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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특별기획] 재일동포 1세의 기록 '하나의 역사, 또 다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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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 2018-02-15 06:56
YTN 특별기획

일본의 식민지배,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

가혹한 역사 속 많은 한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일동포 1세.

그들이 지켜온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강경남 / 93세·재일동포 1세 : (Q. 왜 일본에 오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일본 먼저 오고 그다음에는 우리 오빠가 오고 그다음에는 우리 언니가 일본에 오고 나하고 어머니하고만 남았어, 한국에. 남으니까 일본에 살던 여성이 조선에 갔다 온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시켰더라고. 그렇게 해서 어머니하고 나하고 그 언니하고 (일본 오사카에)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난 여덟 살, 여덟 살 때 왔기 때문에 아버지 얼굴도 못 봤습니다. 일본 와서는 아버지 얼굴 봤어. (그때는) 일본 사람하고 미국 사람과 전쟁(태평양 전쟁)이 났어. 전쟁이 나니까 큰 고동(사이렌)이 울면 큰 비행기가 떠서 온다. 사람이 꼼짝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비행기에서) 폭탄을 던진다. 폭탄 던지면 집이 다 부서진다. 비행기가 온다고 고동이 불면 절대로 밖에 나가면 안 돼. 가만히 집 안에 들어앉아 있고.]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일본에 오게 된 계기는 생활이 어려웠으니까 저는 된장을 먹고 자랐으니까. 그 정도로 힘들었어요. 일본의 옛날 경찰이라 하는 것은 지금 경찰과 달리 조선인과 일본인을 바로 구별할 수 있었어요. 나는 파출소 앞을 지나가면 경찰이 일로 오라고 했고. 길 걸어가기만 해도 알 수 있었어. 그때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어. 결국 저때 그들이 말하는 '불령조선인'인지를 조사하는 게 경찰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1910년 한반도는 일본 식민지가 됐다.

땅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노동을 위해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또한 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징용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방송 : (앞으로 일본은)견디기 어려움을 견디고 참기 어려움을 참음으로써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고자 한다.]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8월 15일. 일왕의 방송을 잘 못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왠지 일본이 패전했다는 걸 주변 분위기를 봐도(느꼈어요). 그래서 나는 '아, 이걸로 우리도 자유로워지는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뭐 자유로워진다기보다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Q. 차별도 그 이후 없어졌어요?) 차별이 없어졌다고는 못 하지. (차별이) 없어지지 않았지만 우리 스스로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사니까 차별을 받아도 그전과 달랐지.]

일본 패전이 곧바로 한국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놨다" -조선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땅속에 빠져갈 듯한 실망감이었어요. 정말 서 있는 채 땅으로 빠져갈 듯한. 일본이 전쟁에 질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내 또래는 다 비슷했겠지만 나처럼 열정적인 '황국소년'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내가 너무 미쳤던 거죠.]

식민지 시절 일본은 조선인이나 타이완인에게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강요하는 '황국민화 정책'을 폈다.

제주도에 살면서도 일본어밖에 모르던 김시종 씨는 해방 당시, 일본 승리를 믿고 의심치 않은 17살 '황국소년'이었다.

[김시종 씨 책의 문구 : 아무래도 내 안에는 몇 명의 소년이 함께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서투르고 호기심 가득한 소년이 먼저 있고 지시를 잘 따르고 황국신민이 되려고 애쓰던 소년도 있습니다. 거기에 고집불통이고 감상적이며 노래와 시가를 좋아하는 소년 역시 있습니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Q. 해방 후 바로 한반도를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식민사관 탓에 해방 직후) 열흘 정도는 밥도 못 먹을 정도 깊은 실망감에 빠졌는데. 그러다가 열흘 정도 지나 온 나라가 동네가 떠나갈 듯 환희에 넘쳤죠. 하루 종일 '만세' 소리가 들렸고. 대중들 속에서 학생이나 청년들이 교통 정비로부터 시청, 구청 업무까지 다 했고. 정말 대단한 질서였죠. 감명받았어요.]

독립의 기쁨도 잠시 소련은 북한에서, 미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시작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중지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김시종 씨 또한 남로당 당원이었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1948년 5월에 일어난 일인데 (남로당 중에) 우체국에 왔다 갔다 하는 동지가 두 명 더 있었는데 둘이 우체국 입구에서 총살당했어요. 그 보복을 하기 위해서 우체국을 폭발시키는 계획이 세워졌어요. 우체국에는 경찰들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데 나는 우체국에 매일 가니까 수제 폭탄을 들고…. 우체국에는 낮이 되면 특공경비대라고 그 사람들에게는 특별 수당을 줘요. (때문에) 자기 고향 가족에 보내는 우편물의 환어음이 많이 모여요. 그것(환어음)을 태우려고 했는데 잘 안 돼서 쫓기는 몸이 돼 숨기게 됐어요. 그러니까 탈출하는 것 자체가 기적 같았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 모두 바꾸고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먼저 외딴 작은 섬(관탈섬)으로 보냈어요. 작은 어선에 태우고. 그리고 그 섬에서 일본으로 갔는데. 마이코(오사카 인근의 소도시) 바닷가로 오니까 (함께 도망쳐 온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싹 흩어져 사라져버렸어요. 나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었죠. 사람이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는지 몰랐어요. 여기가 어딘지 몰랐고.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고. 그러다가 같은 배로 온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따라 (오사카로) 가서 자이니치 생활이 시작됐지요.]

자이니치(재일동포)의 시작.

교토 우토로, 오사카 이카이노에는 재일동포 집단거주지가 형성되었다.

해방 직후 재일동포의 70%가 일자리를 잃었다.

생존을 위해 뭐든 해야 했다.

[강경남 / 93세·재일동포 1세 : (한 남성의) 어머니가 전쟁 끝나고 나서는 조선 탁배기(막걸리)를 만들어서 그때만 해도 탁배기 만들어서 판다고 하면 대번에 잡혀가요. 하지만 같은 조선인이잖아. 동포니까 신고는 할 수 없잖아. 그 어머니가 그걸 팔아서 아들을 지금 말로는 도쿄야, 학교에 보냈거든. 근처의 남자도 학교 보내고 지금 여기는 근처에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뭐든지 있잖아. 그때는 없었으니까.]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오사카에 와서) 태어나고 처음으로 노동이라는 걸 했는데. 양초 공장에서. 하숙하면서 일할 수 있는 데를 찾아갔는데 그게 이카이노 1가의 양초 공장이었어. 말이 공장이지 빈 땅에 지붕을 세우고 양철로 만든 것인데, 단조로운 일이었지만.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문명국이고 일본에서는 동포들도 꽤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또래 동포 중에서는 초등학교도 못 다닌 아이들이 많았어요. (공동주택에) 수도가 하나만 있었고 그 공동 수도에서 좀 떨어진 데에 공동 화장실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오수가 공동수도 쪽으로 흘러넘치더라고요. 그런 데서 자랐어요. 끔찍했죠. 정말로.]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해방 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서 뭘 하려고 해도 취직할 길이 없었어요. 어려웠어요. 자기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공장 일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은 결국 뭘 해야 하느냐는 (고민으로) 머리를 쓰고 있었고. 밥은 먹어야 하니까. (Q. 파친코 사업을 하는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때 일본에서는 대중오락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대중오락의 일종으로서 파친코가 생겼는데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쓴 것이 파친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해방과 동시에 본격화된 냉전.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재일동포 사회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우리들은 재일동포의, 말하자면 일본 사람한테서의 차별이 심해 불행했다고 하지만 그 이상에 동포끼리 반목하고 욕설하고 그게 더 큰 불행입니다.]

갈라진 자이니치(재일동포) 사회.

재일동포들은 해방 직후, 하나의 민족단체인 '재일조선인연맹'을 설립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되면서 재일동포 사회도 북한을 지지하는 '총련'과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으로 갈라졌다.

사회주의를 믿었던 김시종 씨는 1952년 일본이 한국전쟁에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는 스이타 시위에 참여했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한국전쟁 발발 2주년(1952년), 6월 25일에 반전평화를 위한 궐기대회를 치르기 위해서 스이타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화물차가 교체하고 대기하는 곳이 있으니까 스이타 정차장의 열차 운행을 방해하는 것이 스이타 사건의 가장 큰 목적이었는데 그 군사열차를 한 시간 늦추면 천 명의 조선인 동포가 구해진다고 해서 열차의 운행방해를 위해서 작전을 세웠죠.]

일본과 북한은 1959년부터 20여 년간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벌였다.

민단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민단에서는 엄청나게 반대를 했었어요. 니가타에 갈 기차 레일 위에 누워서 레일을 막을 정도로 반대했습니다. 나도 앞장서서. 나는 도치기 현에 있었으니까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마이크를 들고 북한을 비판하면서 '북한으로 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죠, 역시. 그리고 사람들이 간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에서 실업자가 많았거든요. 생활이 어려웠었거든요. 그래서 생활이 어려웠던 데다가 총련의 선전에 속았다는 두 가지 이유가 아마 수면 아래에 있습니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라는 것은 물론 조국 분단의 여파를 받습니다. 한 집 안에서도 총련을 지지하는 사람과 민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도 한 곳에 같이 살아왔다니까. 입장이 다르고 받드는 정권이 달라도 그래도 생활권은 같이 살아왔다니까. 관혼상제도 같이 지냈고. 이것을 목적 의식적으로 의식화한다면 이것은 큰 우리들의 민족 융화에 대한 전망입니다.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같이 해왔고 일상적으로 같이 살이 살 수밖에 없었고 우리나라가 통일이라는 건 언젠가는 되겠죠.]

일본에서 지켜온 것들 1987년 우토로.

토지 소유자가 주민 몰래 땅을 팔았고 재일동포들은 강제 퇴거 위기에 직면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강경남 씨의 20여 년간의 투쟁이 시작됐다.

[강경남 / 93세·재일동포 1세 : 여기 사는 사람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잖아. 싸우잖아. (마을) 입구가 있었잖아. 거기에 내가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데 그 트럭이 내 옆에 와서 내리더라. 내려서 남자가 '어디 아프냐'고 하더라. 남자가. 그리고 '아줌마 여기서 뭐 하느냐' '왜 여기서 누워 있느냐'고 하니까 '왜 안으로 들어가느냐'(고 했더니) '집 부수러 간다'고 하대. '집 부수러 안으로 들어간다면 나를 깔아 죽여라'고 했다. '깔아 죽이고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90년대 민단 단장을 맡은 신용상 씨.

재일동포의 권리 획득은 최우선 과제였다.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일본 사람들의 차별이 얼마나 심했냐면 외국인 등록증을 바꿀 때 14세 이상 되면 지문날인을 했어요. 일본에는 죄 없는 사람들은 지문날인을 안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14살이 되면 죄인 취급을 받는 거야. 우리는 본국에 돌아간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만든 조직이 (재일본조선) 거류 민단이었어요. 그런데 몇십 년 살고 보니까 한국에 가서 우리가 살 수가 없잖아요. 한국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일본)서 살아야 한다. 여기(일본)에서 살려면 여기서 권리를 얻어서 일본 사람과 같은, 동등한 권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민단의 조직명에서 '거류'라는 말을 빼고. 동시에, 내가 단장 되었을 때 운동한 것이 지방참정권 (획득운동)이에요. 내가 지방 참정권을 받아야 하겠다고 6년간 애를 쓰고서 했는데 성공을 못 했어요. 그게 관철되었으면 지금 우리 재일동포의 입장이 지위가 영 달라졌을 건데….]

스무 살 때 제주 4.3 사건으로 밀항.

남북한,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틈새의 시인.

김시종 씨가 일본어로 시를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나는 나 스스로를 만든 일본어에 보복을 하고 있는 셈이죠. (해방 후) 손톱으로 벽을 긁듯 한글을 배웠죠. 죽을 힘을 다해 공부했어요. (하지만) 나의 의식이라는 건 일본어로 만들어져 있던 셈이야. 언어라는 건 인간의 의식이기도 하거든. 일본어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언어잖아요. 우리나라는 해방돼서 일본어와는 인연이 끊어졌겠지만 일본에서 살면서 여전히 그 언어로 살고 글을 쓰게 된 것이죠. (해방된 지) 70년 이상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요. 일본에 살 수밖에 없는 놈이 일본에 산다는 뜻을 또 내가 일본에 산다는 뜻을 연달아 집요하게 써가죠···.]

경계를 넘다.

[강경남 / 93세·재일동포 1세 : (Q. 우토로 투쟁, 그 후 어떻게 됐어요?) (우리는) 마이크로 방송하고 그렇게 오사카도 가고 교토도 전부 다 가고 나고야도 가고, 와카야마도. 많은 곳을 다녔다. 그 방송을 남성들이 듣고 여성들도 듣고 찾아와서 소리 들으러 왔어. '그건 안 된다'고 해서 재판도 하고 재판할 때도 모두가 응원해줬다.]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나는 이제 자식도 여기서 낳았는데 나는 고향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뭐,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데 죽고 나면 '무(無)'인데 뼈만 가지고 본국에 가면 뭐합니까. 1, 2세 정도만 해도 과거의 우리 역사를 잘 알고 우리가 일본에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하다 보니까 모두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차차 차차 이것도 자기 출생에 대한 정체성이 별로 적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람답게 살려면 자기 출생을 소중히 생각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뿌리 잡으면 쉽게 옮길 수 없잖아요. '재일을 산다'라는 말은 옛날에는 망언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관용어처럼 씁니다, 다들. 그것은 어느 한쪽에 종속된다는 게 아니라 양쪽 다 시야에 같이 놓고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것은 동족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생활권이나 인권(을 말해요) 그건 걸 우리 같이할 수 있잖아요.]

국가, 민족, 언어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경계를 넘어온 세 명의 재일동포 1세들.

그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신용상 / 93세·재일동포 1세 :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사는 데가 자기 고향인데 여기서 몇십 년이나 살았는데 어딜 가도 사는 그곳이 제2의 고향이라 말이야.]

[김시종 / 89세·재일동포 1세 : '경계를 넘는다', '경계를 드나든다'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재일동포들입니다.]

[강경남 / 93세·재일동포 1세 : 오고 온갖 군데서 사람들이 다 왔어요. 사람들이 차비 써가며 와서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차비 써서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경계를 넘어, 다시 하나로.

재일동포 1세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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