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글로벌 코리안] 재일 한국인, 21세기의 초상 - 2부 신(新) 도래인의 시대

[특집 글로벌 코리안] 재일 한국인, 21세기의 초상 - 2부 신(新) 도래인의 시대

2015.07.26. 오전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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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중심가에 위치한 신오쿠보.

한류 타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한국 관련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정착해 생계를 꾸려가는 재일 동포들은 대부분 20~30년 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이들.

재일 동포 사회는 이들을 일제 강점기에 정착한 동포들과 구별해 '뉴커머' 라고 부릅니다.

[나가노 아키라, 아사히 신문 기자]
"도쿄의 신 오쿠보는 원래 전후 타이완인을 중심으로 중화요리점이 많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것이 한류 붐을 계기로 뉴커머 사람들이 중화요리점을 사들여서 한국요리점이나 한류 상품을 파는 가게로 바꾸었고 지금은 완전히 한류 마을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뉴커머들은 도쿄 중심지 한 켠에 한국의 색깔을 정착시켰습니다. 백제 때 일본에 정착한, 이른바 도래인들에 견줄만한 왕성한 활력.

최근 점점 더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 동해를 건너 열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신도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도쿄 시내 '키타미'라는 이름의 주택가.

이른 아침부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립니다.

작지만 깔끔한 아파트에서 노래를 작곡하고 있는 이 사람.

바로 5년 전 일본에 온 가수 제이입니다.

제이는 한류 붐을 타고 일본에 오는 아이돌 가수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신의 곡을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싱어송라이터'입니다.

[제이, 가수]
"일본이라는 땅에 제가 한국 사람이 와서 저만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가사를 쓰기 시작하고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가사에는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뒤섞여 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한다고 굳이 일본어로만 노래해서는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싱글 앨범도 냈습니다.

그리고 직접 뮤직비디오도 찍었습니다.

[제이, 가수]
"한국에서 음악 활동했었는데 25살 때 음악을 포기했어요. 새로운 꿈을 찾던 도중에 일본에 신문 장학 제도가 있더라고요. 초기 비용 없이 일본에 와서 유학 생활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보고 나서 일본에 오게 됐습니다. 신문을 돌리고 일본어를 배우면서 노래하고 싶은 욕망이 계속 안에 있었기 때문에,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기 때문에, 그런 계기로 인해서 다시 음악을 하게 됐습니다."

늦은 오후, 일본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산실인 시부야 지역의 공연장에 도착했습니다.

나고야 출신의 2인조 보컬 그룹의 무대에 오프닝을 여는 게 오늘 제이의 역할입니다.

자신의 본 공연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세 곡뿐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릅니다.

[제이, 가수]
"정말 일본에서 아주 밑바닥, 언더그라운드부터 위에까지 올라가서 성공했다는 가수가 한 명 나와준다면, 많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아티스트나 친구들이 그걸 보면서 꿈과 희망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공연이 모두 끝날 무렵, 자신의 싱글 앨범을 판매하고 있는 제이에게 낯익은 일본인 팬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순간만큼은 행복감을 감출 도리가 없습니다.

[제이, 가수]
"어디서 라이브를 하든 간에 저를 응원해주러 오는 분들이 있으셔서 정말 고맙고, 그런 거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더 큰 꿈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녁 공연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나 그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건 팬들입니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제이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또 다른 한국인 뮤지션 제이리.

일본에 온 지 3년밖에 안됐지만 자신의 단독 공연을 갖게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연 무대는 도쿄 시부야의 작은 라이브 카페.

[제이 리, 가수]
"한국 사람이 일본어로 곡을 만드네? 일본말로 심경을 토로하네? 이런 데 대해서는 반감이라기보다 신기하게 보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아, 어떻게 다른 나라말을 가지고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줄 수 있을까' 이런 것."

드디어 공연 시작.

제이의 가창력과 세션 멤버들의 멋진 연주에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듭니다.

객석을 메운 관객들은 주로 여성들인데요.

하지만 연령대는 20대에서 50대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이들은 제이 리의 음악을 즐기고 지지해주는 든든한 응원군입니다.

[제이 리, 가수]
"문화란 건 정치라든가 역사라든가, 이런 걸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굉장한 무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국경, 국적을 뛰어넘어서 그냥 좋은 사람,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오사카의 도톰보리 인근 잡화점에서 급히 나오는 젊은 한국인 여성.

이제 막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주변에 세워 놓았던 자신의 자전거로 향합니다.

다섯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나선 길.

그렇다고 집으로는 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녀에겐 또 하나의 아르바이트가 남아 있기 때문이죠.

오후 다섯 시에 끝난 잡화점을 떠나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하는 냉면집까지 달려가야 하는 거리는 약 5킬로 미터.

냉면집 오픈 시간이 6시니까 시간이 그리 촉박한 건 아닌데 유난히 페달을 세차게 밟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던 거군요.

자전거를 세우더니 냉큼 편의점으로 들어갑니다.

일을 하느라 끼니를 챙길 여유가 없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나름대로 속도를 내서 달려온 길이었습니다.

냉면집 뒷골목에서 쭈그려 앉아 김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이네요.

[윤 솔, 25세·일본 정착 9개월째]
"돈키호테(잡화점)도 몸 쓰는 일이다 보니까 좀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배고프니까 간단하게 한 개씩 사 먹는 것 같아요."

저녁 여섯 시부터 자정이 넘는 시각까지 꼬박 냉면집 홀 서빙 일을 합니다.

손님들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잠시라도 쉴 틈이 없습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길고 긴 하루 일이 끝났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하루 일을 마친 20대 중반 한국 여성 윤솔 씨.

그녀를 태운 자전거가 오사카의 밤 골목으로 사라집니다.

다음날 아침.

윤솔 씨가 살고 있는, 세평 남짓한 방을 찾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노트북 컴퓨터로 놓친 한국 방송부터 찾아봅니다.

작은 책장은 일본어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네요.

이곳은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다섯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른바 셰어 하우스.

월세는 우리 돈으로 40만 원 정도.

공과금이 포함된 가격이라 크게 비싸지만은 않다는 게 윤솔 씨의 설명입니다.

방은 비좁지만, 다행히 1층의 거실과 주방은 공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종일 일만 하는 윤솔 씨를 타이완에서 온 유학생 언니들이 은근히 걱정해 줍니다.

일본에 온 지 9개월.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뒤 한국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직은 초창기라 적응하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앞으로의 전망도 불투명하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만큼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윤 솔, 25세·일본 정착 9개월째]
"한국으로 치면 '너 이제 취업 안 돼.' 이런 나이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잖아요.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뭔가 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만약에 취업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취업이 안 되면…아니에요. 어디선가 저를 뽑아줄 회사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할래요."

일본 땅 어딘가에 과연 윤솔 씨의 자리가 있을까요?

좁은 골목길 사이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도쿄 시내 아키하바라 지역의 한 대형 면세점.

중국 관광객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입니다.

각종 전자 제품에서부터 생활 소품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들이 손님들의 시선을 가로챕니다.

무려 3만 종류가 넘는 상품이 주로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팔려 나갑니다.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입니다.

매장이 한산해질 무렵에 나타난 남자.

바로 이 면세점의 운영자 장영식 대표입니다.

전시된 상품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다니면서 직원들에게도 매장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아키하바라 면세점은 장영식 대표가 면세점 사업을 시작해서 처음 개점한 곳이라 애정도 깊습니다.

장영식 대표가 일본에 온 건 1990년대 초반.

유학을 꿈꾸고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아버지가 논 한 마지기를 팔아 준 300만 원이 전 재산이었습니다.

[장영식, 에이산 대표]
"처음 시작한 게 고깃집에서 불판 닦기를 했습니다. 지하 1층에서요. 그걸 쭉 하면서 이제 학비를 벌어야 하는데 불판 닦기 하나만 해서는 돈을 마련할 수가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만 투 잡을 한 거죠. 투 잡이 신문 배달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 쌀 파동이 있었습니다. 아, 한국 쌀을 수입해 오면 좋지 않겠나, 싶어서 그때 한국 쌀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쌀장사를 한번 해보니까, 아, 이런 게 바로 무역이라는 거구나! 그래서, 아! 무역을 해야 되겠구나."

장 대표는 1997년 에이산을 창립한 뒤 일본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대량 구매해 한국에 파는 형식으로 작은 무역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죠.

지금은 일본의 다양한 지역에 17개 면세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 매출 2천억 원.

초라했던 시작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장영식, 에이산 대표]
"2008년에 엔화가 폭등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가장 큰 손실을 입었죠. 거의 100억 이상의 적자를 봤습니다. 2011년 동북 지역 지진, 쓰나미, 방사선 방출, 그러다 보니까 초토화가 됩니다. 면세점이. 한 명도 안 와요."

이렇게 큰 위기를 하나하나 넘어오면서 그는 사업 다각화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전기 자전거 사업에 뛰어든 건 그 때문입니다. 해외 사업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장영식, 에이산 대표]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이쪽이 진출할 지역이 되겠죠. 우리가 겨냥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이 동남아시아, 아시아권입니다."

여전히 개척자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장영식 대표.

불판 닦기에서 시작해 한해 2천억 매출의 회사를 키워낸 그는, 일본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젊은 뉴커머들에게 의미심장한 성공 모델입니다.

그가 일본에서 성공을 이뤄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밑바닥에서부터 새로운 모험을 꾸준히 시도하며 일본 사회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적응해 가는 힘이 그 열쇠임을 장 대표는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 간 경계를 뛰어넘는 글로벌 시대의 야심찬 신도래인입니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뉴커머 재일 동포들은 일본 속에 또 다른 한국의 무늬를 새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일간의 외교적 숙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민간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이끌어 내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유혁수, 요코하마 대학교 교수]
"자기 자신의 오리진 (근본)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면 여기 규범에 따르지만 또 창의적인 부분이 나올 수 있거든요. 여기 다수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저희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박 일, 오사카 시립대학교 교수]
"재일 동포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 곧, 재일 동포들의 정체성의 관건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새로운 환경과 한일 관계의 국면을 돌파하며 살아가는 재일 동포들.

그 뿌리인 한국적인 미덕을 품은 채 한편으로는 일본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재일 동포 고유의 역사와 그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도 그들의 삶과 도전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지지해주는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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