로 해서 여기가 일본 관가의 중심이라고 치면 반대편에 방향이 긴자인데 저기는 일본 금융의 중심, 그러니까 일본의 중심은 언제나 천황가를 중심으로 해서 정치 경제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가장 제국주의에 중심에 서 있는 상징적인 인물인 천황을 제거해야지 우리가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천왕을 대상으로 천황을 대상으로 의거를 하려고 시도를 했던 겁니다.]

비록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과도 같은 곳에서 감히 일왕을 상대로 한 테러는 이봉창 의사의 시도가 처음이었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이 사건은 당시 침체일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계기가 됐습니다.

[PD : 1919년 2월 8일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그때 2월 8일에(재일본도쿄조선 YMCA에서) 독립선언을 한 다음에 2월 12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서 여기에서 유학생들이 가두행진을 했거든요. 그 당시에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 멤버가 천명 가깝게 됐다고 듣고 있습니다만 그분들이 독립 의지가 더 고취가 되는 그로부터 일 개월 후인 3월 1일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이 조선반도 전체에서 한반도에서 들불처럼 퍼져나갔던 식민지 36년 동안 가장 대중이 독립에 대해서 고취를 하고 운동을 했던 그 시작을 일본에서 했다는 거죠.]

[PD : 아! 그럼 어떻게 보면 한반도에서의 3.1 운동의 계기 중에 하나로서 2.8 선언]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직접적인]

[PD : 아!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던 거군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이 공원을 가끔 다니긴 했는데 이렇게 영향력이 큰 장소였는지 몰랐네요.]

항일 독립 운동은 식민지 조선과 중국을 주요 무대로 이뤄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 일본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들의 행적을 찾아 나섭니다.

[강성춘 / 민단 나가사키 중앙지부 단장 : 해방 전 일본에서 항일 항쟁을 했던 사람들의 운동과 사실을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혹은 재일동포 분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호리우치 미노루 / 재야학자 : 일본에서는 유명한 활동가도 한국에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역시 정당하게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에 대한 경의라고 할까, 그게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도쿄의 한 작은 놀이터.

언뜻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놀이터 한 켠에 놓인 작은 위령탑만이 이곳이 과거 형무소였음을 알리고 있을 뿐입니다.

[PD : 여기에 이봉창 의사가 수감됐다고]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네.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에 천왕을 폭살하려고 사쿠라다문에서 폭탄 투척을 하셨다가 체포되셔서 수감 된 데가 도쿄 이치가와 형무소. 형을 받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탑입니다. 1964년 7월에 일본 변호사 협회가 세웠기 때문에 과거에 형무소 터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요. 수많은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슴 아픈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바로 여기에서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이 터에서 또 한 명의 독립 운동가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자막 '박열' : 나는 잡힌다. 조선인 대학살도 묻으려 한다.]

[가네코 후미코 : 박열과 같이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박열 : 우리 조선인들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

바로 얼마 전 영화로 만들어져 재조명된 박열.

그가 처음으로 수감된 곳도 바로 여기 이치가와 형무소였습니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일본 제국주의는 정치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 책임을 재일 조선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니다.

그 때문에 당시 일본에 기거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처참하게 학살 당했습니다.

[츠카사키 마사유키 / 재일조선인 역사 연구 : 3.1운동 이후 일본 미디어는 ;불령조선인'(유쾌하지 않은 조선인)이라는 것을 많이 보도합니다. '조선인은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 그런 사상이 스며듭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깔보는 정서가 확실히 있었으니까 자기들의 단결력이 약해지는 사이에 (조선인한테서) 보복당할 거라는 공포심이 (있었습니다). 폭탄이나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바로 믿어버리는, 그들은 우리에게 보복을 할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관동 대학살은) 여러 복합적 이유가 일으킨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이 무렵, 당시 일본에서 한창 아나키즘 운동에 몰두하고 있던 박열은 그의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대역죄로 체포됩니다.

호기롭게도 박열은 자신의 재판을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당시 박열의 사상적인 배경은 아나키즘이었다고 하는데요.

아나키즘은 모든 국가 권력을 부정하는 사상이지만 조국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성격도 함께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어떠한 권력이나 지배보다는 보다 더 자유롭고 힘의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조선이라는 자기의 민족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인 그런 성향이 없지 않았다는 건 이야기할 수 있죠.]

결국, 박열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국제 여론의 악화를 의식한 일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는데요.

22년이 넘는 수감 생활 끝에 해방 이후에야 풀려나게 되죠.

박열은 해방 후, 재일동포들의 단체인 신조선건설동맹의 초대위원장과 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으며 또 다른 의미에서의 독립 운동을 이어갑니다.

[이문창 /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회장 : 그 어른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자주독립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다 해야지, 외국에 의지하지는 말자, 외국이 신탁통치를 하는 얘기는 다시 일제 36년을 연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에서 온 그 임시 정부를 떠받드는 그런 운동을 우리는 해야 한다. 그 아래에 우리 전 민족이 단결하고 새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이런 기초를 잡아야 한다. 이것이 박열 의사가 우리에게 전해 준 말씀이었습니다.]

박열과 함께 사형을 받고 수감되었던 부인 가네코 후미코는 투옥된 지 얼마되지 않은 1926년, 23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사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현재 남편 박열의 고향, 문경에 묻혀 있는데요.

박열은 1949년 영구 귀국한 이듬해 발발한 한국 전쟁 당시 납북돼 안타깝게도 부인과 함께 고향에 묻히진 못했습니다.

대신 문경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기개와 저항.

그러나 너무 짧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기념관 안의 여러 모습으로나마 재연되어 있습니다.

1933년, 일군의 조선인 청년들이 중국의 상하이에서 일본 공사를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모의합니다.

그러나 작전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외 3대 의거 가운데 하나인 ‘육삼정 의거'입니다.

[PD : 육삼정 의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이봉창 윤봉길 사건에 더불어서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해외 3대 독립 의거입니다.]

[PD : 육삼정 의거 지도를 보여주십시오.]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네. 그래서 이거 보시면 육삼정 의거가 처음에 일어났을 때 보도 기록인데 여기가 육삼정이고요. 이 사람들이 송광춘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만나서 이게 무창로인데요. 이렇게 이동해서 여기에서 대기하다가 붙들려서 세 명이 체포돼서 갑니다. 일본 경찰이 압수했던 당시 무기류입니다. 보시면 이거랑 이게 같은 건데 가운데 이게 도시락 폭탄입니다. 1932년에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썼던 도시락 폭탄 그것과 동일한 것인데 제가 들은 기록에 의하면 도시락 폭탄이 두 개가 준비가 됐는데 윤봉길 때 하나 쓰고 남겨둔 도시락입니다. 사실 동일한 거죠.]

당시 작전을 모의했다가 체포된 흑색공포단의 단원들은 모두 일본으로 압송됐는데요.

주동자였던 원심창 의사는 재판을 받은 뒤 나가사키 형무소의 독방에 갇혔습니다.

지금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자 폭탄이 투하된 장소라는 걸 기리는 평화 공원으로 조성돼 관광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수많은 조선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형무소였다는 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까요?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여기가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형무지소 자리입니다. 여기가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육삼정 의거를 하였던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이 세 분이 압송되었던 자리입니다. (원폭 투하) 당시 원심창 의사가 독방에 있다가 다른 데로 이감이 되면서 목숨을 구명할 수 있었고요. 원심창의 경우에는 가고시마 형무소에서 1945년 10월 10일에 출옥하여서 자유의 몸이 됩니다. 만약에 여기 계셨으면 당연히 돌아가셨을 테고 원자 폭탄 떨어졌을 때 여기 형무소에 조선인들이 있었다. 조선인 최소한 13명인데 13명이라는 게 정말 제일 작은 숫자 확인된 게 13명이고 그 이상이라는 거죠. 폭탄이 떨어졌을 때 형태가 없을 정도의 폭격을 맞은 거잖아요. 독립운동하셨던 분들 그리고 민족 지사들이 여기에 수감되어 있던 것도 독립운동의 하나의 흔적인데 상하이에도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있다고 하고 여순감옥 하와이까지도 이렇게 가는데 왜 일제의 본산이었던 일본 땅에서의 독립운동 민족 지사들이 이렇게 조명받지 못하는가 그리고 이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들어와서 이 장소가 한국의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이 갇혀 있다가 죽었다, 이런 것에 대한 조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 놀라웠고 정말 애석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 한국 정부 그리고 본국에 계신 분들이 각성을 하여서 나가사키에 오실 때는 반드시 여기에서 그 선열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찾아보고 공부하고 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원폭에서 간신히 목숨을 거진 원심창 의사는 해방이 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박열과 함께 민단을 설립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 운동에 이어 통일 운동에 앞장 섰던 원심창 의사는 재일동포을 위한 신문, 통일일보를 창간하기도 했습니다.

[강창만 / 통일일보 사장 : 통일일보 창간호입니다 1959년 1월 1일 자로 조국에 평화통일의 완수를 위하여 민족의 총력을 기울이자 하는 결집하자 해서 우리 재일동포에게 고한다. 창간에 지금 하여. 이런 제목으로 제1호가 나옵니다. 원심창 선생님이 아주 특이한 건 독립운동하셨다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리가 독립을 한다는 것은 통일이 완수돼야 통일이 된다, 이런 취지에서 이 통일 운동에 같이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1959년 1월 1일에 창간하게 되면서 그전에 일본으로 오신 이영근 선생님과 합류해서 이 신문을 만들게 됐습니다. 조국이 평화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민족의 총력을 기울이자. 결집하자.]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바로 여기가 의사 원심창 지묘입니다. 그분이 한국 전쟁 때 11대 12대 민단 중앙 단장을 하셨고 그 파병을 할 때 사람들 청년 학생들을 모으는 데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12대 단장을 하실 때는 전쟁의 피해자들을 돕는 조직체를 만들어요. 민단 안에. 그런 운동을 하셨는데 어찌 됐건 본인 때문에 선량한 청년들이 꽃다운 청춘을 바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돌아가실 때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토대학교.

시인 윤동주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몽규 선생이 유학했던 학교입니다.

영화 <동주>를 통해 소개되면서 송몽규 선생은 최근 재조명받고 있는데요.

영광스럽게도 제가 영화 속에서 송몽규 선생 역할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토대학교 문서관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를 찾아냈습니다.

송몽규 선생의 입퇴학 관련 자료들입니다.

우선 선생이 유학 전에 다녔던 연희전문, 지금의 연세대학교로부터 받은 추천서가 남아 있습니다. 자필로 쓴 입학 서류에는 창씨 개명 때문에 ‘쿠니무라‘라는 일본어 발음표기가 적혀 있습니다.

송몽규와 운동주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43년 7월.

그로부터 얼마 뒤 학교 측이 송몽규를 방학, 즉 퇴학 처리한다는 처분서 역시 남아 있었습니다.

송몽규는 결국 후쿠오카 감독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옥사했습니다.

사촌인 윤동주 시인이 같은 형무소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뒤였습니다.

두 사람이 갇혔다가 사망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지금 터만 남아 있고, 형무소는 인근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민호 / 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우리나라에서 윤동주라고 하면 남녀노소 누구나 다 아는 사람 같은 친근한 이미지가 있는 반면에 같은 동료였던 송몽규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동주'라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송몽규란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동주랑 송몽규가 고종사촌 지간 나이도 같았고 이 사람들이 같은 혐의로 사실 이 구치소 형무소에 2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구치소의 높은 담벼락의 높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윤동주와 송몽규가 이 근처에서 붙들려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PD : 사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구치소의 높은 벽만 봐도 그런 억울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일본에 유학 와서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식민지 청년.

대학 입학 전부터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송몽규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미즈노 나오키 / 교토대학교 명예교수 : 윤동주 판결문을 보면 일본이 조선어를 금지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다고 비판한다든가, 민족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친구에게 말했다는 게 판결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윤동주에 관해서는 문화적인 문제가 주된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송몽규 쪽은 그러한 문화적인 문제도 있지만 더 정치적인 발언이었죠. 예를 들어 "일본이 패전했을 때 우리는 앞장서야 한다"라는 걸 친구에게 말했다는 그런 정치적인 발언이 송몽규 판결에는 적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송몽규는 독립에 대해 적극적이고 윤동주는 물론 공명은 하지만 그것과 또 다른 문화의 문제를 중요시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둘은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시 낭독 : 송몽규 '밤' : 밤 (夜)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 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일제의 한 복판에서 제국의 심장을 향해 저항했던 사람들.

무장 투쟁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지만 열도의 독립운동가들은 분명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결과적으로 일본의 독립운동가들은 머리를 써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억울함을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할 것인가 했을 때 동지를 규합을 하고 어떻게 보면 시민 연대가 최선의 방법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의 옹호하는 지지자들과 연대를 하려고 했고 그런 면에서 한국의 운동가들이 굉장히 머리가 스마트했다고 할까요. 굉장히 현명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봅니다.]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족적은 일본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츠카사키 마사유키 / 재일조선인 역사 연구 : 왜 독립을 지향했어야 하는지를 일본인이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의 마음과 행동을 일본인으로서 파악하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즈노 나오키 / 교토대학교 명예교수 : 앞으로의 일본과 한국, 한국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는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해방된 조국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다짐입니다.

바로, 우리 후손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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